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K-장녀가 육아물에 빙의하면-44화 (45/197)

44.

최근 며칠간 멜도르는 어딘가 붕 뜬 기분이었다.

그는 마법 수업 중에도, 밥을 먹거나 산책을 할 때도 멍하니 생각에 잠기곤 했다. 벨라디가 했던 말들이 멜도르의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기 때문이다.

-적어도 난 솔직해졌어, 멜도르 앨턴.

그때 그가 느꼈던 감정은 하나로 정의하기 힘들었다.

굴욕스럽기도 했고,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부러웠고.

‘그리고…….’

어린 멜도르도 알 건 알았다. 여자의 몸으로 가주가 되려면 어떤 각오를 가져야 하는지.

그런데 벨라디는 그걸 너무나 자연스럽게 입에 올렸다.

마치…….

여기까지 생각한 멜도르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내가 그 악마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다니……. 말도 안 돼!’

하지만 부정할수록 벨라디가 했던 말들이 몽실몽실 떠올랐다.

-앨턴가의 후계자? 북부의 차기 주인? 난 그런 거로 중압감을 느끼는 사람이 아니거든.

-후계자의 자리는 애초에 내 것이었으니까.

낮고 힘 있는 목소리가 또박또박 내뱉는 말들은 어떠한 믿음을 가지게 했다. 저 사람은 말하는 모든 걸 이룰 거라는 묘한 신뢰 말이다.

멜도르는 벨라디의 말을 들으며 느꼈던 그 모든 걸 인정할 수 없었다.

‘항상 내 뒤에 있었던 벨라디 앨턴이야! 그런데 어떻게 순식간에 사람이……!’

멜도르는 괜히 머리를 헝클였다.

벨라디가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내 검술 수업의 비중을 줄인 것도. 가족 중 유일하게 자신이 후계자의 자리를 부담스러워한다고 눈치챈 것도.

멜도르는 하나도 고맙지 않았다.

‘내가 해 달라고 부탁한 적 없었어! 그러니까 이딴 감정 느낄 필요 없다고!’

멜도르는 술렁이는 가슴을 표현하듯 쿵쾅쿵쾅 발소리를 내며 복도를 걸었다.

빠르게 걷던 멜도르는 곧 걸음의 속도를 낮췄다.

멜도르가 향한 곳은 공작가의 기사단이 사용하는 실내 연무장이었다. 그 앞에 도착한 멜도르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조금 전, 집사인 로버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벨라디 님이 어디 계시냐고요? 지금이면 연무장에서 검술 훈련을 하실 시간입니다.

-검술 훈련?

-예! 전부터 알렉산더를 길들이며 꾸준히 검술 훈련을 하셨던 모양입니다!

-하, 어쩐지. 그래서 매일 평야에 갔었나 보네. 그러면 계속 거기서나 연습할 것이지 왜 갑자기 거기서 한다는 거야?

-이제는 자신의 자리를 어느 정도 잡았으니 연무장에서 훈련을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벨라디 님은 앨턴가의 임시 가주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로버의 눈이 징그럽게도 초롱초롱했다.

“그나저나 벨라디 앨턴이 검술 훈련이라니.”

멜도르도 자신의 누나가 얼마나 어머니에게 약한지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벨라디가 목검이라도 잡으려 하면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다.

그래서 벨라디는 철저하게 검에서 멀어졌다. 대신 어머니에게 허락받은 승마, 사교댄스, 사격에 몰두했다.

‘그래서 전부 수준급으로 잘하는 건 알고 있지만.’

그 괴물 같은 운동 실력으로 검을 배운다니. 지난 사냥 대회에서 황제에게 하사받았다는 정령검을 직접 휘두르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멜도르는 괜스레 느껴지는 긴장감을 억누르며 연무장의 문을 열었다.

챙-!

문을 열자마자 그를 맞이한 건 날카로운 검이 맞부딪치는 소리.

그리고 어쩐지 달아오른 연무장의 분위기였다.

기사들은 훈련하지 않고 연무장 가운데에 모여 있었다. 덩치가 큰 기사들에게 가려져 앞이 보이지 않았다.

멜도르는 신경질적으로 끝에 있는 기사들의 종아리를 발로 찼다.

“비켜!”

“윽! 아, 소공작님 오셨습니까!”

모여 있던 기사들이 멜도르를 보고 급하게 자리를 피해 줬다. 그들이 만들어 준 길을 통해 멜도르는 연무장 가운데로 향했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은 벨라디가 한 기사와 검을 맞대고 있는 모습을.

그것도 진검으로!

벨라디가 들고 있는 정령검이 휘둘리는 각도에 따라 번뜩였다.

그걸 보며 멜도르는 경악했다.

“가, 감히 앨턴가의 직계에게 일개 기사가 진검을 휘두르다니!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멜도르는 다급한 손놀림으로 옆에 있던 기사의 멱살을 잡았다. 벨라디의 검술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기사는 멜도르를 보고 서둘러 입을 열었다.

“소, 소공작님!”

“설명해! 지금 이제 무슨 상황이야!”

멜도르의 윽박에 기사는 서둘러 상황을 설명했다.

“벨라디 님이 시찰도 하실 겸, 이 연무장에서 훈련하시던 와중에 로건 경이 결투를 신청했습니다!”

“로건?”

“현재 첩자로 체포된 돈티오 경과 막역한 사이입니다! 로건 경이 그자는 첩자가 아니라며 재수사를 요청했고, 벨라디 님은 자신과 겨루어 이기면 재수사 요청을 받아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멜도르도 주제넘은 어머니의 전 호위 기사를 알고 있었다.

‘그 썩은 동태 같은 눈깔로 어머니를 힐끔거렸던 음흉한 새끼.’

“고작 그딴 새끼의 재수사를 걸고 결투를 한다고?”

“아, 단순히 재수사만 걸린 건 아닙니다!”

기사의 대답에 멜도르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저 로건이라는 건방진 새끼가 또 뭔가를 요구했단 말이야?!”

“아닙니다! 벨라디 님이 조건을 거셨습니다! 벨라디 님께서 결투에서 이기면 로건 경의!”

그때였다.

“크흑!”

두 사람의 싸움이 점점 절정으로 치달았다.

로건 경은 앨턴 공작가의 기사답게 북부 특유의 검술로 우직한 방어에 집중했다. 벨라디는 그걸 예상했다는 듯이 엄청난 힘과 절묘한 스냅으로 공격을 쏟아붓고 있었다.

누가 봐도 승기는 벨라디에게로 기운 상황이었다.

“친구를 위한 의리는 갸륵하나 실력이 따라 주지를 않는군.”

벨라디의 말에 로건 경이 이를 악물었다.

“아, 아직 할 수 있습니다!”

벨라디는 로건 경의 말을 비웃듯, 사선으로 그의 검을 내리쳤다.

챙강!

순간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그의 검이 두 동강 났다. 잘린 검날이 휘리릭 날아가 바닥에 푸욱 꽂혔다.

로건 경은 눈에 띄게 당황했고, 벨라디는 그 틈을 노려 그의 배를 발로 찼다.

“컥!”

로건 경은 두 손으로 배를 감싸며 털썩 무릎 꿇었다.

벨라디는 그 장면을 보며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패배자가 두 발로 서 있는 결투도 있었나? 이쯤 되면 알아서 무릎 꿇어야지.”

벨라디의 말이 끝나자 연무장이 침묵으로 감싸였다.

곧 모여 있던 기사들이 하나둘 경악했다.

“로건 경을 압도적으로 이기시다니…….”

“그보다 벨라디 님은 여자가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저건……. 저건 사람의 몸짓이 아니야.”

“역시 벨라디 님은 천재다. 그것도 천재 중의 천재.”

마지막에 들린 한마디는 어쩐지 다른 기사들과 결이 달랐다. 멜도르는 힐끔 고개를 돌려 그 기사를 바라봤다.

본인이 다 뿌듯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그는 멜도르에게도 낯이 익은 기사였다. 벨라디를 바라보는 그의 암청색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로버처럼.

‘뭐야, 쟤도 미쳤나.’

멜도르는 인상을 팍 쓰며 그 기사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다시 벨라디가 눈에 들어왔다.

벨라디는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의 기사들을 쭉 훑어보더니,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곧 그녀의 입가에 보란 듯이 승자의 미소가 지어졌다.

맨 앞에 있던 터라 그 당당한 미소를 정면으로 마주한 멜도르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어 갔다.

‘아니야…….’

그의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아니야! 아니라고!’

멜도르는 또다시 자신의 가슴을 파고드는 이 감정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나도 미쳤나? 저 악마가 멋지다니! 이건 있을 수 없어!’

하지만 몇 번을 부정해도……!

검을 들고 있는 벨라디 앨턴은 멜도르가 동경하던 소설 속 영웅과 똑 닮아 있었다.

***

‘더너스 로건’과의 결투는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난 사전에 이미 그가 스파이와 절친한 사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더너스는 기사단장과 부단장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1기사단의 리더였고, 책임감이 강했다. 또한, 동료와의 의리를 매우 중요시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러니 틈을 보이면 반드시 내게 다가올 거야.’

난 그 틈을 위해 기사단 연무장으로 향했다. 명목은 훈련 겸 연무장의 상태 체크.

내가 연무장에 들어서자 훈련 중이던 기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벨라디 님을 뵙습니다!”

난 기사들의 인사를 간단히 받으며 연무장 안으로 향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더너스가 접근했다.

“앨턴 공작가의 제1기사단 소속 더너스 로건! 벨라디 앨턴 님께 인사드립니다!”

‘이럴 줄 알았어.’

기사단 정복을 차려입은 더너스는 완고한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난 그의 속내를 전부 알고 있지만, 부러 모르는 척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 로건 경.”

“벨라디 님께 꼭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 봐.”

내 허락에 더너스는 잠시 심호흡을 한 후, 정중한 목소리로 요청했다.

“현재 첩자로 구금 중인 돈티오 경은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부디 재수사를 해 주십시오!”

“지금 경은 그대의 주인인 내 판단을 의심하는 건가?”

엄연히 따지면 기사단은 앨턴 공작인 아버지의 것이었다. 하지만 공작의 자리를 차지하기로 한 이상, 미리미리 차기 주인은 나라고 어필해 둘 필요가 있었다.

내 물음에 더너스는 몸을 바짝 굳혔다.

“앨턴가를 섬기는 충성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더너스는 우직한 생김새처럼 말투까지 뚝심 있었다.

“저는 다만!”

“그만.”

난 느긋하게 더너스의 말을 잘랐다.

“이미 결정적 증거까지 나온 사건을 다시 조사해 달라는 것이 의심이 아니고 뭐지?”

“그건…….”

더너스는 잠시 머뭇거리다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시선에는 견고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제가 아는 돈티오 경은 언제나 앨턴 공작가를 누구보다도 충직하게 섬기는 기사였습니다. 그런 그가 첩자라니……. 무언가 오해가 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그 오해를 풀어 달라?”

“부탁드립니다, 벨라디 님!”

더너스는 간절한 얼굴로 고개 숙이며 호소했다.

난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 그 스파이가 앨턴가를 잘 섬기기는 했지.’

스파이는 호위 기사일 적, 앨턴 공작 부인인 어머니에게 잘 보이고 싶어 완벽한 기사 흉내를 내었다. 아버지와 나조차 그 모습을 딱히 의심하지 않았으니, 다른 이들은 오죽했을까.

‘특히 충성과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더너스 같은 이들이 그 스파이를 많이 아꼈어.’

스파이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었는지 전혀 모르는 채 말이다.

난 미동도 없는 더너스의 정수리를 가만히 바라봤다.

원작에 따르면 더너스도 스파이와 함께 네시아의 호위 기사가 된다. 그는 주로 네시아의 명을 묵묵히 수행하는 역할이었다.

‘딱히 내 명령을 수행할 사람이 부족한 건 아니지만.’

난 더너스 경이 필요했다.

정확히는 그가 아니라, 그의 가문인 로건 백작가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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