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난 순식간에 정리된 기사단의 서열을 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오늘 훈련은 이 정도로 해야겠군. 로건 경, 패배의 대가는 나중에 알려 줄 테니 그때까지 대기하고 있어.”
“알겠습니다.”
난 기사들의 극진한 경례를 받으며 연무장을 나섰다.
이런 내 뒤를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잠시만! 누나!”
이제는 누나라는 소리가 입에 자연스럽게 밴 멜도르였다.
“무슨 일이야.”
내 말에 멜도르가 버럭 소리쳤다.
“아니, 저딴 새끼가 뭐라고 위험하게 진검으로 결투를 한 거야! 그러다 누나가 다칠 수도 있었어!”
난 아무 말 없이 멜도르를 바라봤다. 내 시선에 멜도르가 잠시 입을 다물더니 뻘쭘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이 말하는데 왜 말이 없어?”
“멜도르 앨턴.”
난 천천히 눈을 깜박이며 입을 열었다.
“네가 언제부터 내 걱정을 했다고 그래?”
“어?”
“그딴 거 너한테 기대한 적 없어.”
난 그 한마디를 남긴 후 갈 길을 마저 갔다.
뒤늦게 멜도르의 외침이 복도에 울렸다.
“거, 걱정을 해 줘도 그래! 알겠어! 나도 앞으로 신경 안 쓸 거야!”
“…….”
“알겠어?! 절대 신경 안 쓸 거라고! 누나가 다치고 와도, 난 모르는 일이라고!”
반응이 없는 내게 멜도르는 계속 외쳤다. 마치 내가 뒤돌아봐 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정말 새삼스럽게 말이다.
***
멜도르가 내게 걱정 비슷한 걸 한 후 며칠이 흘렀다.
그동안 놈은 이해하기 힘든 행동들을 반복했다.
-뭐, 뭘 봐!
괜히 내 곁을 서성이다 눈이 마주치면 도망갔고.
-오늘은 어디서 훈련할 거야? 딱히 구경하려고 물어본 건 아니야!
어떨 때는 끈덕지게 말을 걸어 왔다.
전에는 그렇게나 나를 싫어했으면서 도대체 무슨 꿍꿍이일까?
멜도르도 그렇고 아버지도 그렇고 왜 이제 와서 저러는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우리가 가족 놀이를 할 만큼 살가운 사이는 아닌데 말이야.’
그나마 아버지는 아직 뜯어낼 것이 많아 맞장구쳐 줄 수 있지만, 멜도르에게는 딱히 원하는 게 없었다.
그저 내게 방해만 되지 않으면 그만일 뿐. 그 이상 신경 쓰는 것도 번거로운 일이었다.
‘검술이 아닌 마법을 배우게 해 준 게 어디야.’
누나로서의 온정은 딱 이 정도까지였다.
다행히 지금 멜도르의 행동은 귀찮기는 해도 크게 거슬리지는 않았다. 이렇게 얌전히만 지낸다면 이 온정을 거둘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잠시 잡념에 빠져 있던 난, 생각을 치운 후 눈앞의 문을 바라봤다.
내가 문 앞에서 가만히 서 있자 뒤에 있던 스티아가 물었다.
“문을 열까요, 벨라디 님?”
“아니.”
난 스티아를 저지하며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내가 직접 열지.”
옅게 심호흡을 한 후, 난 양문형 문을 힘차게 열었다.
스르륵-.
거대한 문이 매끄럽게 열렸고, 방 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벽에 걸려 있는 앨턴 공작가의 검은 독수리 깃발. 짙은 고동색으로 맞추어진 가구들 사이로 포인트를 주는 붉은 커튼과 카펫.
난 문을 꼭 닫은 후, 천천히 벽난로 옆에 있는 아치형 창문으로 다가갔다. 창문 너머로는 앨턴가의 화려한 정원이 한눈에 펼쳐져 있었다.
“아버지는 매일 이런 풍경을 보는 건가.”
당분간은 내가 이 풍경을 독차지할 예정이고 말이다.
난 다시 걸음을 옮겨 마호가니 책상으로 다가갔다. 언제나 무뚝뚝한 얼굴의 아버지가 앉아 있던 곳. 이제는 내가 앉게 될 곳이었다.
책상 위에는 오늘 내가 처리해야 할 서류들과 만년필 같은 필기구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난 잠시 책상 위를 쓸다가 붉은색 벨벳이 깔린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집무실을 여유롭게 살펴봤다.
몇 번 왔던 곳이지만, 이 위치에서 보니 또 색다르게 느껴졌다.
‘마음에 들어.’
임시 가주가 가지는 특권 중 하나.
임시 가주는 가주가 없을 경우, 그를 대신해 가주의 집무실을 사용할 수 있었다.
한동안은 리켄 남작에게 이것저것 인수를 받으며 남작의 집무실을 이용했지만, 드디어 오늘. 난 본관 5층에 있는 아버지의 집무실에 입성하고야 말았다.
‘지겨운 2층에서 겨우 탈출했군.’
아버지가 돌아오기까지 임시라고는 하지만, 뭐 어떤가. 예전이라면 이 자리를 감히 넘보지도 못했을 텐데.
난 잠시 이 순간을 만끽한 후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집무실 왼쪽에 있는 아버지의 서고로 향했다.
그 안에는 책이 빽빽하게 꽂힌 책장들과 사다리가 놓여 있었다. 난 그중 오른쪽 벽에 붙어 있는 책장으로 다가갔다.
‘분명……. 맨 오른쪽 책장 열 번째 열의 두 번째 책, 그리고 다섯 번째 책이라고 했어.’
원작에 적혀 있는 대로 각자의 위치에 꽂힌 책 두 권을 살짝 빼내었다. 그러자 약간의 진동과 함께 책장이 열리기 시작했다.
곧 숨겨져 있던 비밀 계단이 까꿍 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아버지는 내가 이걸 알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겠지.’
난 씨익 미소 지으며 느긋하게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을 오르니 다락으로 이어진 문이 나왔다. 이 문 역시 본관의 지하 창고처럼 앨턴가의 직계만 들어올 수 있는 마법 보안 장치가 있었다. 덕분에 난 손쉽게 문을 열고 다락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안에는 앨턴 공작가가 그동안 모아 온 온갖 보물들이 곱게 전시되어 있었다. 고대 왕국에서 쓰였다는 보검이라든가, 금으로 만들어진 갑옷이라든가.
난 그것들을 지나쳐 장식장 위에 있던 보석함 하나를 열었다. 그 안에는 가공된 가넷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이 가넷은 평범한 가넷이 아니었다.
‘감시자들의 목숨이라고 볼 수 있지.’
앨턴 공작가의 온갖 궂은일을 처리하는 ‘감시자’. 이는 반대로 배신을 하면 가장 골치 아픈 존재가 된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앨턴가의 선조들은 이렇게 보석에 걸린 마법으로 감시자들에게 목줄을 채웠다.
감시자들은 각자 다양한 사정을 가지고 앨턴가에 복속한 자들이었다. 따라서 어떤 이에게 이 목줄은 보호막이 되기도 했고, 어떤 이에게는 이것이 족쇄가 되기도 했다.
난 아직 사용되지 않은 가넷 하나를 집어 조명에 비추었다.
“더너스는 이 보석을 어떻게 받아들이려나.”
보호로 느끼든, 족쇄로 느끼든 말든 사실 크게 상관없었다. 난 한번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니까.
가넷을 챙긴 후, 집무실로 돌아온 난 밖에서 대기 중인 스티아에게 더너스를 불러오라 말했다.
그리고 업무를 보고 있으니, 곧 노크와 함께 스티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로건 경께서 오셨습니다.”
“들어와.”
내 허락이 떨어지자 집무실의 문이 열렸다.
문 앞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더너스가 서 있었다.
날 보자마자 그는 각 잡힌 자세로 경례를 했다.
“임시 가주님을 뵙습니다!”
난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고 살짝 고개를 까딱였다.
내 신호를 읽은 더너스가 재빠르게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난 책상 가까이 다가온 더너스에게 아까 들고 온 가넷을 꺼내 보였다.
“이게 뭔지 알겠어?”
“……가넷인 것 같습니다!”
“평범한 가넷이 아니야. 이 안에는 마법이 걸려 있으니까.”
난 들고 있던 가넷을 잠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내가 경과의 결투에서 이기면 뭘 하겠다고 했는지 기억나?”
내 말에 더너스가 잠시 멈칫하더니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제게 평생 종살이를 시킨다고 하셨습니다.”
“난 빈말은 하지 않아.”
“하지만 벨라디 님. 전 이미 앨턴 공작가의 기사로서, 평생 공작가에 충성을 바치겠다는 서약을 했습니다.”
“그건 앨턴 공작가의 종이지 내 종이 아니잖아?”
내 말을 알아들은 더너스의 눈이 커졌다.
난 그의 고동색 눈을 빤히 보며 마법의 시동어를 읊었다.
“계약 마법을 실행한다.”
파앗-.
가넷이 짙은 붉은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더너스는 순간 넋을 놓고 가넷을 쳐다봤다.
난 그 모습을 주시하며 마저 입을 열었다.
“더너스 로건, 그대는 나 ‘벨라디 앨턴’에게 평생의 복종을 맹세하겠는가.”
내 말에 더너스는 정신이 돌아왔는지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그는 고민을 하는 듯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런 더너스에게 나는 진하게 웃어 주었다.
“말하는 걸 깜박했는데, 그대에게 거부권은 없어.”
“예?”
내 말이 끝나자마자 가넷의 붉은 빛이 강렬하게 빛났다가 꺼졌다.
동시에 더너스의 손등에 붉은 가넷 모양의 인장이 생겼다.
저건 계약이 잘 끝났다는 표식이었다.
“앞으로 잘 부탁하지, 로건 경.”
“……이게 무슨.”
가넷 모양의 인장은 곧 스르륵 사라졌다. 더너스는 자신의 손등을 살펴보며 꽤 혼란스러워했다.
난 새로운 나의 종을 위해 기꺼이 설명을 해 주었다.
“애초에 이 마법은 상대의 동의를 구하지 않아. 가넷의 빛을 보는 즉시 자동으로 계약이 체결되는 강제 계약 마법이거든.”
감시자의 존재는 철저한 비밀로 지켜져야 했다. 그걸 위해 공작가는 상대의 동의 없이 바로 계약을 체결하는 마법을 만들어 보석에 심어 두었다.
‘그 마법을 만든 자조차 앨턴가의 감시자였고 말이야.’
자신이 어떤 처지에 놓였는지 깨달은 더너스는 딱 굳어서 아무런 액션도 취하지 못했다.
난 그런 더너스를 주시하다 의자에서 일어나 집무실 벽으로 향했다. 그 벽에는 화려한 보석이 세공된 장검이 장식되어 있었다.
장식용 검을 집어 든 난 더너스에게 걸어가며 입을 열었다.
“기사의 예를 취해라, 더너스 로건.”
내 말에 더너스는 자동으로 한쪽 무릎을 꿇고 반대쪽 주먹을 가슴에 대었다.
스릉-.
난 능숙하게 검을 뽑아 더너스의 오른쪽 어깨에 한 번, 왼쪽 어깨에 한 번. 마지막으로 머리에 한 번 올려 두었다.
마치 기사의 서임식처럼.
“그대는 앞으로 앨턴가의 기사가 아니라 내 기사라는 걸 명심해. 가넷의 계약을 어기는 자의 말로는……. 단순히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만 말해 두지.”
내 말에 더너스가 고개를 들어 날 바라봤다. 그사이 생각의 정리를 끝낸 것인지 더너스는 아까보다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 평생을 벨라디 님께 바치겠습니다.”
‘너뿐만 아니라 로건 가문 전체를 나한테 바쳐야 할 거야.’
난 검은 속내를 숨기며 기분 좋게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