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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장녀가 육아물에 빙의하면-52화 (53/197)

52.

“염려 감사합니다, 전하. 다행히 이것들의 주인은 이미 정해져 있답니다.”

그렇게 말하며 루비 하나를 집어 들었다.

“우선 티벤 후작께 하나.”

내 말에 가만히 상황을 구경하던 후작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말입니까?”

“예.”

내 말이 끝나자마자 뒷자리에 앉아 있던 스라코 자작이 총알처럼 내게 날아왔다.

“제가 직접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벨라디 님!”

스라코 자작은 그렇게 말하며 비단 장갑을 손에 끼었다. 폼을 보니 미리 준비한 모양이었다.

그 행동에 나머지 북부 가신들이 아깝다는 듯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한발 늦었군.”

“에잉, 내가 나섰어야 했는데…….”

회의실은 고급 정보가 오가는 곳이기 때문에 개인 하인과 하녀는 물론, 황실의 시종도 출입할 수 없었다. 따라서 가주에게 잘 보이고 싶은 가신들은 곧잘 가주의 하인 노릇을 자처하고는 했다.

‘그런 이들은 저렇게 비단 장갑을 챙기고 다니지.’

지금의 스라코 자작처럼 말이다.

난 자작의 눈치를 칭찬하며 루비를 작은 주머니에 넣어 그의 손에 올려놓았다.

“조심히 다루도록.”

“예, 벨라디 님!”

스라코 자작은 손바닥에 주머니를 올려 둔 채 공손히 티벤 후작의 앞으로 갔다.

“여기 있습니다, 후작님.”

후작은 얼떨결에 주머니를 받아 들었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입구를 열어 루비를 확인했다. 큼지막한 루비는 마력이 담겨 있어 다른 보석보다 영롱했다.

후작이 이를 보며 조용히 감탄했다.

“정말 아름다운 보석이군요.”

“그러니 후작께 맡긴 겁니다.”

“예?”

난 티벤 후작에게 싱긋 웃어 주었다.

“전 항상 티벤 후작가의 미적 감각을 높이 샀답니다.”

티벤 후작가는 대대로 여러 보석 광산들을 보유하고 있었고, 유명한 보석 장인들과 관계가 깊은 가문이었다. 그러니 루비를 가공하고 장신구로 만들려면 그들과 연을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

내 말의 의미를 파악했는지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칭찬 감사합니다. 때마침 저 역시 북부의 새 사업에 관심이 많습니다.”

“의견이 일치해 기쁘군요. 제게 따로 편지를 보내 주시면 일정을 조율하도록 하겠습니다.”

티벤 후작과 난 서로를 보며 비즈니스 미소를 지었다.

그 후 두 번째 루비의 차례였다.

“다음은.”

그 말에 스라코 자작이 이번에도 번개같이 달려와 대기했다.

난 그 손에 주머니를 올려 주며 말했다.

“프레도 공작님.”

주머니를 든 자작은 공손하게 프레도 공작 앞으로 다가갔다.

공작은 주머니를 받으며 흥미로운 얼굴로 날 바라봤다.

“오호라, 나한테도 뭐 원하는 것이 있는 모양이지?”

“모스틴의 아버지이시니 당연히 제가 챙겨야지요.”

내 말에 프레도 공작이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난 그런 공작을 보며 조그맣게 이런 말을 덧붙였다.

“무엇보다 제가 조만간 서부에 볼일이 있어서…… 공작님께 미리 마음의 빚을 씌워 드리고 싶네요.”

내 속삭임에 공작이 잠시 눈을 껌벅이다, 피식피식 입꼬리를 올리기 시작했다.

“허허허, 이것 참…….”

그 너털웃음은 이내 기분 좋고 호탕한 소리로 바뀌었다.

“그 당당한 태도가 마음에 드는구나! 좋다, 이 루비는 불편하게 받아들이마!”

“곧 편지 보내 드릴게요.”

“언제든지 보내렴. 네 편지를 일 순위로 기다릴 테니!”

프레도 공작에게까지 루비를 주자, 이제 남은 건 하나밖에 없었다.

이쯤 되니 회의장에 있는 이들 모두 눈을 반짝이며 날 바라봤다. 이렇게 대놓고 루비를 선물하니, 다들 눈치챘을 것이다.

‘여기서 루비를 받는 이는 직속으로 광산의 투자자가 될 수 있다는 걸.’

황태자와 케스퍼만 친분을 과시할 줄 아나? 나도 그런 걸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거든.

사실 루비를 이렇게 전달할 계획은 아니었다. 회의가 끝난 후, 이들과 조용히 접촉해 루비를 선물할 생각이었으니까.

그렇지만 황태자가 이렇게 몸소 타이밍을 만들어 줬으니.

‘내가 또 활용해 줘야겠지.’

난 천천히 남은 루비를 주머니에 담았다.

그러자 회의장에 있는 모든 귀족이 내 손에 시선을 고정했다.

심지어 황태자는 아주 흡족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자신에게 저 루비를 줄 것이라고 확신하는 듯 말이다.

그 뻔뻔한 시선에 난 조용히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넘볼 걸 넘봐야지.’

루비 광산에 투자도 못 하는 쭉정이에게 이 귀한 걸 넘길 리가.

난 황태자에게 눈을 떼 루비 주머니를 들었다.

“마지막으로.”

내 목소리에 모든 이들이 귀를 기울였다.

난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킬리언 황자님께.”

내 말에 회의장에 잠시 정적이 찾아왔다. 곧 모두의 얼굴이 어리둥절하게 변했다.

이는 리켄 남작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그가 안경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벨라디 님. 킬리언 전하와 따로 친분이라도 있으십니까?”

그 말에 난 명료하게 대답했다.

“아니.”

그러자 다들 더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날 바라봤다.

특히 황태자의 표정이 압권이었다.

아까의 여유는 다 잃어버린 채 흉포하게 일그러진 황태자의 얼굴을 보며 난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역시…….’

황태자는 회의장에 등장했을 때부터 킬리언과 나름 우애 좋은 형제인 척 행동했다.

하지만 그의 말투나 태도에는 은근한 무시가 깔려 있었다.

‘예를 들면.’

이 회의는 킬리언이 참석한 공식적인 첫 자리였지만, 발언권 한 번 주지 않았다는 점.

거기에 그가 마갈라 제국에서 ‘망나니’였다며 귀족들 앞에서 대놓고 지적한 점.

무엇보다도 황태자가 정말로 킬리언과 사이가 좋았다면.

‘지금 저런 표정을 짓지 않았겠지.’

그렇다고 킬리언 쪽이 깨끗하냐면 그것 역시 아니었다.

킬리언도 의도적으로 경박하게 앉거나, 부러 가벼운 말투를 사용하며 황태자의 취급에 어울려 주고 있으니까.

그 연기가 자연스러웠지만, 내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저 둘 사이에도 뭔가 있나 보군.’

마침 잘된 일이다.

이 재미있는 소스는 또 어떤 방식으로 이용해야 제일 효율적일까?

난 황태자와 킬리언을 은밀히 관찰하며 마저 입을 열었다.

“킬리언 황자님께 이 루비를 드리는 이유는 단 하나.”

다들 다음 말의 귀추를 주목했다.

난 그 호기심에 부응해 주기 위해 입꼬리를 가지런히 올렸다.

“이 루비를 통해 저희 북부가 마갈라 제국 진출을 꾀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내 말에 리켄 남작을 비롯한 북부의 가신들이 탄식 소리를 내며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마갈라 제국은 특히 루비를 좋아하니, 마법 루비에 큰 관심을 가질 겁니다.”

“마침 킬리언 전하께서는 오래도록 유학 생활을 하셨지요! 확실히 도움을 받을 수 있겠어요.”

“맞습니다. 전하만큼 마갈라 제국을 잘 아는 이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허허허, 여러 조언을 얻을 수 있겠군요!”

누군가의 말이 끝나자마자 큰 소리가 들렸다.

콰앙-!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니, 황태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이 앉았던 의자를 발로 차는 소리였다. 귀한 보석들로 장식된 사치스러운 의자가 바닥에 형편없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 갑작스러운 행동에 모두들 잠시 조용해졌다.

황태자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재미없군.”

그는 자신의 감정을 짓씹으며 나를 살벌하게 노려봤다. 그러더니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회의장을 벗어났다.

그 무거운 발소리에 케스퍼 역시 혀를 차며 황태자를 따라나섰다.

‘저거야말로 진짜 삐친 거지.’

감흥 없는 눈으로 그걸 보던 난 킬리언 황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모두가 황태자를 주목하고 있을 때, 그는 계속 나만을 바라보고 있던 듯 바로 시선이 마주쳤다.

어느새 단정한 자세로 돌아와 있는 킬리언을 보며 난 당당하게 물었다.

“킬리언 전하와는 새로 친분도 다질 겸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괜찮으실까요?”

내가 자연스럽게 둘이서만 있을 명분을 만들었으니, 넌 그냥 따라오기만 해.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살짝 벌어졌던 킬리언의 입술이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물론입니다, 앨턴 양.”

그렇게 말한 킬리언은 환한 웃음을 만들어 냈다.

그건 그가 시종일관 짓고 있던 속없는 웃음이 아닌, 순수한 즐거움만이 가득한 미소였다.

***

킬리언과의 대화를 위해 북부의 가신들을 먼저 보냈다.

리켄 남작이 회의실을 떠나기 전 내게 속삭였다.

“너무하십니다, 벨라디 님. 어떻게 저한테까지 루비를 숨기실 수 있습니까?”

“흥미진진하지 않았어?”

“저 같은 늙은이는 흥미만 찾다가는 심장 떨려 쓰러집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미리미리 상의해 주세요.”

리켄 남작의 작은 투덜거림에 난 어깨를 으쓱였다.

내 행동에 남작은 고개를 도리도리 젓더니 한숨을 쉬었다.

“루비 하나쯤은 예의상 황태자 전하께 드려도 괜찮았을 텐데. 대놓고 망신을 주셨던 것도 다 대책이 있으셨던 거죠?”

리켄 남작이 저렇게 말할 만큼 루비를 노리는 황태자의 태도는 노골적이었다. 난 가주들이 있는 자리에서 보란 듯이 그걸 무시한 거고.

이제 북부는 뒤끝 있는 황태자에게 미운털 박혔다고 봐도 무방했다. 물론 난 그딴 걸 신경 쓸 범인이 아니고 말이다.

“아니, 그건 진짜 재밌어서 그런 건데.”

“……어휴.”

내 대답에 리켄 남작이 조용히 안경을 치켜올렸다.

“용감하신 것도, 조금 무모하신 것도 공작님과 똑같습니다.”

“다행이지? 그걸 책임질 능력은 아버지 이상이라서.”

조금 짓궂은 목소리로 답하니, 리켄 남작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웃었다. 그 너털웃음에 나 역시 싱긋 미소 지었다.

내 미소를 보며 남작이 속삭였다.

“조심하십시오. 킬리언 황자님 역시 소문이 썩 좋지 않습니다.”

“나도 알아, 마갈라 제국에서 여성 편력이 심했다고.”

“예, 맞습니다.”

리켄 남작은 우리와 조금 떨어져 있는 킬리언 황자를 보며 중얼거렸다.

“마갈라 제국으로 떠나시기 전에는 총명하기로 유명하신 분이었는데, 어쩌다 저렇게 되셨는지.”

“걱정하지 마, 리켄 남작. 내 성격 알잖아.”

“그렇긴 합니다만……. 그래요. 벨라디 님께서 알아서 잘하시겠죠.”

그렇게 말한 남작은 내게 가볍게 인사하고 회의실을 나갔다.

그 후에야 킬리언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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