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황궁에서 열리는 가주 회의는 두 가지가 있다.
1년에 한 번, 백작 이상의 가주들이 무조건 참석해야 하는 ‘대 가주 회의’. 그리고 주기적으로 열리는 ‘소 가주 회의’.
오늘은 한 달을 주기로 열리는 소 가주 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난 북부로 간 아버지를 대신해 임시 가주로서 이 회의에 참석하게 되었고.
이 회의에는 나처럼 임시 가주만 보내도 되었기에 가문의 후계자들도 많이 참석하곤 하였다.
회의를 주도하는 것도 황제가 아닌 황태자가 맡는다.
‘대 가주 회의의 예행이라고 볼 수 있지.’
중앙 궁으로 들어간 난 시종의 안내에 따라 회의장에 입장했다.
엄숙한 명화가 그려져 있는 아치형 천장의 회의장은 연회장과 구조가 비슷했지만, 전혀 다른 분위기를 띠었다.
회의장 맨 앞 계단 위는 황족의 자리였고, 바로 아래에는 넓은 원탁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각 연합의 수장이 앉는 자리였다.
그 주위로 가문의 가신들이 앉는 긴 테이블과 의자가 나란히 정렬되어 있었고.
대회의장은 처음이지만, 생각보다 익숙했다.
‘소설에 몇 번 묘사가 있어서 그런가.’
난 망설임 없이 원탁 테이블로 걸어가 아버지의 자리에 착석했다.
“이곳은 처음일 텐데, 공작님의 자리를 아시는군요.”
내 바로 뒤에 앉은 리켄 남작이 허허 웃으며 속삭였다.
그 말에 난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어려울 것도 없지.”
테이블에는 이미 익숙한 얼굴이 자리하고 있었다. 시온의 형인 케스퍼 아글라와 모스틴의 아버지인 프레도 공작이었다.
각각 남부와 서부를 대표하는 이들이 본인의 자리에 앉아 있으니 내 자리를 찾는 것도 쉬었다.
난 케스퍼의 맞은편에 앉은 채, 프레도 공작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프레도 공작님.”
“그래, 벨라디. 네가 테오도르 대신 회의에 참석하는 거니?”
“예, 제가 임시 가주이니 당연히 그래야죠.”
“호오, 그 소식은 들었다만……. 회의에 참석하는 건 예상 못 했구나.”
프레도 공작은 놀라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날 주시하고 있던 케스퍼가 끼어들었다.
“좋은 아침이야, 벨라디. 첫 회의이고 많이 낯설 텐데, 모르는 게 생기면 주저하지 말고 나한테 물어봐. 다 알려 줄게.”
케스퍼는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언뜻 다정해 보이는 그 미소에 난 실소를 금치 못했다.
‘부지런하네. 아침부터 날 돌려 깔 기력도 있고.’
물론 누구나 처음 하는 일은 미숙하기 마련이다. 미숙하기 때문에 모르는 게 많을 수밖에 없고, 그런 때에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이 당연한 일이 치명적인 타격으로 돌아오는 사회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이 귀족 사회지.’
처음이든, 아니든 여기는 무조건 능숙한 이들만 존중하는 곳이었다. 귀족에게 미숙함이란 곧 흠이니까.
그러니 완벽하지는 못하더라도, 완성은 되어야 사람 취급을 받을 수 있었다.
이건 후계자와 가주는 물론 황제에게도 적용되는 엄격한 잣대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대놓고 내게 모르는 걸 물어보라?’
더군다나 난 평범한 가주가 아닌 북부의 수장 대리로 참석한 몸. 지금 내게 저런 말을 꺼내는 건, 결국 이런 의도가 숨겨져 있다고 봐야 했다.
‘후계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여자가 뭘 하겠냐. 북부도 결국 별 볼 일 없다.’
그 의도를 증명이라도 하듯, 케스퍼 주위에 있던 남부 가신들이 피식피식 웃으며 거들었다.
“확실히 처음 오셨다면 회의에 따라오기도 벅차겠죠.”
“앨턴 공작님도 고민이 많으셨겠습니다. 후계자는 아직 어려서 임시 가주직을 맡기 힘들었을 테니.”
“허허허, 아무리 그래도 이런 파격적인 선택을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만.”
“앨턴 양, 저희들도 같이 도와드릴 테니 편하게 생각하세요.”
그들은 명백하게 날 깔보고 있었다.
나와 같은 걸 느꼈는지, 뒤에 있던 리켄 남작이 화를 냈다.
“지금 이게 무슨 무례입니까?!”
그러나 남부 가신들은 리켄 남작의 말이 들리지 않는 척, 자기들끼리 떠들며 웃었다. 남부 가신들이 똘똘 뭉치자 그 옆에 있는 서부의 가신 몇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는 것이 보였다.
다수의 움직임에 소수의 목소리가 닿을 리 없었다. 오히려 혼자 화를 내는 리켄 남작만 우스워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다수를 이끄는 케스퍼는 나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마치, 여기는 네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것처럼.
난 그 시선을 맞받아치며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내게 이빨을 보인다.’
겨울 연회 때의 난 멜도르와 관계를 정리했을 뿐, 임시 가주로 임명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케스퍼도 저 나름대로 상냥한 신사의 가면을 쓴 채 내게 접근하려고 했었지.
하지만…….
‘이렇게 본인과 같은 위치에 서는 건 안 되는 모양인가 봐?’
이 와중에 북부의 다른 가신들은 침묵을 유지하는 상태였다. 내가 공격당하는 상황을 모르쇠 하겠다는 뜻이었다.
‘저 능구렁이 같은 노인네들.’
본인들이 날 공격하지 못하니, 다른 이들의 공격을 막지 않겠다?
난 속으로 조소하며 일부러 또랑또랑하게 말했다.
“수도의 겨울도 거의 다 끝나 가는데.”
내 목소리가 회의장의 소음을 뚫고 뚜렷하게 울렸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북부의 가신들이 내 목소리에 반응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대들의 입은 아직도 얼어붙은 모양이군.”
뒤에서 연신 헛기침들이 쏟아졌다.
난 그걸 확인하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이렇게 추위에 약해서야 어디 쓰겠나. 오늘 회의가 끝나면 전부 북부로 돌려보낼 테니, 그렇게 알도록.”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뒤에서 누군가 벌떡 일어났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남부 가신들의 수다를 전부 잡아먹을 듯한 노성이었다.
회의장에 있는 모두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뒤편을 바라봤다.
“계속 참고 있어 줬더니, 뭐?! 우리가 우스워요?!”
찰나의 정적 속에서 그 목소리는 점점 커져만 갔다.
“이런 괘씸하고 비겁한 남부 자식들!”
그 뒤에 이런 외침이 덧붙여졌다.
“가암히 우리 위대하신 벨라디 님을 모욕하다니!”
그 말에는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가신 회의가 끝나고 제일 먼저 내게 아부를 떨었던 스라코 자작이었다.
자작이 이렇게 포문을 여니, 뒤이어 다른 가신들도 벌떡벌떡 일어나 소리치기 시작했다.
“맞소! 그대들이 어디까지 하나 지켜봤는데, 점점 선을 넘으면 어떻게 하오!”
“아무리 뚫린 입이라고 해도 그따위 망발은 하면 안 되지!”
“벨라디 님을 낮잡아 보는 건, 우리 모두를 낮잡아 보는 것과 다름없소!”
북부의 가신들이 앞다투어 화를 냈다.
현재 수도에 있는 가신들은 전부 정치에 뜻이 있는 자들이다.
이런 자들에게 다시 북부로 돌아가라? 그건 명백히 좌천과 다름없었기에, 가신들은 필사적으로 내 편을 들었다.
난 미소를 잃지 않으며 생각했다.
‘하여튼 이렇게 협박을 해 줘야 말을 들어요.’
이래저래 귀찮은 노인네들이지만, 분위기를 금방 이쪽으로 가지고 올 수 있었다.
그러자 남부의 가신들이 살짝 당황한 티를 냈다.
“뭐, 뭘 그렇게까지 흥분하고 그럽니까?”
“저희가 무슨 욕을 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이 정도 걱정은 제국을 위해서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겁니다!”
한편 그들 중에서도 잔뼈가 굵은 이들 몇몇은 상황을 진정시키고자 달래듯이 말했다.
“자자, 괜히 예민하게 해석하지 마십시오.”
“저희의 말이 심기를 건드렸다면 기꺼이 사과하겠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허허허 웃었다.
보통 이 정도까지 오면 모두들 눈치껏 말싸움을 종료한다. 가주 회의도 결국 친목회의 일종이었기 때문이다.
남부에서 먼저 ‘사과’라는 단어가 나오자, 북부의 가신들이 힐끗 내 눈치를 봤다. 등 뒤에서 그 시선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리고 내 앞에 있는 케스퍼는 여전히 여유로운 웃음을 유지한 상태였다.
난 그를 마주 보며 같이 미소 지었다.
‘웃어?’
내 성질을 살살 건드린 놈이 계속 웃고 있어? 그건 또 내 자존심이 허용하지 않거든.
난 가벼운 손짓으로 남부 가신들을 가리켰다.
멈추지 말라는 신호였다.
내게 잘 보여야 하는 북부 노인네들은 기똥차게 이 신호를 알아먹고는 목소리를 높였다.
“전부터 우리 북부를 한 수 아래 취급하더니, 이렇게 흐지부지 넘어갈 속셈인가?!”
“그렇습니다! 그게 지금 사과하는 사람 태도입니까?!”
“꼭 욕을 해야만 그 사람을 모욕했다고 볼 수는 없소!”
그 말에 능청스러운 남부의 가신들도 점점 화가 올라오는 모양이었다.
“아니, 그럼 사과를 어떻게 해야 속이 풀리겠다는 겁니까?”
“좋은 말을 이상하게 받아들인 북부 측이 이상한 거 아닙니까?!”
“나 참, 적당히 좀 하십시오! 이래서 무식한 북부랑은 말이 안 통한다니깐!”
“좋은 말이라고 포장하면 세상 모든 말이 다 좋은 말입니까?! 교양 있다는 분들이 그것도 모르나!”
“이 사달을 내놓고서는 비겁하게 빠져나가려는 남부가 잘못된 것 아닙니까!”
“뭐요?! 지금 우리 보고 뭐라고 했소! 비겁?!”
“그쪽도 우리보고 무식하다고 하지 않았소!”
시끌벅적.
연회장 안이 순식간에 시장통이 돼 버렸다.
어느새 흥분한 남부의 가신들도 벌떡벌떡 일어나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북부의 가신들도 처음에는 내 명령에 화를 내는 시늉만 한 것이었지만, 갈수록 감정이 격해졌는지 진심으로 대응하는 것이 보였다.
애초에 북부와 남부는 서로를 깔보는 경향이 있어서, 타오르는 건 한순간이었다.
방금까지 서로를 보며 미소 짓고 있던 케스퍼와 나.
여기서 페이스를 잃은 건 당연히 케스퍼였다.
“잠깐. 모두들 진정하시고.”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거센 불길이 치솟자 케스퍼는 무척 당황스러운 모양이었다.
그가 남부의 가신들을 바라봤다.
물론 다수의 외침에 소수의 목소리는 닿기 힘든 건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남부의 가신들은 자신들의 수장인 케스퍼는 보지도 않고, 북부의 가신들과 싸우느라 바빴다.
이런 상황은 또 처음인지, 케스퍼는 인상을 찡그리며 힐끔 프레도 공작을 바라봤다. 프레도 공작이 나서 상황을 중재해 주기라도 바라는 듯했다.
하지만 프레도 공작은 흥미로운 눈으로 남부와 북부의 싸움을 지켜볼 뿐이었다.
‘하긴, 오랜만의 볼거리일 테니 말릴 이유가 없겠지.’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케스퍼는 프레도 공작에게서 시선을 거두고는 몇 번 더 말로 상황을 진정시키려 했다.
물론 전혀 먹히지 않았고 결국 그는 테이블을 쾅쾅 내리치고 말았다.
“그만, 그만-!”
언제나 여유롭고 교양 있던 케스퍼에게 지금은 꽤 창피한 순간일 것이다. 케스퍼는 미간을 잔뜩 찡그리고서는 남부의 가신들을 노려봤다.
그러자 남부 쪽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그 후, 애써 표정을 관리한 케스퍼가 날 바라봤다.
“본격적인 회의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게 무슨 난리야. 안 그러니, 벨라디?”
그 말에 난 한쪽 눈썹을 까딱이며 입을 열었다.
“참 재미없는 말을 하시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