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더너스에게 무사히 족쇄도 채웠으니, 감시자에 대해서도 간단하게 설명했다. 내 설명을 금방 알아들은 더너스는 놀라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가에 그런 비밀 조직이 있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넌 기사단에 처음으로 심는 감시자야. 곧 다른 이들을 소개해 줄 테니 확실하게 일을 배우도록 해.”
“예, 벨라디 님.”
“아직도 네 친구가 첩자인 건 믿지 못하겠나?”
내 물음에 잠시 멈칫하던 더너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때는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벨라디 님.”
난 순종적으로 변한 더너스를 보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래, 기사라면 응당 저렇게 행동해야지.’
“이만 나가 봐.”
“예, 벨라디 님. 명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렇게 더너스를 내보내고 잠시 후.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똑-.
“벨라디 님, 소공작님께서 오셨습니다.”
‘멜도르가?’
자리에 앉아 서류를 살펴보던 난 가만히 문을 바라봤다.
답을 하지 않자 문 너머로 성급한 멜도르의 외침이 들렸다.
“왜 누나가 답이 없어! 네가 너무 조그맣게 말한 거 아니야? 당장 더 크게 말해!”
“……죄송합니다, 소공작님.”
‘쟤는 왜 애꿎은 스티아를 괴롭히고 난리야.’
난 혀를 쯧 차며 입을 열었다.
“들어오라고 해.”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멜도르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놈의 얼굴은 무언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잔뜩 구겨져 있었다.
“그 자식 말이 사실이야?!”
그 말에 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멜도르를 주시했다.
내 시선에 놈이 짜증을 냈다.
“더너스 로건! 누나랑 진검으로 싸운 기사! 그 기사를 최측근으로 쓴다는 게 사실이냐고!”
“누가 그래?”
“방금 마주쳤는데, 본인이 그러잖아!”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안 봐도 뻔하네.’
더너스가 나가고 얼마 안 가 멜도르가 왔으니, 분명 두 사람은 5층 복도에서 마주쳤을 것이다.
더너스가 인사하자, 멜도르는 이렇게 말했겠지.
-네가 왜 아버지 집무실에서 나와? 거기 지금 누나가 있을 텐데?
그 물음에 말주변 없는 더너스는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결투에서 패배한 대가로……. 벨라디 님의 종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평생.
차마 감시자에 대해서는 말할 수가 없으니까.
그걸 멜도르는 최측근이라고 해석했을 확률이 높았다.
‘뭐, 내 첫 최측근은 따로 있지만 말이야.’
제플린이 들으면 꽤 서운해하겠는걸?
난 고개를 저으며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누구를 가까이 둘지는 내 마음이고. 여기는 왜 온 거야?
“…….”
그렇게 서류를 체크하며 놈의 다음 말을 기다렸지만, 침묵이 길어졌다.
난 고개를 들어 멜도르를 마주 봤다.
“멜도르?”
“……그럼 난?”
내가 미간을 찡그리자, 멜도르가 대단한 결심이라도 한 것마냥 말했다.
“난 왜 가까이 안 둬?”
“뭐라고?”
“그 자식 버릇없게 누나한테 결투를 요청했잖아. 그런데도 최측근으로 삼을 수 있는 거면, 나도 옆에 둘 수 있는 거 아니야?”
“…….”
“난 누나 동생이니까.”
그렇게 말하는 멜도르의 푸른 눈이 말똥말똥했다. 이렇게 말문이 막히는 경우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난 잠시 입을 다물고 멜도르를 주시하다 곧 크게 웃고 말았다.
“하하하하하-!”
내 웃음에 멜도르가 입을 삐쭉이더니 성질을 냈다.
“기껏 용기 내서 말했더니 왜 웃어!”
“아아, 건방진 내 동생.”
난 들고 있던 펜을 탁 내려놓았다.
“왜 갑자기 태도가 돌변했을까?”
“뭐?”
“이상하잖아, 멜도르.”
그리고 자세를 편히 한 채, 턱을 괬다.
“넌 그동안 날 아랫사람 취급했고, 난 네가 참 가증스럽다고 생각했어.”
내 말에 멜도르가 큰 충격을 받은 듯 눈을 부릅떴다.
하긴, 그럴 만했다. 내가 대놓고 멜도르를 비난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멜도르는 내게 함부로 말할 수 있었지만, 난 언제나 하고 싶은 말을 억눌러야 했기 때문이다.
‘단지 내가 멜도르의 누나라는 이유만으로.’
어머니와 아버지가 바라는 ‘누나’가 되기 위해서는 매 순간 나 자신을 죽여야 했다.
돌이켜보면 그 짓도 참 신물이 났다.
‘전생을 자각한 그 순간부터 내게 가족은 가치가 없어.’
그들에게 난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던 것처럼, 나 역시 감정적인 부분에서 그들을 잘라 냈다.
난 멜도르의 푸른 눈을 똑바로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남매라고는 하지만, 우리는 분명 남보다 못한 사이야. 그런데 갑자기 내게 접근하는 저의가 뭐야?”
내 말에 멜도르가 입술을 깨물었다. 놈의 콧잔등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내 어디가 가증스러운데?”
멜도르가 나를 노려보며 물었다.
눈초리는 사납지만, 저렇게 물어보는 것 자체가 자존심을 많이 죽였다는 뜻이었다.
‘물론, 난 언제나 멜도르 앞에서 자존심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해야 했지만.’
과거의 순간을 조소하며, 난 기꺼이 놈의 질문에 답해 주기로 했다.
“별다른 노력 없이 내가 원하는 걸 전부 차지하고서는 항상 편하게 산다며 날 원망했지.”
“그건 사실이잖아! 공부나 훈련같이 힘든 건 항상 나만 했고! 누나는 예절 교육이나 사교댄스같이 쉬운 것만 했잖아!”
“쉬운 것만 했던 게 아니라,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거라면?”
“그게 무슨 말이야?!”
“네가 좋아하는 마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검에만 매진해야 했던 것처럼.”
그 말에 멜도르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나 역시 배우고 싶었던 검을 멀리한 채 묵묵히 신부 수업이나 들어야 했다는 뜻이야.”
“…….”
“이런 내가 네 눈에는 편하게만 보였나 본데.”
난 가만히 멜도르의 반응을 관찰했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야. 내 눈에도 부모님이 너를 편애하는 게 선명히 보였어.”
말문이 막혔는지 놈은 말이 없었다.
“그런데도 난 네 화풀이를 잠자코 받아 줬지. 왜냐? 정말 짜증 나게도, 난 네 누나였으니까. 하지만 그 짓도 이제 그만뒀어.”
이번에는 반박할 말이 생겼는지 멜도르가 급하게 입을 열었다.
“그, 그건! 어머니가 그래도 된다고! 누나는 다 받아 줄 거라고 그랬단 말이야!”
“넌 자체적으로 판단도 못 해? 애초에 타인에게 화풀이를 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거야. 그렇게 남 탓을 하는 것도 꼴불견이고.”
내 말에 멜도르는 제대로 타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주먹을 꽉 쥐는 꼴을 보니, 아마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 말하면 알아서 나가떨어지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놈에게서 시선을 뗐다. 하지만 멜도르는 내 예상보다 끈질겼다.
놈은 나가지 않고 쥐어짜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내가 싫다는 거야?”
정말 새삼스러운 질문에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널 좋아할 이유가 없잖아.”
“내가……. 그동안 누나한테 못되게 굴었던 건 인정해.”
여기까지 말한 멜도르는 잠시 씩씩거렸다.
난 놈이 무슨 이야기를 할지 궁금해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구경하는 듯한 내 시선에 인내심의 한계가 왔는지, 멜도르는 울컥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우리는 가족이잖아! 누나는 나보다 나이도 많고! 내가 먼저 사과할 테니까, 과거는 좀 넘어가면 안 돼?!”
“가족이니까 널 내쫓지 않은 거야.”
곧바로 나온 내 대답에 멜도르가 멈칫했다.
“뭐?”
“그나마 피붙이고, 네가 나보다 어린 건 사실이니까. 그래서 널 건들지 않은 거야, 멜도르 앨턴.”
난 한쪽 눈썹을 까딱이며 고개를 기울였다.
“아니었다면 후계자의 자리를 노리는 내가, 제일 큰 장애물인 너를 가만히 뒀을 것 같니?”
“가, 가만두지 않았으면 어떻게 할 건데?”
“후계자의 자리를 두고 쟁탈하는 형제의 말로를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내 말에 멜도르는 배신감 섞인 표정을 지었다.
“그럴 거면……. 그럴 거면 왜 아버지한테 편지를 보냈어? 왜 내가 마법을 배울 수 있게 도운 거야?”
“그래야 네가 화풀이한답시고 날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까.”
자신의 상상과는 다른 대답이었는지, 멜도르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난 일부러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말고 나가. 멜도르 앨턴. 이렇게 무턱대고 찾아오는 것도 앞으로 허락하지 않겠어.”
“으윽……!”
멜도르의 푸른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울먹이는 눈으로 날 노려보던 놈은 곧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쾅-!
사납게 닫히는 집무실 문 너머로 멜도르가 달리는 소리가 났다.
난 무감각한 얼굴로 다시 시선을 내려 서류를 바라봤다.
그렇게 한참 업무를 처리하던 난, 문득 든 생각에 피식 비웃음을 지었다.
“검 하나 배웠다고, 저렇게 바뀐다라…….”
전에 이런 궁금증을 가진 적이 있다.
멜도르가 기사를 동경한다면, 지금의 나도 동경할까?
‘참 쉽네. 멜도르의 마음을 얻기는.’
필요도 없는데 말이야.
그래도 오늘 놈의 자존심을 박박 긁었으니, 다시 데면데면한 사이로 돌아갈 것이다.
난 그 관계가 훨씬 편했다.
‘화풀이를 하는 것도 성가시지만, 동생이랍시고 들이대는 것도 성가시니까.’
멜도르가 헛된 노력 하지 않고 얌전히만 지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업무를 마무리했다.
***
아버지의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는 게 익숙해질 만큼 시간이 흘렀다.
그사이 난 제플린을 공식적으로 내 최측근 기사로 삼고 옆에 두었다. 또한 그에게 더너스를 소개하며 감시자로서 따로 훈련할 것을 명령했다.
내 말에 제플린은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더너스 로건 정도면 감시자로서 나쁘지 않은 그릇입니다. 사람을 보는 안목까지 뛰어나시다니. 역시 벨라디 님은……!
또한 스티아에게도 은밀히 명을 하나 내렸다.
-최근 마갈라 제국에서 돌아온 킬리언 2황자에 대해 알아봐.
-감시자를 붙이면 될까요?
-아니, 그가 마갈라 제국에서 뭘 했는지만 조사해.
킬리언은 황자이기 때문에 감시자를 붙이기 힘들 것이다. 그럴 바에는 좀 더 우회해 과거를 파헤치는 것이 좋았다.
‘지금의 킬리언은 내가 마크하면 되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타고 있던 마차가 멈췄다.
곧 문이 열리고 황실의 시종이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고 내리니, 이미 도착해 있던 북부의 가신 몇이 내게 다가왔다.
그중 리켄 남작이 입을 열었다.
“그럼 가 보실까요, 벨라디 님.”
“그래. 아주 재미있는 시간이 되겠어.”
난 웃으며 눈앞의 건물을 바라봤다. 황제가 업무를 보는 중앙 궁의 고풍스러운 대리석 외벽이 햇빛에 반짝였다.
‘황궁에서 연회장이 아닌 곳은 처음 들어가 보네.’
특히 중앙 궁은 마차를 타고 가며 구경할 때마다 꼭 한번 들어가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곳이었다.
“가자.”
난 살짝 들뜬 마음을 품고, 가신들을 이끌며 중앙 궁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