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솔직히 그녀는 후작이 퍼델을 자주 찾는 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황후의 남동생도 티벤 후작이 편애하며 키웠지만, 그와 정반대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황후의 남동생은 자신의 아버지보다 그리리카 선황을 훨씬 깊이 존경했다. 황후는 그런 남동생을 보며 언제나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내 남동생이 이러니, 아들도 마찬가지겠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남동생과 아들은 달랐다.
티벤 후작은 퍼델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그 누구도 전하를 업신여기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전하의 의견에 감히 반대를 하는 자가 있다면 그게 누구라도 반드시 짓밟으세요.”
퍼델은 그 말을 몸소 실천하며 점점 안하무인으로 자랐다. 또한 그만큼 뛰어난 능력을 보여 주기도 했다.
어린 시절 검술과 학문에선 별다른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지만, 성인이 된 후 내는 정책과 투자마다 성공을 거둔 것이다.
성과를 중요시하게 생각하는 황제는 그런 큰아들을 자랑스럽게 여겼고, 티벤 후작과 점점 닮아 가는 아들을 황후는 이해할 수 없었다.
거기에 퍼델은 때때로 무척 퇴보적인 정책들을 주장하곤 했다. 여성의 사회 활동을 다시 막아야 한다, 혹은 평민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어서는 안 된다. 등등.
그리리카 선황이 애써 가꾸어 놓은 싹들을 전부 자르는 주장에 황후가 크게 화를 냈다.
“퍼델 앨러만 데커딜! 네가 아무리 뛰어나다고는 하나 그리리카 선황의 업적을 더럽힐 수는 없다!”
황제 역시 황후에게 동의하며 퍼델을 막아섰다.
하지만 퍼델의 눈에는 황제보다 황후의 제재가 더 크게 들어왔다. 아직까지 황제는 퍼델이 눈치를 봐야 하는 권력자였지만, 황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감히 자신을 막아서는 것은 모친이라고 해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렇게 결코 좋지 않았던 모자지간은 퍼델이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악화되어 갔다.
킬리언이 위의 이유를 세세하게 알고 있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티벤 후작이 퍼델에게 했던 것처럼 킬리언에게도 똑같이 속삭였기 때문이지.
하지만 저 속삭임도 오래가지 않았다.
퍼델이 22살, 킬리언이 10살이 되던 해의 일이었다.
약속도 없이 찾아온 퍼델이 킬리언에게 이런 말을 했다.
“킬리언, 네가 마갈라 제국으로 유학을 가야겠다.”
“유학이요?”
“그래. 마침 마갈라 제국 아카데미에서 신입생을 받으니, 당장 출발하면 되겠어. 네가 거기에 입학하면 우리 제국과 마갈라 제국 간의 평화가 더욱 돈독해질 거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제안이었다.
킬리언은 무심한 부모라도 황제와 황후 곁에 있고 싶었다.
“싫어요. 형님, 전.”
“킬리언!”
퍼델이 킬리언의 어깨를 꽈악 움켜쥐었다. 어린아이에게는 아플 정도의 악력이었다.
“네가 동맹의 상징으로 마갈라 제국으로 가면! 제국의 수도에서 우리 제국과의 교역을 허가하기로 했다. 그럼 내 입지가 더 확고해지는 거야!”
“하, 하지만…….”
“내가 훌륭한 황제가 될 수 있도록 넌 날 무조건 돕기로 했던 거. 잊은 건 아니겠지?”
킬리언이 그렇게 말하기는 했다.
언제나 의젓하고 자랑스러운 형이 황제가 되면, 그는 형의 오른팔이 되어 함께 멋진 나라를 만들자고.
마치 어머니와 아버지처럼.
“그래도.”
“그럼 지금부터 도와라! 설마 네 형에게 거짓을 맹세한 거냐?”
퍼델은 그렇게 아이를 몰아세웠다.
의지하던 형이 저런 반응이니 킬리언은 어찌할 줄 몰라 하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반응에 퍼델의 얼굴이 단번에 펴졌다.
“황족의 약속은 존귀한 것이다. 절대 무르면 안 돼.”
“네, 형님…….”
“너무 무서워 마라. 방학 때마다 제국에 돌아올 수 있고, 능력껏 조기 졸업도 할 수 있으니까.”
“그런가요?”
“그럼! 넌 똑똑한 아이니까 충분해. 믿는다, 킬리언!”
퍼델은 그렇게 웃으며 킬리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후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퍼델이 황제와 황후에게 어떻게 보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유학 준비는 차질 없이 이루어져 킬리언은 곧 여행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가 황궁을 떠나는 날.
마중 나온 황제는 킬리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킬리언, 자랑스러운 내 아들. 네가 먼저 마갈라 제국으로 가겠다고 말할 줄은 몰랐단다. 이런 큰 짐을 맡기게 되니, 걱정이고 또 대견하구나.”
황제의 말에 킬리언은 눈만 껌벅였다.
한 번도 자신이 먼저 마갈라 제국으로 가겠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킬리언은 지금이라도 되돌릴까 입을 달싹였다. 하지만 황제의 뒤에 서서 자신을 뚫어지게 주시하는 퍼델의 시선에 아무런 말도 꺼낼 수 없었다.
그 반응에 퍼델은 씨익 웃으며 킬리언에게 다가와 어깨를 툭툭 쳤다.
“힘들면 언제든 돌아와라, 킬리언.”
어쩐지 그 말이 거짓 같았다.
킬리언은 퍼델의 눈치를 보다 힘겹게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형님.”
마지막으로 황후의 차례였다.
황후는 자신과 똑같은 회색 눈을 가진 아이를 가만히 보더니, 몸을 숙여 꼬옥 품에 안았다.
황후가 이런 스킨십을 하는 건 거의 처음 있는 일이었다. 킬리언의 몸이 바짝 굳었다.
아이가 긴장한 걸 깨달았는지, 황후가 천천히 킬리언의 등을 토닥였다. 그 모습을 보니 멀리 떠나는 어린 아들을 안아 주는 어머니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황후는 킬리언을 품에 안고, 귓가에 이런 말을 속삭이고 있었다.
“킬리언, 퍼델은 안 되겠다. 네가 다음 황제가 되어야겠어.”
“예?”
“내 말 명심하거라. 항상 퍼델을 경계하고 의심해야 한다.”
킬리언이 뭐라 물어보기도 전에 황후는 자신의 품에서 아이를 떼어 놓았다.
그렇게 킬리언은 어머니가 남긴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마갈라 제국으로 떠났다.
그곳에서의 하루하루는 아이에게 지독하리만치 외로운 시간이었다.
마갈라 제국의 수도는 데커딜 제국에 대한 반감이 남아 있는 곳이었다. 교역을 허가했다고 해서 그 정서가 사라졌을 리 없었다.
결국 킬리언은 아카데미에서도, 마갈라 제국의 사교계에서도 마음 둘 곳 없이 고립된 생활을 이어 가야 했다.
와중에 손꼽아 기다렸던 방학 귀국은 퍼델이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연기했다. 그렇게 한 해가 흐르고, 두 해가 흐르고, 세 해가 흘렀을 때.
킬리언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형님이 날 이곳에 버린 거구나……!’
어째서?
떠나기 직전만 해도 형님은 내게 다정했는데?
황후가 떠나기 직전, 자신에게 한 이야기와 관련이 있나? 둘 사이에 모종의 사건이 있었고, 난 거기에 휘말린 걸까?
퍼델에게 이런 의문들을 담아 수없이 많은 편지를 보냈지만, 단 한 장의 답장도 받을 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차라리 황제와 황후에게 편지를 보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킬리언은 반 볼모로서 이곳에 입학했고, 그 대가로 마갈라 제국 수도와 데커딜 제국 간의 무역 계약이 체결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편지를 보냈다가 괜히 일을 망쳐 버리면 어떻게 하지?’
킬리언은 자신이 평범한 아이가 아닌 한 제국의 황자라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은 원치 않게 마갈라 제국으로 온 것이라고, 언제 돌아갈 수 있는 거냐고 편지조차 함부로 보낼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만약 편지를 보내도…… 달라지는 게 아무것도 없다면?’
그건 또 다른 의미로 너무 비참한 일이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자신이 무기력함을 느낄 게 뻔했다. 그럴 바에는 그냥 참고 지금을 견디는 것이 현명하다고, 아이는 스스로를 타일렀다.
그렇게 다시 세월이 흘렀다.
그래도 킬리언은 데커딜 제국의 흐름을 얼추 파악할 수 있었다. 모두 황후가 보내는 편지 덕분이었다.
「이번 여름부터 남부에서 유행했던 폐병의 치료제를 발견해 한시름 놓았다. 퍼델 그 아이가 그래도 제국에 보탬은 되니,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참고로 그 폐병과 내 호흡기 질환의 증상이 비슷해서 나도 치료제를 처방받기로 했단다. 이 병이 마갈라 제국까지 번질 일은 없겠다만, 부디 너도 건강 조심하렴.」
「이번 방학에는 널 이곳으로 부르고 싶은데, 아무래도 퍼델이 전부 손을 쓴 것 같다. 갈수록 널 향한 그 아이의 견제가 심해지고 있어. 네가 얼른 돌아와서 네 세력을 키워야 할 텐데……. 일단은 마갈라 제국에 피신 겸 남아 있어라. 다시 편지 보내마.」
그리고 황후가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는 이것이었다.
「폐하께서 결국 퍼델을 황태자로 임명하셨다. 그리고 점점 내 몸 상태가 나빠지고 있어. 텔레포트가 담긴 보석을 보내니,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내 침실로 오렴.」
텔레포트를 감당할 수 있는 보석은 하나밖에 없었다.
대륙에 세 개뿐인 마법 다이아몬드!
그중 하나를 가지고 있던 황후는 편지를 통해 그걸 킬리언에게 보냈다.
이 귀한 걸 아무런 보호 마법과 제재 장치 없이 보냈다는 건 그만큼 상황이 급박하다는 걸 의미했다. 아니면 무언가의 감시를 피해 허술한 척 보내졌다던가.
킬리언은 이걸 받은 그날 저녁, 바로 다이아를 사용했다.
텔레포트를 통해 도착한 황후의 침실은 킬리언이 떠나기 전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었다.
잠시 주변을 살피던 킬리언은 침대에 누워 있는 황후를 보고 한달음에 달려갔다.
“어머니.”
가까이에서 황후를 보는 순간, 킬리언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희미한 달빛을 통해 드러난 황후의 안색이 너무 창백했기 때문이다.
원래부터 몸이 약했다고 들었지만, 이렇게 기력이 없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덕분에 몇 년 만에 만났다는 감흥을 느낄 새도 없었다.
킬리언의 속삭임을 들었는지 황후가 힘겹게 감은 눈을 떴다. 두 눈에 킬리언을 담은 황후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왔구나.”
그러다 겨우 메마른 목소리를 낸 그녀는 손을 뻗어 킬리언의 뺨을 쓰다듬었다.
“정말 많이 컸어.”
“어머니,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아프신 거예요? 왜 그동안 아무런 말도 없으셨어요.”
“킬리언.”
황후는 울먹이는 킬리언의 팔을 붙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