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정말 빙의라면, 진작 나를 찾아와야 했다.
앨턴 공작가의 첫째가 아들이 아닌 딸이다? 이건 정말로 심각한 원작 훼손이니까.
‘하지만 그는 마갈라 제국으로 간 후, 10년 동안 돌아오지 않았지.’
이러니 그를 찝찝하게 여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자 골치가 아팠다. 난 점점 깊어지는 고민을 정리하고, 일단 지금 상황에 집중하기로 했다.
‘킬리언이 뭐든지 간에, 내가 모르는 곳에서 원작이 바뀌고 있어.’
일단 그와 대화를 이어 가며 정보를 수집해야 했다.
난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그나저나 ‘자연 친화력’이 뭐죠? 저로서는 처음 듣는 말인데.”
방금 아이닝이 언급한 말이었다. 이참에 내가 모르는 단어도 확실히 짚고 갈 요량으로 물으니, 킬리언이 순순히 입을 열었다.
“쉽게 말하자면 마력과 같은 겁니다. 정령을 소환하고 계약을 맺을 때 꼭 필요한 힘이죠.”
“정령을 소환할 때 꼭 필요하다고요?”
“예. 마력 없이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것처럼, 자연 친화력 없이 정령을 소환하지 못합니다. 참고로 이 자연 친화력은 데커딜 제국에는 없는 개념이에요.”
킬리언은 아이닝을 쓰다듬으며 설명을 이어 갔다.
“이는 정령에 대한 관심도가 높은 마갈라 제국에서도 거의 잊힌 단어입니다. 저도 아이닝과 계약에 성공하고 나서야 이런 개념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말에 아이닝이 킬리언의 품에서 쏙 얼굴을 빼고는 외쳤다.
“내가 가르쳐 줬어! 킬리언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더라!”
그 말에 난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렇다면 역사서에 나온 데커딜 제국 출신 정령사들은…….”
“자연 친화력은 배우는 것이 아닌 타고나는 재능입니다. 아마 그들도 확실한 단어만 모를 뿐, 정령을 소환할 때 비슷한 느낌을 받았을 겁니다. 그리고…….”
킬리언은 잠시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돌아가신 앨턴 공작 부인이 정령을 소환한 건 저도 알고 있었습니다. 앨턴 양은 그분의 딸이니, 당연히 자연 친화력을 느낄 수 있을 줄 알았어요. 친화력은 마력처럼 대개 혈연으로 이어지니까.”
“자연 친화력이 있다면 내가 정령인 걸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지!”
킬리언의 말에 보충 설명을 하듯 아이닝이 외쳤다.
그 말에 난 그들에게서 눈을 떼 스르륵 앞을 바라봤다.
“그 말은 즉……. 아이닝에게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저는…… 자연 친화력이 없다?”
내 말에 킬리언이 곤란한 듯 웃었다.
“아무래도…….”
“빵점 빵점!”
“쓰읍, 아이닝. 내가 너한테 괜한 단어를 알려 줬다.”
“킬리언은 아카데미 다닐 때 미술에서 빵점을 받았대요-!”
다시 부활한 아이닝의 놀림에 킬리언이 서둘러 주둥이를 잡으며 나를 살폈다.
둘이 그러거나 말거나, 난 가만히 걸으며 다시금 꼬이는 머릿속을 푸는 것에 여념이 없었다.
‘나한테 자연 친화력이란 게 없어?’
어머니는 눈의 정령을 소환했으니 자연 친화력이 있었다는 건데.
계약에 성공한 네시아는 두말할 것도 없고.
‘그런데 어머니의 친자식인 나는 그 친화력이 없단 말이야?’
정령 소환에 그런 능력이 필요하다는 건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저 완벽한 소환진과 수식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지.
‘왜……. 왜 원작에서는 이런 중요한 사항이 언급되지 않은 거야?!’
계약은 둘째치고, 만약 내가 정령조차 소환하지 못한다면?
그럼 앞으로 계획해 놓은 수많은 플랜들을 전면 수정해야 했다.
‘하지만 그러기엔 낭비가 너무 심해.’
시간도 그렇고, 자원도 그렇고.
난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해결책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말없이 복도를 걷는 사이, 우리는 응접실 문 앞에 도달했다.
“일단 앉아서 이야기하죠.”
킬리언은 그렇게 말하며 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자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응접실이 보였다.
킬리언은 아이닝을 바닥에 내려놓고 날 소파로 안내했다. 아이닝은 화려한 무늬가 수놓아진 러그 위를 뛰기도 하고 응접실 바닥 위를 구르기도 했다. 난 그 모습을 잠시 보다가 킬리언이 안내한 자리에 앉았다.
그동안 그는 응접실 한쪽에 마련된 이동 트레이에서 찻잎을 직접 우린 후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티포트를 들어 손수 차를 따라 주었다.
쪼르륵-.
찻물이 맑은 소리를 내며 잔에 차올랐다.
그와 함께 킬리언이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자연 친화력이 없는 자도 정령을 소환하는 방법이 딱 하나 있습니다.”
그 말에 난 생각에서 빠져나와 킬리언을 바라봤다.
그의 옆모습에는 여유로운 웃음이 그려져 있었다.
“……그렇군요.”
‘내가 그렇게까지 동요한 티를 냈나.’
나름 침착하려고 했는데, 큰 변수에 나도 모르게 흔들린 모양이었다.
난 반성하며 차분하게 찻잔을 들었다. 다행히 따뜻한 차를 한입 마시니 원래의 포커페이스가 돌아왔다.
킬리언은 자신의 잔에도 차를 따른 후 맞은편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이미 소환된 정령이 있으면 됩니다. 부족한 자연 친화력을 정령이 메꿔 주면 되거든요. 아이닝이 도와준다면 자연 친화력이 전혀 없는 사람도 정령을 소환할 수 있을 겁니다.”
“맞아! 내가 있으면 돼!”
자신이 언급되자 아이닝은 허공을 폴짝폴짝 뛰어 올라가며 즐거워했다.
달칵-.
난 마시던 차를 내려놓고 단정하게 웃어 보였다.
“킬리언 전하. 저와 친하게 지내고 싶다 하셨죠?”
“무척이요.”
“그 마음, 지금도 변하지 않으셨나요?”
“아마 계속 변치 않을 겁니다.”
준비된 것처럼 나오는 매끄러운 대답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께서 보여 주신 가장 큰 패가 기대를 충족시키다 못해 뛰어넘어 갔네요. 제가 가진 패를 하나 들켜 버렸을 만큼.”
내가 정령 소환에 관심이 많다는 걸 킬리언이 눈치챘고, 그에 대한 원활한 해결책 역시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은 킬리언에 대한 경계심을 조금 누그러트릴 때였다.
‘킬리언의 능력이 필요해.’
물론 원작에서 보증한 네시아라는 카드도 있었다. 그 아이 역시 킬리언처럼 정령사가 될 테니까.
하지만 눈의 정령을 활용하기에는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
‘네시아가 셰넌을 소환하는 것은 앞으로 한참 후의 일이야.’
지금 당장 정령을 소환할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네시아를 마냥 기다려 줄 수는 없었다.
그러니 지금 여기서 킬리언과의 관계를 확실히 하는 것이 나에게는 유리했다.
난 확실한 관계의 첫 단추를 위해 솔직한 내 생각을 말하기로 했다.
“다만 전하의 목표가 무엇인지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내 담백한 목소리에 킬리언이 귀를 기울이는 것이 느껴졌다.
“아무리 본인이 지닌 가장 큰 패를 보여 주었다고 해도 친해지고 싶다는 애매한 말은 믿을 수 없어요. 저와 가까워지고 싶다면 확실한 목적을 말씀해 주세요.”
난 그동안 킬리언에게 보이지 않았던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와 원활한 친분을 다지고 싶다는 내 나름의 표현이었다.
“신뢰할 수 있는 관계라는 건 결국, 합의된 조건 위에서 만들어지니까.”
‘그러니 먼저 네 조건을 제시해.’
기꺼이 거기에 응할 의향이 있었다.
내 말에 가볍게 웃고 있던 킬리언의 표정도 덩달아 진지해졌다. 물론 그 얼굴만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난 큰 걱정을 하지 않고, 그저 차를 한 입 더 마실 뿐이었다.
‘킬리언이 다시 애매한 웃음으로 상황을 넘어가려 한다면…… 새로운 방안을 모색해야지.’
그와의 관계를 호의적으로 유지하면 좋겠지만, 그렇다고 매달릴 필요는 없었다.
정령에 관한 일은 아직 시간이 남았고 황태자에 대한 것도 헤라 황녀라는 대안이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데, 혼자서 폴짝폴짝 뛰어놀던 아이닝이 슬쩍 킬리언에게 다가갔다.
“킬리언.”
아이닝은 킬리언이 앉아 있는 소파 위로 뛰어 올라와 그의 무릎에 얼굴을 베고 누웠다.
“괜찮아. 겁먹지 마.”
정령의 속삭임에 킬리언의 손끝이 살짝 움찔거렸다.
그는 잠시 나를 보다 시선을 내려 아이닝을 바라봤다. 곧 킬리언의 손이 다정하게 아이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역시 저 둘은 상당한 친밀감으로 묶여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 보면 네시아와 셰넌의 사이도 저렇게 돈독했지.
‘정령과 계약을 맺으면 다 저런 사이가 되는 건가?’
……난 싫은데.
귀찮은 혹이 달리는 건 정말 사양이거든.
그때 킬리언이 다짐을 끝냈는지 고개를 들고 날 바라봤다.
“그래요, 앨턴 양께 말씀드리겠습니다.”
그의 눈에는 이제껏 실리지 않았던 결연함이 담겨 있었다.
“제가 당신께 접근한 진짜 이유를.”
킬리언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
데커딜 제국의 1황자 퍼델 앨러만 데커딜, 그리고 그 동생 킬리언 앨러만 데커딜.
두 사람은 12살 차이였는데, 이 정도는 데커딜 제국에서 흔한 편이었다. 제국의 귀족들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형제 구도를 선호했으니까.
보통 첫째가 딸이거나 혹은 후계자가 잘못되었을 때를 대비해 둘째까지 낳는 것이 일반적인데, 나이가 비슷해 후계 다툼이 심화하면 곤란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퍼델과 킬리언, 이 형제는 사이가 썩 괜찮은 편이었다.
일단, 두 사람은 자식보다 제국을 더 사랑해야 하는 황제와 황후의 아들이었다.
덕분에 무심한 부모 밑에서 자랐던 퍼델은 뒤늦게 생긴 어린 동생을 퍽 귀여워했고, 킬리언 역시 그런 형에게 많이 의지했다.
이런 킬리언을 제일 불안하게 만든 건 어머니와 형의 갈등이었다.
퍼델은 사춘기로 들어가면서부터 황후와 사이가 멀어졌다. 여기에는 황후의 아버지인 티벤 후작의 영향이 컸다.
장교 출신에 상당히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인 티벤 후작은 장녀인 황후를 억누르며 키웠다. 황후는 반발심을 꾹 참다 황제와 결혼하자마자 후작가에서 벗어나 자신의 힘을 키웠고.
티벤 후작은 이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자신의 첫 손주는 매우 아꼈다. 그래서 황후가 본인 일에 집중하느라 바쁜 틈을 타 퍼델을 자주 찾았다.
티벤 후작은 아이를 차기 황제라 부르며 존댓말을 썼고, 어리광은 무조건 들어주었다. 또한 아이 앞에서 가부장적인 언행과 폭력적인 모습을 숨기지 않았다.
애초부터 강압적이고 호전적인 퍼델이었다. 그런 아이가 사람이 맞는 모습을 보며 자랐으니, 티벤 후작의 태도를 답습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황후는 이런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