소설리스트

K-장녀가 육아물에 빙의하면-58화 (59/197)

58.

“우리 가문에는 네 명의 직계가 있죠. 전 가주였던 할아버님, 현 가주인 아버지. 그리고 후계자인 멜도르와 제일 아래에 있는 나.”

킬리언의 설명을 들으니, 아까의 분노 사이로 흥미로움이 조금 올라왔다.

“그리고 전하를 처음 만난 그날은, 제가 아직 임시 가주로 임명받기 전이고요.”

난 기대었던 소파에서 느긋이 등을 떼며 그를 응시했다.

“왜 그 세 명을 제치고 내게 제일 먼저 다가왔을까요? 내가 유일하게 여자라서? 능력을 사용하기 쉬울 테니?”

어디, 뭐라고 대답하는지 들어 볼까?

시험하듯 질문을 던지고 난 킬리언의 반응을 관찰했다.

이런 내 시선을 느꼈는지 그는 단정한 자세를 풀지 않은 채,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능력을 사용하기 쉬워서 그런 게 아닙니다. 다만 앨턴 양이 여자라서 접근한 건 맞습니다.”

그 말에 나도 모르게 눈에 힘이 들어갔다.

형형한 눈빛에 킬리언의 주먹이 조금씩 떨리는 것이 보였다.

그는 자신의 떨림을 애써 감추지 않았다. 그저 차분히 말을 이을 뿐이었다.

“앨턴 양이 언급한 이들은 공작가의 일원으로서 언제나 남 부러울 것 없이 자랐을 겁니다. 그런 이들은 제게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전 현 상황에 부족함을 느끼는 사람이 절실했습니다. 형님께 복수를 한다는 건, 결국 황태자를 끌어내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기꺼이 거기에 응해 줄 이가 필요했어요.”

킬리언은 그렇게 말하며 조용히 숨을 들이쉬었다.

“그래서 앨턴 양을 원했습니다. 마갈라 제국에 있었을 때부터, 당신은 평범한 영애의 삶을 원치 않는다고 판단했으니까요.”

난 킬리언의 말에 귀 기울였다.

“분명 당신은 현 상황에 불만을 품고 제 손을 잡을 거라 확신했습니다. 앨턴 양은 돌아가신 황후 전하처럼…… 후계자가 되지 못하는 고위 귀족 가문의 ‘장녀’였기에.”

“그래서 미인계를 쓰려고 했고요?”

“그건…… 다시 한번 사죄드리겠습니다. 마음이 급해 제가 무례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킬리언은 그렇게 말하며 내게 고개를 숙였다.

사실 황족이 다른 이에게 진심으로 고개를 숙인다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난 그가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마음을 풀었다.

“용서하겠습니다. 다음부터는 주의해 주세요.”

내 말에 킬리언이 고개를 들어, 날 살폈다.

나의 기세가 원래대로 돌아온 걸 확인한 그는 서서히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앨턴 양.”

그 말에 난 살짝 어깨를 으쓱이며 화답했다. 그러고 킬리언에게 몇 가지 떠오르는 의문들을 말했다.

“단지 장녀라서 저한테 접근한 건가요? 제가 만약 아무런 불만 없이 현 상황에 순응하고 있었다면 큰 의미가 없었을 텐데요.”

“물론 단순히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닙니다. 사실 ‘벨라디 앨턴’이라는 사람을 어느 정도 파악한 후였거든요.”

그 말에 난 더 큰 흥미를 느끼며, 킬리언 쪽으로 몸을 숙였다.

“날 파악했다? 저흰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는데?”

“그렇지만 들려오는 소식들로 앨턴 양을 얼핏 엿볼 수는 있지요.”

킬리언이 싱긋 웃었다.

“우선 어머니의 편지에서 당신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편지라면, 돌아가신 황후 전하의?”

“예. 앨턴 양은 모르셨겠지만, 사실 어머니께서는 옛날부터 당신을 눈여겨봤습니다. 덕분에 편지에는 앨턴 양에 대한 내용도 간간이 적혀 있었죠.”

“절 눈여겨봤다고요?”

“……부끄럽지만, 아마 저와의 약혼을 추진하고 싶으셨던 모양입니다.”

그 말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저와 약혼을 했다면, 전하의 입지가 탄탄해질 수 있었겠죠.”

우리 둘은 나이 차이도 얼마 나지 않았고, 아버지도 황실에 대해 악감정이 없었다.

아마 첫 번째 황후가 살아 있었다면 정말 킬리언과 난 약혼 관계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지금은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지만.’

앨턴 공작가를 손에 넣으려는 내게 황실과의 결혼은 오히려 장애물이니까. 만약 약혼이 추진된다고 하더라도 내 쪽에서 막아 낼 것이다.

내 눈빛을 읽었는지 킬리언이 피식 웃었다.

“이미 때를 놓친 이야기입니다. 그래도 편지 덕분에 당신을 알게 되었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꾸준히 앨턴 양의 소식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연락책이 따로 있었던 모양이죠?”

“아무리 제가 타국에 있다고 해도, 가만히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그때, 우리의 분위기가 풀어진 걸 눈치챘는지 소파 뒤쪽으로 사라졌던 아이닝이 쪼르르 다가왔다.

킬리언은 가까이 온 아이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마저 말했다.

“앨턴 양이 사교계에서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만 봐도 당신의 성향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전부 추측일 뿐이니, 도박이라고 해도 할 말은 없습니다만…….”

킬리언은 내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당당하게 미소 지었다.

“전 제 판단을 의심하지 않았고, 오늘 가주 회의에서 다시 한번 확신을 얻었죠. 당신이야말로 제가 찾고 있던 사람이라는 것을.”

그 말을 들으며, 난 문득 과거의 나를 떠올렸다.

‘만약 내가 전생을 자각하지 못하고 킬리언을 만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결국 킬리언이 꾸미는 일은 황위 다툼과 다름없었다. 거기에 동조하면 아버지와 멜도르에게 큰 피해가 갈지도 모르지.

그러니 킬리언의 제안을 거절했을까?

……답은 간단하게 나왔다.

‘그럴 리가.’

그때 당시 내 세계는 너무 좁았기 때문에 가족밖에 몰랐다. 하지만 점점 나이를 먹으며 깨달았을 것이다.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내 몸을 욱여넣기엔, 나라는 사람이 너무 크다는 것을.

그걸 깨달은 후에는 나만의 길을 개척하려고 했겠지. 전생을 기억하든, 그렇지 않든.

‘사람의 본질은 바뀌지 않으니까.’

그러니 전생에서도 결국 집을 뛰쳐나왔고.

그 생각을 하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이런 면으로 봤을 때, 킬리언의 배팅은 성공한 셈이었다.

“통찰력이 좋으시네요.”

“칭찬 감사합니다, 앨턴 양.”

“결론은 제가 전하의 복수에 동참하길 바라시는 거군요.”

“그렇지요.”

“돌아가신 황후 전하의 죽음을 밝히고, 황태자를 끌어내린다면. 전하께서는 황제가 될 계획이신가요?”

직접적인 내 질문에 킬리언은 잠시 말이 없었다.

나 역시 가만히 그를 기다리니, 곧 생각을 정리한 듯 킬리언이 희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폐하의 자식이 꼭 저만 남은 건 아니니까요.”

그 의미심장한 대답에 난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헤라 황녀…….’

때마침 승승장구하는 황태자를 견제할 세력이 필요했다. 그놈을 낱낱이 해부해 원작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도 알아내야 했고.

무엇보다.

‘차기 황좌를 헤라 황녀가 차지하는 게 제일 유쾌한 그림이 되겠어.’

난 킬리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으며 유유히 입을 열었다.

“전 북부의 완전한 주인이 아닌 임시 가주일 뿐. 앨턴 공작님과 같이 과감한 도움을 주기 힘들 수도 있어요.”

“괜찮습니다. 전 앨턴 양이 공작의 자리를 손에 넣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니까요.”

“그러려면 제국의 법을 바꾸어야 하는데요?”

제국의 법을 바꾸려면 꽤나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우선 동, 서, 남, 북.

각 귀족 연합 대표의 동의를 받은 후, 황제에게 최종 승인까지 얻어 내야 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황제의 최종 승인은 아무 때나 받을 수 없고, 대 가주 회의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일단 북부와 서부는 걱정 없어.’

내게 죄책감을 느끼는 아버지와 다른 이들보다 개방적인 사고를 가진 프레도 공작을 설득하는 건 자신 있었다.

골치 아픈 건 동부와 남부였다.

일단 남부에는 시온이 있고, 아글라 공작도 꽉 막힌 자가 아니라 협상은 가능하겠지만…….

‘케스퍼 아글라가 문제야.’

남부의 전반적인 사업은 전부 케스퍼가 운영하고 있었기에, 연합에서 그가 가진 영향력은 지대했다.

그리고 동부는.

‘나와 연관된 자가 단 한 명도 없었지.’

하지만 지금 여기서, 그 연을 만들면 된다.

난 그런 의미를 담아 킬리언을 빤히 바라봤다. 내 시선을 바로 알아차린 킬리언이 싱긋 웃으며 답했다.

“동부 연합의 동의는 약속할 수 있습니다.”

원하는 말이 나오자, 난 처음으로 킬리언에게 상냥한 웃음을 보여 주었다.

생각해 보니 그에게 영혼 없는 미소는 여러 번 보여 주었지만, 이런 호의적인 얼굴은 한 적이 없었다.

‘이제 한배를 탈 거니까,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지.’

내 웃음에 킬리언의 손끝이 살짝 움찔거렸다.

동시에 그에게 쏙 안겨 있던 아이닝이 스르륵 품에서 벗어났다. 사막여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슬금슬금 내가 앉아 있는 곳까지 다가왔다.

난 그런 아이닝을 잠시 관찰했다.

‘아까는 나를 경계했으면서, 갑자기 다가오네?’

정령이라서 그런가 행동이 참 가늠 안 되고 자유로웠다.

난 아이닝에게 눈을 떼고 킬리언을 응시했다. 지금은 아이닝보다 킬리언과의 대화가 더 중요했다.

“그 외에, 저에게 약속할 수 있는 건요?”

“……예?”

킬리언의 대답이 한 박자 늦게 들려왔다.

난 눈웃음을 머금은 채 그 물음에 답했다.

“전하를 돕는 조건으로 동부의 동의 말고 또 어떤 것들을 받을 수 있나 궁금해서요.”

이쪽은 무려, 차기 황제로 확정된 황태자를 몰아내는 데 동조하는 것이다.

그런데 고작 동부 연합의 약속 정도로 만족할 수 있겠어?

‘나란 사람은 뽑을 수 있는 건 최대한 뽑아내야 밤에 발 뻗고 자거든.’

뭐, 애초에 나도 황태자를 치울 가능성을 염두하고 있었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고.

내 웃음에 킬리언 역시 속셈을 눈치채고는 입꼬리를 올렸다.

“앨턴 양이 필요하실 때, 아이닝의 협조를 얻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맞아! 내가 도와줄게!”

내 주변을 서성이던 아이닝이 폴짝 소파 위로 뛰어 올라왔다. 그러더니 내 허벅지에 툭 발을 올리며 나를 올려다봤다.

“내가 도와주면 계속 웃을 수 있어?”

아이닝은 그렇게 말하며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