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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장녀가 육아물에 빙의하면-49화 (50/197)

49.

내 말에 케스퍼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재미없다고?”

“먼저 시비를 걸어 온 것치고 너무 빠르게 꼬리를 말아서요, 여러분들이.”

난 그렇게 말하며 남부 가신들을 둘러봤다.

“우리 북부는 걸어 온 싸움을 절대 피하지 않는지라 조금……. 김이 새네요.”

내 말에 뒤에 있던 북부의 가신들이 피식피식 웃었다. 그 비웃음을 들은 남부 가신들의 표정은 안 좋아졌고.

그사이 노련하게 웃는 얼굴을 되찾은 케스퍼가 입을 열었다.

“저런, 시비라니. 설마 모르는 건 언제든 물어보라는 말 때문에 삐진 거니?”

케스퍼는 마치 철부지 동생을 다루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측 사람들은 정말 널 생각해서 한 말이야. 그러니 왜곡되게 듣지는 마.”

그 말에 케스퍼의 뒤에 있던 남부의 가신 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케스퍼는 다정한 오빠 흉내를 내며 이어 말했다.

“한 가문의 임시 가주가 되었으면 그 정도 아량은 보일 줄 알아야겠지?”

“글쎄요.”

“응?”

난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케스퍼와 시선을 마주했다.

“내가 베푸는 아량은 내 사람들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인데, 그걸 바란다는 건……. 남부가 내 밑으로 들어오겠다는 뜻인가?”

내 말이 끝나는 즉시, 케스퍼가 인상을 찡그리며 날 노려봤다.

“선 넘지 마, 벨라디 앨턴.”

“먼저 넘은 건 그쪽이지, 케스퍼 아글라.”

저쪽이 먼저 내 말에 발끈해 살기를 보였으니, 이쪽도 더는 참을 이유가 없었다. 난 케스퍼를 비롯한 남부의 가신들을 서슬 퍼런 눈으로 응시했다.

“소리가 커지면 즉시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주제에……. 왜 함부로 사람 심기를 건드릴까?”

“뭐, 뭐라고?”

“아까도 말했다시피 우리 북부는 걸어 온 싸움을 피하지 않아. 특히 난, 날 무시하는 것들을 가만두지 않거든.”

내가 한 마디 한 마디 꺼낼 때마다, 남부의 가신들은 내 눈을 피하느라 바빴다.

그들은 한순간 끌어올린 내 기세를 감당하지 못해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었다. 특히 정면에서 날 마주 보고 있는 케스퍼의 얼굴은 하얗게 질린 상태였다.

아마 처음 느껴 보는 내 위압감에 적잖이 당황했을 것이다.

난 그걸 보며 진심 어린 조언을 꺼냈다.

“그러니 앞으로 말을 할 때마다 주의하는 게 좋을 거야. 비아냥을 아무리 걱정이라고 포장해도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니까.”

그러자 사색이 된 케스퍼가 떠듬떠듬 목소리를 내었다.

“품위 없게……. 아까처럼 이 회의장을 개판으로 만들어야 만족하겠다는 거야?”

그 말에 난 피식 웃음을 흘렸다.

“우아한 귀족식 싸움은 나와 급이 맞는 자들에게만 써도 충분하지.”

즉, 케스퍼와 남부 가신들은 나와 레벨이 다르다는 의미였다.

내 말을 알아들은 케스퍼가 이를 아득 갈았다. 내가 조성한 긴장감에 여유를 잃은 그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쳤다.

“지금 날 모욕하는 건가!”

이성이 무너진 케스퍼를 보고 나서야 만족스러움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어디 어른인 척 훈계질이야.’

이 정도면 됐겠다 싶어, 난 가지런히 입꼬리를 올렸다.

“이런, 농담이니까 삐지지 마세요. 아글라 소공작.”

내 한마디에 분노로 벌게졌던 케스퍼의 표정이 삐끗 엇나갔다.

“……뭐?”

“임시 가주는 아량을 베풀어야 한다길래 소공작의 아량은 어느 정도일까 궁금해졌거든요.”

난 한껏 팽팽히 긴장시켜 놓았던 분위기를 확 풀었다. 그러자 케스퍼의 내 대화를 듣고 있던 남부의 가신들이 긴장을 풀고 식은땀을 닦았다.

난 그걸 보며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작은 농담을 던진 것뿐이랍니다. 덕분에 소공작의 아량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했으니, 어느 정도 재미있는 대화였어요.”

“너……!”

케스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시금 내게 소리치려 했다.

그때 옆에서 유쾌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하하하하!”

그 웃음의 주인공은 바로, 이 사태를 조용히 지켜보던 프레도 공작이었다.

“이것 참, 살벌하구나, 살벌해!”

그렇게 말하며 계속 웃던 프레도 공작은 뒤에 있던 서부 가신들의 만류에 겨우 웃음을 멈췄다.

그는 날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참 보기 드문 장면을 봤어. 과연 테오도르가 벨라디 널 대리로 세울 만해.”

프레도 공작에 의해 케스퍼의 분노는 맥이 끊기고 말았다. 그걸 확인한 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방긋 웃었다.

내 미소에 케스퍼는 조용히 자리에 앉더니, 고개를 숙이고 숨을 골랐다. 그렇게 잠시 후, 웃는 얼굴로 돌아온 케스퍼가 날 바라봤다.

“그래, 농담이었구나. 벨라디, 이참에 하나 더 조언을 해 줄게.”

웃는 얼굴은 되찾았지만, 아직 흥분은 가라앉히지 못했는지 내뱉는 말이 상당히 빨랐다.

“싸움을 벌이는 것도 그 후폭풍을 수습할 능력이 있어야 하는 거야. 아량을 베푸는 것에 한계가 있는 것처럼.”

케스퍼는 그 뒤에도 뭐라 뭐라 말을 늘어놓았다.

난 그걸 흘려들으며 뒤에 있던 리켄 남작과 속닥였다.

“정말 잘하셨습니다, 벨라디 님. 아글라 소공작처럼 능글맞은 자를 저렇게 가지고 노시다니. 이런 기 싸움 면에서는 공작님보다 벨라디 님이 한 수 위인 것 같군요.”

“당연하지. 난 이런 싸움에서 진 적이 없어.”

“그나저나 조금 염려가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제국 최대의 교역장을 가지고 있는 남부와 이렇게 척을 져도 되는 건지…….”

그 말에 난 아직도 떠들고 있는 케스퍼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래? 난 별로 걱정되는 게 없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니, 생각해 두신 거라도 있으십니까?”

리켄 남작이 쓰고 있던 안경을 올리며 물었다. 우리의 말을 엿듣고 있던 다른 가신들도 끼어들지는 못하지만, 호기심이 가득한 시선으로 귀를 기울였다.

그때, 닫혀 있던 문이 열리며 한 무리의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제가 제일 늦었군요.”

동부 연합의 가주들과 그 대표인 티벤 후작이었다.

그가 등장하고 나서야 신나게 떠들고 있던 케스퍼가 정신을 차렸다. 케스퍼는 몇 번 헛기침을 하더니 날 바라봤다.

“하여튼 내 말 잘 기억해 놔.”

난 그 말을 가볍게 씹으며 프레도 공작의 맞은편에 앉는 티벤 후작을 바라봤다.

수도가 있는 동부의 수장은 한 가문으로 고정되지 않고 대대로 당대 황후를 배출한 가문이 추대받았다. 현 수장인 티벤 후작 역시 황태자와 킬리언의 어머니인 첫 번째 황후의 남동생이었고.

뭐, 첫 번째 황후가 죽은 후부터는 황제의 허락하에 업무를 제외한 모든 연회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덕분에 나와는 제일 연이 없는 사람이지.’

그래서 이렇게 가까이 보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티벤 후작이 익숙하게 케스퍼와 프레도 공작에게 눈인사를 했다. 그리고 나와 잠시 시선이 마주쳤다.

티벤 후작의 회색 눈을 보자 같은 색을 가지고 있던 킬리언 황자가 떠올랐다.

그러던 찰나, 황실 시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황태자 전하 듭십니다!”

그 말과 함께 다시 문이 열렸고 당당한 걸음의 황태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 아는 얼굴이 뒤따라 들어왔다.

‘킬리언…….’

채도 낮은 적발을 자연스럽게 내린 킬리언은 타오르는 붉은 머리를 깔끔하게 올린 황태자와 꽤 대조되었다.

킬리언은 회의장에 들어서자마자 고개를 두리번거리더니 나를 발견하고는 방긋 미소 지었다. 나 역시 입꼬리를 가지런히 올리며 그 미소에 화답했다.

곧 황태자가 계단을 올라가 본인의 자리에 앉았고, 킬리언도 그 옆 의자에 착석했다.

킬리언까지 앉은 후, 회의장의 모든 귀족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제국의 작은 주인이신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그래. 모두 자리에 앉게.”

황태자의 말이 끝나자 나를 비롯해 다들 의자에 앉았다.

황태자는 사람 좋게 웃으며 옆에 있는 킬리언을 가리켰다.

“공개적으로 발표하겠다. 그동안 오래도록 마갈라 제국에서 유학 생활을 보냈던 킬리언 앨러만 데커딜 황자가 드디어 귀국을 했어.”

그 말에 킬리언이 격식 없이 손을 흔들었다.

황태자는 그걸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오늘 가주 회의에는 킬리언도 함께할 것이니 알아 두게.”

“예, 황태자 전하.”

귀족들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황태자의 시선이 내 쪽으로 향했다.

“그나저나……. 익숙한 회의장에 못 보던 얼굴이 끼어 있군.”

그 말에 난 미소를 유지하며 황태자에게 예를 표했다.

“앨턴 공작가의 임시 가주로서 이 자리에 참석한 벨라디 앨턴입니다. 향후 몇 년간은 앨턴 공작님 대신 제가 참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가?”

황태자는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쯧쯧 찼지만, 길게 말하지는 않았다. 그는 나에게서 시선을 떼더니 곧 우렁차게 외쳤다.

“그럼 가주 회의를 시작하겠다!”

그 말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회의가 진행되었다.

가주 회의는 주로 각 연합의 수장이 최근 소식을 전달하는 것이기에 큰 소란 없이 무난하게 흘러갔다.

순서대로 동부, 서부의 차례가 끝나고, 케스퍼가 남부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저희 남부의 탐험가들이 마갈라 제국의 새로운 영지로 향하는 교역로를 개척했습니다.”

“오호라, 그곳의 반응은?”

“저희와의 교역에 상당히 호의적입니다. 따라서 선박을 최대로 늘리고, 계약을 통해 무역 유통량을 더욱 확대할 전망입니다.”

그 말에 황태자가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렇군! 아주 훌륭하구나, 아글라 소공작.”

“감사합니다, 전하.”

마갈라 제국은 우리 제국의 대략 두 배 정도 되는 땅덩이를 품은 나라였다. 따라서 대륙 최대의 강대국이었지만, 동시에 중앙 통솔이 힘든 국가이기도 했다.

이것은 전쟁이 끝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한때 적대국이었던 우리 제국을 여전히 미워하는 지역이 있는가 하면, 과거를 잊고 적극적인 교역을 원하는 지역도 있지.’

아글라 공작가의 제일 굵직한 사업이 바로 이런 지역을 찾아 바닷길로 연결하는 중개업이었다.

이런 탐나는 판을 다른 귀족들이 가만 놔둘 리 없었다. 아글라 공작가가 마갈라 제국과 새로운 교역을 트면 제국의 모든 귀족들은 어떻게든 투자를 하거나 거래를 하기 위해 남부로 달려들었다.

물론 우리 가문도 그 시장에 상당한 투자를 하고 있었고.

“투자자는 이전과 그대로인가?”

황태자의 말에 케스퍼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전하.”

그렇게 답한 케스퍼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번 교역에서 저희 남부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뒤쪽에서 한 가신의 작은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서, 설마…….”

그 설마를 건드리듯 케스퍼가 단호히 말했다.

“북부의 모든 가문에게 일절 투자를 받지 않겠습니다.”

케스퍼의 입가에는 명백한 비웃음이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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