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그렇게 전 아이닝과 계약을 맺게 되었습니다.”
킬리언의 긴 이야기가 거의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
난 지끈거리는 머리를 살짝 짚으며 그를 바라봤다.
“그러니까…… 황태자가 강제로 전하를 마갈라 제국으로 보냈고.”
“예.”
“그것도 모자라서 황후를 죽였고.”
“예.”
“당신은 그런 황태자에게 복수하기 위해 정령과 계약을 맺었다?”
“요약을 잘하시네요.”
“잘한다! 잘한다!”
킬리언과 아이닝이 해맑은 미소로 답했다.
난 그런 둘을 보며 남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이지?’
이건 더 이상 원작과 비교할 수준이 아니었다. 내가 방금 언급한 세 문장 중 그 무엇 하나도 원래의 정보와 부합하지 않았으니까.
‘그나마 비슷한 건 남부의 전염병 치료제를 황태자가 찾은 건가.’
그 외에는 황후가 치료제의 부작용으로 사망하고, 그녀를 오진한 주치의 일가가 몰락한 것 정도.
하지만 원작에서 황후의 죽음은 거의 급사였다. 남부의 폐병과 황후의 호흡기 질환은 증상이 비슷해도 근본적인 발병 원인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황후는 치료제를 먹자마자 갑작스러운 심장 마비를 일으켰지.’
난 원작의 내용을 떠올리며 킬리언에게 물었다.
“돌아가신 황후께서는 분명 치료제를 드신 후에도 전하께 편지를 보낸 건가요?”
“예. 그 후로도 거의 1년간 꾸준히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첫 번째 황후가 치료제를 복용하고도 1년 동안 살아 있었다니.
역시 디테일이 달랐다.
‘거기에 또 황태자가 엮여 있고 말이야.’
원작이 틀어진 것의 뒤에는 전부 황태자가 관련돼 있었다.
생각해 보면 황태자는 참 이상한 놈이었다.
평소 놈의 행동과 발언을 살펴보면 분명 이기적이고 생각이 짧은데, 펼친 정책만큼은 평균 이상의 성과를 냈다.
그 이유는 다 황태자의 곁에 과분할 만큼 충성스럽고 믿음직한 인재들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마침 황태자가 가진 유일한 장점도 본인 성정에 어울리지 않게 아랫사람의 의견을 잘 받아들이는 것이라 들었고.
‘그래서 시너지 효과가 좋은 거라 여겼어.’
그런데 킬리언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처음 원작과 다른 행보를 보인 건 바로 황태자인 모양이었다.
‘가뜩이나 내 앞길을 가로막을 것 같은데…….’
이렇게 과거까지 찝찝하다니, 아주 종합 선물 세트가 따로 없군.
여러모로 감탄하는 사이 킬리언이 말을 이었다.
“아이닝과 계약을 맺은 후로는 일이 원만하게 풀렸습니다.”
“원만하게 풀렸다는 건?”
“정령과 계약을 맺게 되면 그 정령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힘을 이어받게 됩니다.”
저건 나도 알고 있는 정보다. 그래서 네시아 역시 ‘그리운 사람의 향수를 느끼게 하는 힘’을 가지게 되니까.
‘그럼 킬리언은 무슨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거지?’
내 궁금증을 읽기라도 한 듯, 그가 곧바로 입을 열었다.
“전 불의 정령이 가지고 있는 ‘매혹’의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초면이라고 해도 제게 호감을 느낄 수 있게 하는 힘이죠.”
“……그렇군요.”
또다시 예상치 못한 이야기가 나왔지만, 난 표정을 관리하며 여상히 답했다.
“그래서 전하의 여성 편력이 화려하다는 이야기가 돌았던 거군요.”
“예. 사실 여성에 한정 지어 그 능력을 사용한 건 아니지만, 그 부분만 도드라져서 소문이 퍼졌습니다.”
‘그 소문은 분명 킬리언의 수려한 외모가 한몫했을 거야.’
킬리언이 이걸 아는지 모르겠다만.
아이닝이 폴짝 뛰어오르며 외쳤다.
“킬리언이 인간들을 유혹했대요! 인간들이 전부 헤벌레로 변했대요!”
“아이닝.”
“킬리언은 바람둥이!”
결국 킬리언이 다시 한번 아이닝의 주둥이를 잡았다.
난 그런 둘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 콧대 높은 마갈라 제국의 귀족들이 킬리언 황자를 좋아했던 이유가 이거로군.’
정령 고유의 힘이 작용한 결과였어.
그렇게 생각하며 난 여러 가지 것들을 물었다.
“매혹이란 능력을 얻었으면서 왜 마갈라 제국에 남아 있었나요?”
“이 능력을 완전히 조절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럼 지금은?”
“완벽하게 다룰 수 있죠.”
“정령사라고 밝히지 않은 건 황태자의 경계를 사지 않기 위해선가요?”
“맞습니다. 제 세력을 구축하지도 못했는데, 섣불리 제일 강력한 패를 보일 수는 없으니까요.”
그렇게 말한 킬리언이 씨익 웃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마침 바람둥이라는 인식도 생겼으니 최대한 이용할 생각이고요.”
“확실히 그런 인식이 황태자의 경계심을 낮추겠네요. 차라리 그 능력을 이용해 황태자 자체를 유혹해 보는 건 어때요?”
그게 제일 쉽고 빠른 길이지 않나?
내 말에 킬리언이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쉽게도 그건 불가능합니다. 형님에게는 이 능력이 통하지 않거든요.”
“능력이 통하지 않는다고요?”
“그건 정령의 마법 때문이야!”
내 의문에 아이닝이 외쳤다.
“내 힘은 정령의 마법과 관련된 인간에게는 안 통하지!”
“……정령의 마법?”
“무슨 마법인지는 아이닝도 모르지만!”
“아쉬운 일이죠. 그것만 아니라면 진작 제 능력이 통했을 텐데…….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니.”
킬리언의 마지막 말을 듣는 순간, 그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저를 보고 뭐 느껴지는 게 없습니까?
오호라.
“그래서 내게 갑자기 접근했던 거군요.”
“예?”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날, 나한테도 능력을 사용했던 거죠?”
내 말에 킬리언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내 시선을 피하다가 곧 머쓱하게 웃었다.
“하하하, 그때는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릅니다. 앨턴 양에게도 제 능력이 통하지 않아서.”
“그럴 수밖에요. 저 역시 정령의 마법과 연관되어 있으니까.”
“그 말은.”
킬리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바라봤다.
난 소파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제가 아주 어릴 적, 어머니께서 심신을 안정시켜 주기 위해 정령의 마법을 걸어 준 적이 있으세요.”
그 영향으로 전생의 기억을 깡그리 잊고 이 세계에 적응할 수 있었지. 그만큼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던 순간들을 복습해야 했지만.
난 뒤의 말은 생략한 채 킬리언을 바라봤다.
“그 매혹이 통하지 않는 건, 오로지 정령의 마법과 연관된 경우밖에 없나요?”
내 말에 아이닝이 해맑게 외쳤다.
“상대가 정령과 계약해도 안 통해!”
“황태자가 정령사일 확률은?”
이 질문에는 킬리언이 차분히 대답했다.
“없습니다. 형님께 느껴지는 자연 친화력은 지극히 미미했으니.”
둘의 대답에 난 확신했다.
‘그럼 가능성은 하나로군.’
황태자가 원작과 다른 행동을 보인 건 백 퍼센트 정령의 마법과 연관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원작을 뒤틀 이유도, 정령 고유의 힘이 통하지 않을 이유도 없으니까.
정령의 마법은 원작에서도 알려진 것이 거의 없어서 어떤 기상천외한 힘이 있는지 가늠하기 힘들고.
‘도대체 황태자는 정령의 마법과 어떤 식으로 얽힌 거지?’
설마 그놈도 빙의를 했나? 아니면 미래라도 본 거야?
난 여러 추측을 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내 말에 킬리언이 눈을 마주했다.
난 생각을 멈추고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사정은 잘 알겠고……. 매혹까지 사용하면서 내게 접근한 이유는?”
결국 이게 제일 중요하니까.
잘못하면 킬리언의 능력에 농락당할 뻔하지 않았나. 그건 떠오르기만 해도 짜증 나는 일이었다.
‘타인을 위해 나를 희생하는 건 스스로 용납할 수 없어.’
심지어 그걸 막아 준 게 결국 어머니라고 생각하니, 심사가 뒤틀렸다.
난 싸늘해진 눈으로 킬리언을 바라봤다. 내 기류가 달라진 것을 느꼈는지 킬리언은 자세를 바르게 했다.
그래도 눈치는 있는지 왜 내가 언짢아졌는지 단번에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시종일관 여유로웠던 그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긴장한 것이 눈에 띄었다.
그의 목울대가 크게 꿈틀거렸다.
“죄송합니다, 앨턴 양. 능력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당신을 농락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저 저희는 친분이 없으니, 약간의 호감만 일으킬 계획이었습니다.”
난 그 변명에 굳이 대답하지 않고 킬리언의 회색 눈동자를 꿰뚫듯 주시하기만 했다. 킬리언과 함께 내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한 아이닝은 다급히 소파 뒤로 도망갔다.
내 눈치를 살피던 킬리언은 애써 다듬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제가 잘못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능력이 아니면 당신과 함께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진심으로 사과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킬리언이 단정하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난 그의 정수리를 가만히 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내게 다가온 목적이 황태자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인가요?”
“앨턴 양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전 형님처럼 손발이 잘 맞는 세력이 없으니까요.”
“굳이 저를 고른 이유는? 세력을 키우려면 첫 번째 황후 전하의 가문이었던 티벤 후작가도 있고, 아글라 공작가만 한 세력을 원했다면 프레도 공작가도 있었는데.”
그 말에 킬리언은 마치 상사에게 보고하는 신입사원이라도 되는 듯, 바짝 자세를 정비했다.
“앨턴 양의 말대로 제일 먼저 티벤 후작의 협조는 얻었습니다. 다만, 현재의 티벤 후작가는 동부 연합의 대표 자리에서 흔들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공작가만큼 영향력이 없지요.”
하긴, 첫 번째 황후가 죽었으니 티벤 후작가는 연합에서 옛날만큼 목소리를 내기 애매한 입장이었다.
만약 두 번째 황후의 가문이 한미하지 않았다면 진작 동부 연합 대표의 자리를 뺏겼겠지.
난 킬리언의 이어지는 말에 집중했다.
“프레도 공작가도 생각하지 않았던 건 아닙니다. 하지만 그곳은 아글라 공작가와 교류가 잦은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형님 몰래 포섭하기에는 적절한 대상이 아니었어요.”
또박또박 말하던 킬리언은 곧 내 눈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는 긴장한 만큼 솔직함과 진정성을 담아 목소리를 내었다.
“앨턴 공작가가 위치한 북부는 위치상 남부와 수도에서 제일 멀었고, 가는 길이 험난해 고립이 쉬움을 압니다. 그렇기에 비밀리에 제 편으로 만들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세력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 말에 난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며 입꼬리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