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K-장녀가 육아물에 빙의하면-51화 (52/197)

51.

“하하하하하!”

그 맑은 웃음의 주인공은 회의 내내 잠자코 있었던 킬리언이었다.

킬리언은 한참을 웃다가 눈에 고인 눈물을 닦으며 겨우 진정했다. 모두의 이목을 받자, 그는 순진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아, 죄송합니다. 웃을 생각은 없었는데, 상황이 재미있게 흘러가서.”

그렇게 말한 킬리언은 의자에 편하게 앉으며 미소 지었다.

“회의 마저 진행하세요.”

“실없구나, 킬리언.”

황태자는 혀를 쯧쯧 차며 킬리언을 바라봤다.

“그리고 똑바로 앉아라. 아무리 마갈라 제국에서 망나니처럼 살았다지만 이런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품위를 지켜야지.”

“이런, 이 자세가 습관이 되어서 그만.”

킬리언은 꼬았던 다리를 가지런히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반대 다리를 휙 꼬았다. 그러며 능청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흐음. 아무래도 이 자세가 편해서 안 되겠네요. 형님과 여러분들이 이해해 주세요.”

황자라기에는 너무 격 없는 모습에 회의장의 귀족들이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황태자 역시 심기가 편해 보이진 않았으나 더 이상 킬리언을 지적하지 않았다.

“마음대로 하거라.”

그렇게 말한 그가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 북부의 임시 가주.”

“예, 전하.”

“마법 루비 광산을 발견한 것 진심으로 축하하네. 대대적으로 투자자를 모집한다니 여러모로 바빠지겠어.”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내 말에 황태자가 씨익 웃었다.

“어디, 나도 심사를 받아야 하나?”

그 말에 발끈한 건 케스퍼 쪽이었다.

“전하! 저희 남부에 투자하시기로 한 것 잊으셨습니까!”

케스퍼의 말에 황태자는 대놓고 혀를 차며 손을 휙휙 휘저었다.

“아아, 알고 있지. 농이었네, 농.”

그렇게 말한 황태자가 욕심 가득한 눈으로 입맛을 다셨다.

“황실법은 이게 참 문제야. 내가 내 돈으로 투자를 하겠다는데 왜 하나로 제한을 두고 그러는지. 안 그런가?”

황태자는 회의장 안에 있는 귀족들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의 물음에 다른 귀족들도 하하하 웃으며 동의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황실법은 옛날 것이 많지요.”

귀족들의 말에 황태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심지어 황제는 아예 투자조차 할 수 없다니, 참 불공평한 일이 아닐 수 없네.”

그렇게 말한 황태자는 대놓고 본인의 야심을 드러냈다.

“내가 황제가 되기 전에 반드시 저 법을 수정하겠다. 폐하를 설득할 때 그대들도 힘을 보태게.”

오만한 황태자가 한마디 한마디 뱉을수록 주변 귀족들, 특히 남부 가신들이 적극적인 추임새를 보내며 반응했다.

그 끈끈한 단합을 구경하며 난 속으로 혀를 찼다.

‘끼리끼리 노는군.’

황족에게 ‘투자’는 단순한 돈벌이 수단이 아니다.

그들은 성인이 되면 한 분기에 한 번씩 단 하나의 사업에 투자할 수 있었다. 이는 일종의 시험대로, 황족 개개인의 능력과 안목이 얼마나 뛰어난지 황제는 물론 귀족들에게도 선보이는 역할을 했다.

참고로 황태자는 황자 시절부터 지금까지 계속 아글라 공작가에만 투자해 왔기에, 남부와 황태자의 결속력은 상당히 두터웠다.

‘심지어 황태자가 투자한 남부의 사업은 전부 큰 성공을 거두었지.’

덕분에 황태자와 케스퍼의 세력은 점점 커졌고, 그 세력들이 서로 단합해 고착화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 잘나가는 황태자지만, 그가 황제가 되면 세력과 주머니를 두둑하게 채워 주던 투자는 물 건너가고 만다.

황제는 모든 제국민들에게 공명정대해야 하는 법. 그런 통치자가 한 세력만 편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황태자가 언급한 ‘황실법’.’

이 법은 황제보다도 위에 있는 소수의 규율들을 의미하며, 위의 상황처럼 통치자의 오만함으로 나라가 흔들리는 것을 막기 위해 존재했다.

‘덕분에 데커딜 제국은 비대한 땅덩어리에 비해 중앙 통솔이 잘 유지되고, 강대국으로 오래도록 존속할 수 있었어.’

지금 황태자는 그걸 자기 입맛대로 뜯어고치겠다고 떠드는 것이다.

최고의 군주로 추앙받는 그리리카 선황도 함부로 건들지 않은 법을, 오로지 본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능력은 어느 정도 있으나, 탐욕스럽고 오만한 자.’

그래서 절대 신뢰하면 안 되는 놈.

이제까지 황태자에 대한 나의 인식은 그랬다.

물론, 저 황실법이 완벽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저 법이 한정하는 건 당연히 황자들뿐이었으니까.’

황후와 황녀, 황태자비는 황실법으로 제한받지 않았다. 대신 그보다 훨씬 더 고리타분한 불문율에 묶여 살아야 했지.

‘여자는 무조건 가정에 헌신해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인식에 말이야.’

다행히 그리리카 선황 덕에 그 불문율은 사라지는 추세였고, 황녀도 황실법의 적용 대상에 포함되었다.

원작에 따르면 헤라 황녀는 변경된 법의 첫 수혜자로서 투자를 이용해 자신의 세력을 갖추려 했다.

하지만 일은 잘 풀리지 않는다. 당연하게도 그 원인은 황태자의 반대와 방해였고.

‘여자라는 이유로 황녀가 작위를 받는 것도 반대해, 투자를 하는 것도 반대해.’

사고방식이 가부장제에 물들다 못해 아주 찌들었어.

난 못마땅한 눈빛을 숨기며 호탕하게 웃는 황태자를 바라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황태자는 내 앞길을 가로막을 장애물이었다.

현 황제를 설득해 내가 가문을 차지하려고 해도…….

‘황태자가 훼방 놓을 확률이 상당하단 말이야.’

이 생각을 뒷받침할 사례가 바로 황실법과 관련된 일화였다.

‘황후가 황실법을 다시 고치려 했을 때, 황태자가 강하게 막았다지.’

그리리카 선황은 황실법에 ‘황녀’를 포함했다. 하지만 야망이 컸던 첫 번째 황후는 거기에 만족할 수 없었고, 황실법에 ‘황후’까지 포함해 자신의 활동 범위를 넓히려 했다.

이를 강력하게 반대했던 것이 당시 1황자였던 황태자였다.

-황실법 적용 대상에 황녀를 포함한 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이런 때 다시 법을 변경한다면 혼란스러움만 가중될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이유였다.

황제는 그 말의 타당성을 인정하고 황태자의 손을 들어 주었다.

그 후 황후가 병으로 죽고, 황제는 헤라 황녀의 친모인 지금의 황후와 재혼했다.

그녀는 정치나 권력에 별 관심이 없고 현실에 순응하는 사람이었다. 결국 황실법의 적용 대상은 황녀로 고정되었다.

‘황태자는 지 욕심을 위해서 자기 동생은 물론이고 어머니까지 억누르려 드는 인간이야.’

그런 놈이 내 앞길을 가만둘 리가 없었다.

난 황태자에게서 시선을 돌려 뒤에 있는 킬리언을 바라봤다. 의자에 늘어져 있던 킬리언은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자세를 바로 하더니 싱긋 웃었다.

난 킬리언을 보며 눈가를 좁혔다.

‘차라리…….’

그때 킬리언이 오른손 검지로 자신의 뺨을 세 번 콕콕콕 찔렀다.

생각에 잠겨 있던 난 그걸 보곤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저걸 알아?’

저 신호는 사교계에서 귀부인들과 영애들이 사용하는 사인이었다.

오른손 검지로 뺨을 세 번 찌른다. 이는 상대에게 ‘할 말이 있어요.’라는 뜻이었다.

‘의외로군.’

대부분의 귀족 남자는 사교계의 사인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에게 이 사인은 사용할 이유도,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저 신호의 의미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저러나.’

때마침 날이 따뜻해지니, 겨울이 지나면 한번 만나기로 한 약속을 지킬 때가 다가왔다.

난 왼쪽 머리를 귀 뒤로 넘긴 후 귀걸이를 쓰다듬었다. 이 역시 사교계에서 쓰이는 사인으로, ‘기다려요.’라는 뜻이었다.

이를 확인한 킬리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가주 회의가 끝나기만 하면 되는데…….’

난 다시 황태자와 케스퍼를 바라봤다.

북부의 보고는 이미 끝난 지 오래. 이제 황태자가 회의만 파하면 되는데 그의 말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케스퍼 역시 그런 황태자를 부추기듯 장단을 맞춰 주며 황태자와 자신의 친분을 강조했다.

난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마음에 안 들어, 저 콤비.’

오랜 소꿉친구인 황태자와 케스퍼.

어떻게 딱 찝찝하다고 여기는 둘이 저리 친한 걸까.

난 얼른 이 시답잖은 수다가 끝나길 간절히 바라며 기다렸다.

***

황태자의 수다는 정확히 30분이나 더 이어진 후에야 끝이 났다.

“이제 슬슬 자리를 정리할 때군. 오늘 회의는 여기서 파하겠다.”

“수고하셨습니다, 전하.”

“아주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귀족들이 인사를 했으니, 이제 황태자가 먼저 일어나 회의장을 나서야 했다. 그러나 그는 자리에서 움직이질 않았다.

슬금슬금 나갈 채비를 하고 있던 귀족들이 의문을 품고 그를 바라봤다. 황태자는 의문 섞인 시선들을 무시하며 내 쪽을 바라봤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는 눈을 번뜩이며 씨익 웃었다.

“특히 마법 루비 개발이 잘 이루어져 우리 제국의 위상을 드높이길 바라.”

그렇게 말하는 황태자의 두 눈에는 탐욕이 잔뜩 섞여 있었다.

그는 곧장 회의실을 나가지 않고 원형 테이블 위에 있는 루비를 주시했다.

“지금 저 루비들이 전부 마법 루비인 건가?”

그 질문에 난 한쪽 눈썹을 까딱이며 답했다.

“예, 전하.”

“모두 폐하께 진상할 생각이고?”

“아닙니다. 폐하께 바칠 루비는 가장 좋은 것으로 따로 마련해 두었습니다.”

“저런, 그럼 그 루비들은 주인이 따로 없겠군.”

그렇게 말한 황태자는 일정한 박자로 의자의 손잡이를 툭툭툭 쳤다.

그 행동에 회의실 안이 고요해졌다. 모두의 눈이 황태자의 손끝에 향했다.

난 그걸 관찰하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투자를 할 수 없다면, 이거라도 얻어 갈 속셈인가.’

원작에서 말하길 황태자는 타고나기를 폭력적이고 변덕스럽다고 했다.

아직 황제의 눈치를 보느라, 이런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그 성정을 죽이는 것뿐.

‘아마 이 자리에 가주들이 없었다면 당장 루비를 내놓으라며 윽박을 질렀을지도 모르지.’

그만큼 황태자의 시선은 노골적이었다. 그는 내가 먼저 루비를 바칠 때까지 저럴 요량인 듯싶었다.

그 무언의 압박에 문득 웃음이 나왔다.

‘케스퍼와 더불어 또 재밌는 판을 깔아 주다니.’

이래서 저 둘이 친구인 걸까?

난 힐끔 케스퍼를 바라봤다. 케스퍼는 더 이상 감정을 숨기지 않은 채, 아주 못마땅한 눈으로 나와 루비를 노려보고 있었다.

난 그 시선을 즐기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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