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감정에 젖을 시간이 없다. 이제 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
“예?”
“내 사인은 치료제의 부작용으로 알려질 거다. 놈이 전부 손을 써 놨어.”
황후는 숨을 헐떡이며 죽어 가는 목소리를 내었다.
“그 아이를 믿는 게 아니었다. 아무리 나를 싫어한다고 해도 내 핏줄이라 여겼건만……. 내가 너무 늦게 눈치챘어.”
그 말을 듣는 순간 킬리언은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황후가 하는 말의 의미를 머리가 받아들이지 못했다.
“어, 어머니. 그게 무슨 소리세요.”
“킬리언, 잘 들어라.”
사색이 된 킬리언을 보며 황후는 냉정하게 말했다.
“그 욕심 많은 놈은 본인이 황태자로 임명받았다고 해도 널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
“아……. 아아…….”
“내가 죽고 얼마 안 가 널 데커딜 제국으로 부를 거다. 그러더라도 여기로 절대 오지 마라. 무슨 꼴이 날지 몰라.”
“어머니…….”
“마법이든 검술이든 무엇이든 좋으니 너 자신을 지킬 힘을 키워야 해.”
킬리언은 황후의 말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그녀가 내뱉는 말들이 너무 비현실적으로 들렸다.
‘형님이 어머니를 죽이고 있다.’
이 말도 안 되는 짓을 도대체 어떻게 믿으라는 말인가.
하지만 황후의 말은 단호했고, 눈빛은 뚜렷했다.
킬리언은 이게 어머니가 자신에게 남기는 마지막 유언임을 느꼈다.
“무서워요, 어머니.”
결국 소년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흐느꼈다.
황후는 그런 막내아들을 안타깝게 바라보다가 마음을 다잡고 결연하게 말했다.
“섣불리 폐하께 이 사실을 발설해서는 안 된다. 폐하는 그리리카 선황 덕에 인식에 균형이 잡혔지만, 단지 그뿐. 썩 배려심 깊고 눈치 빠른 자는 아니야. 증거가 없으면 오히려 네가 당한다.”
황후의 말에 킬리언도 침착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그가 울음을 참으며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 다이아는 네게 줄 테니 필요할 때 사용하도록 해라. 퍼델은 분명 다이아의 행방을 네게 물어볼 거다. 내가 이미 방도를 마련했으니, 넌 그저 모르는 척해. 어차피 황태자가 된 녀석은 이 제국을 벗어날 수 없어.”
“예, 어머니.”
“그리고 혹여라도.”
황후는 쇳소리를 쥐어짜며 말했다.
“내 죽음에 절대 죄책감 가지면 안 된다……. 너에게는 너무 미안하구나.”
“……어머니.”
“네 할아버지에 대한 반발로 더더욱 가정에 무신경하게 굴려 했다. 내가 자식에게 충실해지는 모습을 그 작자에게 보이기 싫었어. 그러니 난 부모로서 자격이 없다. 네가 울 가치가 없는 사람이야.”
그 말에 킬리언은 고개를 떨궜다.
자신을 마갈라 제국으로 보낸 퍼델은 물론이고 그걸 말리지 않은 황제와 황후도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황후를 온전히 미워하기에는, 그녀는 그동안 유일하게 킬리언의 안부를 물어 온 사람이었다.
화가 나 답장을 보내지 않아도, 황후는 꾸준히 그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나마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고 진심 어린 사과를 속삭였다.
킬리언은 손안에 있는 다이아가 괜히 뜨겁다고 생각했다.
이 마법 다이아몬드는 황후가 자신의 목숨처럼 귀히 여기던 그리리카 선황의 유품이었다.
이걸 자신에게 물려준 것이 미숙한 어머니의 뒤늦은 애정이란 것을, 일찍 철이 든 소년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황후의 눈빛이 처음으로 다정했다. 그걸 마주하자 외로웠던 마갈라 제국에서의 생활이 전부 잊히는 것 같았다.
킬리언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어머니는 제 어머니세요.”
“……건강해야 한다.”
“예, 어머니.”
“이제 가거라. 마갈라 제국과 이곳은 시차가 있으니.”
그 말에 창가를 보니 해가 뜨고 있었다.
킬리언은 조심스럽게 황후에게 안겼다.
“조심하세요.”
“잘 가렴.”
황후가 어색한 손길로 그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함께한 시간보다 떨어져 있던 시간이 길었던 모자는,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나눈 후 헤어졌다.
아카데미 기숙사로 돌아온 킬리언은 끝내 참담함을 견디지 못하고 소리를 죽인 채 오열했다.
‘전부 거짓말이었으면!’
형님이 어머니를 죽인다니.
역사서에서 수없이 많이 봐 온 황족의 비극이었지만, 이걸 자신이 겪게 되었다는 것이 숨 막히도록 괴로웠다.
‘도대체 왜! 형님! 왜!’
킬리언의 머리에 수많은 물음표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킬리언은 비록 어머니와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지만, 그녀의 죽음을 이렇게 넘길 수는 없었다.
소심하고 상냥한 소년의 가슴 속에 꺼지지 않는 분노의 불씨가 타올랐다. 그건 그동안 믿고 의지하고, 또 원망했던 퍼델을 향한 복수의 다짐이었다.
그렇게 킬리언이 이를 악무는 동안, 황후의 부고 소식이 마갈라 제국까지 날아왔다.
동시에 퍼델은 킬리언에게 여러 번 재촉의 편지를 보내왔다.
내용은 어머니의 죽음을 무시할 것이냐, 그녀의 다이아가 어디 있는지 아느냐 같은 것들이었다.
그렇게 무심했던 황제조차 킬리언에게 소식을 물었지만, 킬리언은 그것들을 전부 무시했다.
그는 황후와 나누었던 이야기대로 데커딜 제국에 돌아가지 않았다.
‘어머니의 말씀이 맞아. 힘을 키워야 해.’
말 그대로 날 지킬 물리적인 힘.
다행히 퍼델은 아직 암살자 같은 것들을 보내지 않았다.
킬리언은 그사이 힘을 키우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마침 키가 커지고 육체가 성장하기 시작하는 나이였다. 아카데미에는 훌륭한 스승들과 동기들도 있었다.
그렇게 킬리언은 그들의 도움을 받으며 한참 검과 마법에 집중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부족함과 조급함에 쫓겼다.
‘내가 여기서 또 무엇을 해야 하지.’
한참 고민을 하고 있던 시기에, 한 아카데미 동기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너한테 정령사의 자질이 있는 것 같은데?”
그 동기는 마갈라 제국에서도 유명한 정령사 집안의 후손이었다.
킬리언은 어쩐지 그 말이 계속 잊히지 않았고, 어머니의 가문인 티벤 후작가에도 정령사가 있었음을 기억해 냈다.
‘정령…….’
퍼델에게 복수하고 싶었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히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냥 마법과 검만 배워서는 안 됐다. 그에게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필요했다.
‘그래,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는 또 다른 힘을 키우자.’
그 후부터 킬리언은 정령에 대한 수많은 기록을 읽으며 연구에 돌입했다.
정령을 사랑하는 마갈라 제국은 외국인의 열정을 기특히 여겨, 귀한 연구 자료들의 공유를 허락해 주었다.
킬리언은 황후의 다이아몬드를 이용해 낮에는 아카데미 생활을 보내고, 밤에는 정령의 소환진과 계약 수식을 연구하며 마갈라 제국의 갖은 오지를 탐험했다.
정령석이 있다면 원하는 정령을 단숨에 소환할 수 있지만, 그건 킬리언의 손에 없으니 오로지 몸으로 뛰는 수밖에 없었다.
‘이건 미친 짓이야.’
사실 킬리언도 알고 있었다. 정령을 소환하고 계약을 맺는다는 게 얼마나 허무맹랑한 소리인지.
마갈라 제국은 정령사의 맥을 잇기 위해 각종 연구를 감행했고, 수많은 정령석을 소진했지만 전부 헛수고로 끝났다.
소환된 정령들은 그 어떤 인간과도 계약을 맺지 않은 채 자연으로 돌아갔다. 심지어 인간에게 호의적이라고 알려진 정령들마저.
그렇지만 킬리언은 멈출 수 없었다.
그에게는 때때로 덮쳐 오는 비참함과 무기력감을 메꿔 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리고 오로지 정령만이 그의 흥미를 이끌었다.
그렇기에 킬리언은 기꺼이 정령 연구에 몸을 혹사하며 몰두할 수 있었다.
그렇게 다시 시간이 흐르고, 킬리언의 키가 아카데미 동기들 중 가장 커졌던 어느 날.
“안녕-!”
숨이 턱 막히는 뜨겁고 아름다운 백색 모래의 향연 속에서.
“난 아이닝! 불의 정령 아이닝!”
킬리언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정령을 소환할 수 있었다.
작은 몸체에 비해 커다란 귀를 가진 여우는 연구 자료에 나온 불의 정령 ‘아이닝’과 일치했다. 애초에 소환된 정령이 자신을 아이닝이라 소개했으니,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정령은 킬리언에게 살갑게 다가왔다.
“왜 날 소환했어? 나랑 계약하려고? 좋아! 좋아!”
어린아이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작은 사막여우는 기진맥진한 킬리언의 주위를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긴장이 풀려 털썩 모래 위에 주저앉은 킬리언은 자신이 소환해 놓고도 믿기지 않아서 이렇게 속삭였다.
“……어째서?”
“으응-?”
햇볕을 막기 위해 쓴 두건 사이로 보이는 킬리언의 눈은 잔뜩 지쳐 있었고 또 멍했다.
“그동안 아무하고도 계약을 맺지 않았으면서…… 어째서 나와 계약하겠다는 거야?”
정령사가 존재했던 과거부터 가장 소환하기도 힘들고, 계약에 응해 주지도 않았던 정령들이 있었다. 불의 정령 아이닝과 어둠의 정령 타우딘, 이 두 정령이 그 대표적인 예였고.
물론 킬리언이 몇 날 며칠 이 사막을 헤맸던 건 그 아이닝을 소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막상 아이닝이 소환에 응하고 계약하자고 다가오자, 그는 믿을 수가 없었다.
킬리언의 물음에 아이닝이 고개를 갸웃거리다 폴짝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운명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불쌍한 영혼. 아이닝이 위로해 줄게.”
그 말에 킬리언의 몸이 흠칫 놀랐다.
“이제 혼자 슬퍼하지 마.”
작은 정령은 그렇게 말하며 킬리언의 품에 파고들었다.
그 따스한 온기와 무게감을 느끼자 킬리언의 두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내가 불쌍한가?’
자기 연민에 빠지고 싶지는 않지만, 킬리언도 알고 있었다.
자신은 서서히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을.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했나?’
그랬던 것 같다.
아무나 좋으니까 자신을 봐 주고 괜찮냐고 속삭여 주길 바랐다.
킬리언은 품 안의 정령을 꼭 껴안았다.
턱 끝에 닿는 부드러운 털이 그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것 같았다.
“내 편이 필요해.”
“아이닝이 되어 줄게.”
“계속 함께 있는 거야?”
“계약을 맺는다면!”
아이닝이 고개를 들어 킬리언의 뺨에 자신의 얼굴을 비볐다.
그러자 킬리언이 살며시 웃으며 아이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 이름은 킬리언 앨러만 데커딜. 나와 함께해 줄래, 아이닝?”
“좋아!”
아이닝의 대답이 끝남과 동시에 킬리언의 이마에 마름모 모양의 소환진이 생겼다가 사라졌다. 정령과 계약을 맺었다는 표식이었다.
그와 동시에 알 수 없는 뜨거움이 킬리언의 몸에 가득 채워졌다.
아이닝은 까만 눈동자를 반짝이며 꺄하항 웃었다.
“잘 부탁해, 내 첫 계약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