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킬리언은 입가에 단정한 호선을 그리며 말했다.
“그럼 제 궁의 응접실로 안내하겠습니다.”
“좋습니다.”
난 킬리언의 안내에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궁은 중앙 궁과 조금 떨어져 있었다. 때문에 우리는 킬리언의 마차를 타고 그의 궁으로 향했다.
서로를 나란히 마주 보는 자리에서 킬리언이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물어 왔다.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그럼요, 나쁘지 않은 겨울을 보냈죠.”
“다행이군요. 전 앨턴 양이 해 주었던 말을 되새기며 보냈답니다.”
그 말에 난 고개를 기울이며 킬리언을 바라봤다.
“제가 했던 말이요?”
“저희 같은 사람들이 친해지려면 패를 보여야 한다는 이야기. 인상 깊었거든요.”
그 말에 난 킬리언과 처음 만났던 눈 내리던 겨울 연회의 밤을 떠올렸다.
-저희 같은 사람들은 아무런 속셈도 없이 사람과 친해지지 않죠.
-다음에 만날 때엔 본인의 패를 어느 정도 드러낼 각오를 하는 게 좋을 거예요.
‘확실히. 킬리언에게 그렇게 말했었지.’
어색한 유혹을 하며 내게 다가오려는 꼴이 재미있어서.
난 그때를 생각하며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그래서, 각오는 다 마치셨나요?”
“물론.”
킬리언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회의를 통해 어쭙잖게 패를 보였다가는 오히려 당하겠다는 판단까지 마쳤습니다.”
“현명한 생각이시군요.”
“전부 앨턴 양이 보여 준 기지 덕분이죠.”
그렇게 말하는 사이 우리가 탄 마차는 킬리언의 궁에 도착했다.
마차가 봄 단장을 시작하는 정원을 지나쳐 입구로 향하니,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이 문을 열어 주었다.
킬리언이 먼저 내린 다음,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난 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또한 방금 새로운 각오를 했습니다.”
그는 날 입구로 안내하며 그렇게 속삭였다.
나 역시 입구의 계단을 오르며 미소를 유지했다.
“새로운 각오라…….”
“당신께 제가 가진 패 중 가장 큰 것을 보여 줄 각오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그는 높은 직사각형 모양의 쌍여닫이형 문을 직접 열고 날 안으로 이끌었다.
“전 그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당신과 가까워지고 싶으니까.”
그 말과 동시에 입구의 문이 스르륵 닫혔다.
흑백의 아가일 타일 바닥이 깔린 로비는 아무도 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난 가만히 주변의 기척을 살폈다.
‘……사람이 없어.’
본래 시종들은 황궁 어느 곳에든 있어야 한다. 그런데 킬리언의 궁에는 아까 마차 문을 열어 주었던 시종들뿐, 실내에 들어서고 나서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난 한쪽 눈썹을 까딱이며 그를 바라봤다.
“이렇게…… 적막한 초대는 처음이로군요.”
‘지금 이게 무슨 수작이지?’
내 시선의 의미를 알아챘는지, 킬리언이 다급히 내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실례를 용서하세요, 앨턴 양. 앞으로 당신께 보일 제 패는 그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사람을 내보낸 것입니다.”
그 말에는 킬리언의 진심이 담겨 있었다.
난 기세를 조금 누그리며 로비를 살폈다.
뚜벅뚜벅-.
장식용 조각상도 없이 텅 빈 로비에는 내 걸음 소리만 크게 울릴 뿐이었다.
“도대체 어떤 패를 보여 주려고 제 기대를 이렇게 끌어 올리실까.”
내 말에 킬리언이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바로 이것이죠.”
그렇게 말하는 킬리언의 발 아래로 붉은 선들이 떠올랐다. 그 선들은 쭉 그어지며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난 걸음을 멈추고 그 광경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뭐지?’
각 방향으로 일사불란하게 그려지던 선들은 곧 하나의 점에서 맞닿았다.
선들이 완성한 건 커다란 마름모였다. 그 안에는 알 수 없는 모형들이 이리저리 얽혀 있었다.
마법진도 아닌 낯선 모양.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을 띄고 있었다.
‘저건…….’
그 순간, 문양을 구성하는 선들이 불타기 시작했다.
문양을 보고 있던 난 휙 고개를 들어 그 위에 서 있는 킬리언을 살펴봤다. 그는 뜨겁지도 않은 듯 그 자리에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이게 도대체…….”
내 말에 킬리언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만 놀고 이제 나와.”
누가 있는 건가?
그 의문과 함께 타오르고 있던 불들이 한곳으로 회오리치며 커다란 불기둥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들려오는 명쾌한 목소리.
“야호-!”
그와 동시에 기둥이 사라지며 한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걸 보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설마…….”
“나도 알아! 내가 귀엽다는 거!”
그 존재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폴짝폴짝 뛰어다니더니 킬리언의 품에 쏙 안겼다.
“킬리언은 세상에서 내가 제일 귀엽댔어! 나도 다 알아!”
“아이닝.”
킬리언은 품 안의 존재를 쓰다듬으며 나를 보곤 웃었다.
“많이 놀라셨죠? 소개하겠습니다. 제가 가진 가장 큰 패.”
“안녕!”
“불의 정령, 아이닝입니다.”
‘저게 정령이라고?’
난 킬리언의 품에 안긴 정령을 가만히 살펴봤다.
베이지색 털로 뒤덮인 작은 몸체, 얼굴보다 큰 삼각형 모양의 귀, 거기에 가느다란 주둥이와 긴 꼬리까지.
그걸 보며 난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가 봐도 사막여우인데?’
소설에서 묘사되었던 정령은 눈의 정령 섀넌밖에 없었다.
심지어 섀넌은 사람의 모습이었기 때문에 난 저 사막여우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이게 정말 정령이라고요?”
내 물음에 킬리언이 후후 웃었다.
“아마 처음 보는 생김새일 겁니다. 아이닝은 마갈라 제국에서도 극동 지방에 있는 ‘사막’이라는 곳에서 살고 있으니까요.”
“맞아! 거기가 우리 집이야!”
“아하…….”
‘생각해 보니 데커딜 제국에는 사막이 없지.’
그러니 평범한 제국인에게 사막은 무척 생경한 단어임이 분명했다. 사막여우의 생김새 역시 낯설게 느껴질 것이고.
‘정작 난 정령의 모습이 내 예상과 전혀 달라서 놀란 거였지만.’
킬리언은 내가 정령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이유가 낯선 생김새 탓이라고 오해한 모양이었다. 그게 더 자연스러운 이유이기도 해서, 굳이 그 오해를 정정하지는 않았다.
난 킬리언을 바라보며 차분히 입을 열었다.
“확실히 이 존재가….”
“아이닝!”
내 말을 끊고 불의 정령, 아이닝이 외쳤다.
“내 이름! 아이닝!”
아이닝은 어린아이처럼 맑은 목소리로 말하며 큰 귀를 쫑긋거렸다. 킬리언은 그런 아이닝을 보며 상냥한 손길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난 그 광경을 유심히 관찰하며 마저 입을 열었다.
“그래, 아이닝. 앞선 말에 따르면, 전하께서는 400년 만에 등장한 ‘정령사’라는 건데…….”
대륙이 전쟁터에서 흐르는 피로 절여졌던 200년, 그 후 정령의 중재로 강제 평화 협약이 맺어진 기간이 200년.
도합 40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정령들은 인간과 계약을 맺지 않았다. 간혹 소환에는 응했지만, 끝끝내 계약으로 발전하지는 못한 것이다.
‘덕분에 네시아는 400년 동안 끊겨 있던 정령사의 맥을 부활시켰다며 대대적인 찬양을 받았지.’
난 그 정보를 떠올리며 물었다.
“왜 그걸 공표하지 않으셨죠?”
만약 킬리언이 정령사라는 걸 밝혔다면, 네시아가 누렸던 그 모든 영광을 그가 차지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굳이 숨겼다는 건.
“저 아이닝은 진짜 정령이 맞나요?”
내 의심에 킬리언의 품에 안겼던 아이닝이 몸을 들썩이며 꺄하항 웃었다.
“나 정령 맞는데! 불의 정령인데! 아무것도 모른대-요!”
그 행동에 킬리언이 아이닝의 등을 쓰다듬으며 다급히 속삭였다.
“쉿, 아이닝. 예의가 아니야.”
“난 인간의 예의 몰라! 정령인걸!”
킬리언의 만류에 아이닝은 더욱 개구진 목소리로 웃었다. 아이닝의 까만 눈동자에는 어느새 장난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내가 정령인 것도 못 느낀대요! 자연 친화력이 빵점이래요!”
킬리언은 당황하며 아이닝의 주둥이를 가볍게 잡았다. 아이닝은 제지에 굴하지 않고 꺄하항 해맑게 웃을 뿐이었다.
난 그걸 잠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제가 사냥을 잘한다고 말씀드렸나요?”
내 말에 아이닝을 만류하던 킬리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바라봤다.
“예?”
“딱 그만큼, 전 버릇 없는 짐승도 잘 길들인답니다.”
난 킬리언을, 정확히는 그 품에 안긴 아이닝을 주시하며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어때요, 저에게 그걸 맡기시는 건. 그럼 저 입을 함부로 놀리지 못하도록 철저히 예의를 가르치도록 하죠.”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이닝은 큰 귀를 축 늘어트리더니 킬리언의 품에 쏙 숨어 버렸다.
“무서워! 무서워!”
킬리언 역시 움찔거리며 사막여우를 보호하듯 껴안았다. 그러더니 나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하, 하하. 아이닝이 워낙 장난을 좋아해서 그렇지, 앨턴 양을 무시하는 게 절대 아닙니다.”
킬리언은 그렇게 말하며 분위기를 환기할 겸 나를 로비 안쪽으로 안내했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일단 응접실로 들어가죠. 제가 제일 좋아하는 차를 대접하고 싶습니다.”
그 말에 난 시선을 풀고 가지런히 입꼬리를 올렸다.
“……시종도 없는데, 전하께서 직접 우리실 건가요?”
내 웃음에 킬리언은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럼요. 마갈라 제국에서는 언제나 직접 차를 우렸는걸요.”
킬리언은 미소를 되찾으며 먼저 걸음을 옮겼다.
난 그 옆을 걸으며 힐끔 아이닝을 바라봤다. 고개를 빼꼼 내밀고 날 보던 아이닝은 다시 킬리언의 품으로 얼굴을 숨겼다.
‘겁먹기는.’
짓궂은 걸로 치면 나도 누구에게 뒤지지 않는 편이라 아주 가볍게 둘을 놀렸을 뿐이다.
내 장난에 아이닝은 물론, 킬리언까지 참 재미있는 반응을 보여 주었다.
‘감정을 잘 숨기는 킬리언 황자가 아이닝은 눈에 띄게 감싼단 말이야.’
둘의 유대감이 생각보다 깊은 모양이지?
그나저나.
‘킬리언이 정령사라고?’
난 침착하게 새로운 사실을 머릿속에 업데이트했다.
분명 원작에서 킬리언은 정령사가 아니었다. 또한, 이건 아무리 내가 원작을 비틀었다고 해도 나올 수 없는 결과였다.
‘킬리언이 마갈라 제국으로 떠난 것도 그래.’
덕분에 처음에는 그도 나처럼 빙의한 게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이 가설은 영 명쾌하질 못했다.
‘킬리언은 왜 마갈라 제국으로 간 걸까?’
우선 그가 빙의했다고 치고, 원작과 다르게 마갈라 제국으로 갔다면 무언가 목표가 있었겠지.
그러나 감시자들의 조사에 따르면 킬리언은 이런저런 추문이 있는 것을 제외하곤 성실히 아카데미 생활을 이어 갔을 뿐 특별히 이룬 것이 없었다.
‘물론 아이닝과 계약을 맺기 위해 마갈라 제국으로 갔을 수도 있어.’
정령과의 계약은 무척 매력적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걸 공표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