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K-장녀가 육아물에 빙의하면-43화 (44/197)

43.

“오랜만이네.”

뒤에는 오묘한 표정의 멜도르가 서 있었다.

‘한동안 마법에 푹 빠진 채 방에서 안 나오더니, 웬일로 먼저 말을 걸었지?’

내 인사에 멜도르가 미간을 찡그리며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누나, 너 임시 가주가,”

난 멜도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가차 없이 동그란 머리를 내리쳤다.

“악!”

멜도르가 자신의 머리를 박박 문지르며 소리쳤다.

“갑자기 왜 때려! 아프잖아!”

“누나라고 부를 거면 똑바로 불러.”

나는 멜도르의 이마를 검지로 꾸욱 누르며 경고했다.

“앞으로 호칭 뒤에 ‘야’, ‘너’ 같은 불순물 붙이는 거 용납 안 해. 그딴 어설픈 반항은 아예 하지를 마.”

눈에 힘을 주며 말하자 멜도르가 슬쩍 내 시선을 피했다.

“알겠어…….”

난 손가락을 거두며 물었다.

“무슨 일로 날 부른 거야.”

내 말에 멜도르가 풀이 죽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임시 가주가 되었다면서?”

“소식이 좀 늦었네. 맞아, 아버지의 임명장이 오늘 도착했어.”

내 대답에 멜도르는 말이 없었다.

난 그런 아이를 관찰하다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원래 이 자리는 네 것이었는데……. 내가 차지한 게 마음에 안 들어?”

멜도르는 도발하는 듯한 내 말에도 크게 발끈하지 않았다. 오히려 잠시 머뭇거리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누나는……. 후계자가 되고 싶은 거야?”

예상과 다른 질문에 난 멜도르를 빤히 바라봤다. 멜도르도 내 눈을 피하지 않았다.

어딘지 절박해 보이는 푸른 눈을 보며 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그렇다고 하면, 순순히 물러나 줄 거니?”

순간 멜도르의 얼굴에 뚜렷한 감정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녀석은 퉁명스럽게 답했다.

“……몰라.”

짧은 순간이었지만, 난 그 감정을 알아챌 수 있었다.

‘오호라…….’

멜도르가 뚜렷하게 보여 주었던 감정.

그건 바로 ‘안도감’이었다.

그걸 깨닫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너 지금 기쁜 거지?”

“뭐?”

멜도르가 눈에 띄게 놀라며 큰 소리로 되물었다.

“내가 임시 가주가 된 게 기쁘잖아. 그래서 이렇게 한달음에 달려온 거고.”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내가 그럴 리 없잖아!”

난 천천히 멜도르에게 다가갔다. 내가 가까워지자 멜도르가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난 멜도르가 벗어날 수 없게 그를 벽 쪽으로 몰았다.

“넌 언제나 후계자의 자리를 버거워했으니까.”

“아니야!”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어서 억지로 노력했지만, 항상 달아나고 싶어 했어.”

“나, 난 태어났을 때부터 앨턴가의 후계자였어! 그러니까,”

나는 멜도르의 변명을 냉정하게 끊어 냈다.

“태어났을 때부터 후계자였으니까 도망칠 기회도 잡지 못한 거야. 안 그러니?”

정곡을 찌른 내 말에 멜도르가 얼굴을 옆으로 돌려 버렸다. 하지만 그런다고 놈의 속내를 들여다보지 못할 리 없었다.

난 멜도르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멜도르는 타고난 성격도, 가지고 있는 재능도 후계자의 자리에 맞지 않아.’

아직 어리지만, 멜도르 본인도 자신의 한계를 잘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자존심은 상하는지 놈은 입술을 꾹 깨물고 있었다.

난 그런 아이를 바라보다 한 손으로 멜도르의 양 볼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고개를 휙 돌려 나를 보게 했다.

“그런데 이 누나가 임시 가주가 되었다니. 얼마나 잘된 일이야?”

“우우…….”

“겁쟁이인 널 대신해 몸소 도망칠 길을 열어 준 거잖아. 어머니도 돌아가셨으니 자신의 마음에 솔직해지렴.”

“이것 놔!”

멜도르가 내 손을 떼어 내려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난 멜도르의 얼굴을 내 쪽으로 끌고 왔다. 억지로 시선을 마주한 멜도르는 볼이 아픈지 미간을 찡그렸다.

난 그걸 무시하며 냉정하게 말했다.

“적어도 난 솔직해졌어, 멜도르 앨턴.”

“!”

“앨턴가의 후계자? 북부의 차기 주인? 난 그런 거로 중압감을 느끼는 사람이 아니거든.”

“그럼……. 누나는 이제 어떻게 할 건데.”

조금 진지해진 멜도르의 표정을 보며, 난 스르륵 뺨을 놓아 주었다.

“네 짐작대로 나는 차기 공작의 자리에 관심이 많아. 그건 애초에 내 것이었으니까.”

내 확답을 들은 멜도르의 눈이 커졌다.

난 차남에게 했던 것처럼 멜도르에게도 친절히 조언을 해 주었다.

“그러니 괜한 자존심 지키겠다고 나와 맞설 생각 하지 마. 네가 오만하고 건방지기는 해도 멍청하지는 않을 거라고, 누나는 믿어.”

이 말을 남긴 채, 나는 멜도르를 지나쳐 가던 길을 마저 걸었다. 멜도르는 생각에 깊이 빠진 것인지 나를 붙잡지 않았다.

‘원작에서도 멜도르는 권력욕이 없었어.’

오히려 본인의 위치에 만족하며 마법 연구에 몰두하던 인물이었지.

그러니 멜도르에게서 후계자의 자리를 되찾는 과정은 쉬울 것이다.

‘사실 후계자는 딱히 생각하고 있지 않았지만.’

가문 안에서 내 입지를 키우려고는 했어도, 구체적으로 후계자가 되려는 생각은 없었다. 멜도르와 아버지가 끝까지 나를 자극하면 그냥 앨턴가를 뛰쳐나와 새로운 기반을 다질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보니 아버지도 멜도르도 예상 이상으로 내게 꼼작 못 하고 있어.’

이러면 굳이 내가 앨턴가를 벗어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이곳에 끈덕지게 남아 앨턴가의 모든 것을 차지하는 게 이득이지.

물론 그러려면 내가 뛰어넘어야 할 벽이 하나 있었다.

‘법을 바꿔야 해……. 법을.’

빌어먹을 현 제국의 법에 따르면, 여자는 가문의 가주가 될 수 없었으니까.

***

과거의 제국은 지금보다 훨씬 더 가부장적인 사회였다.

하지만 그리리카 선황은 생각보다는 순탄하게 황제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왜냐?

‘전부 선황이 마법사였기 때문이지.’

이곳에서 ’마법사‘는 여러 차별을 뛰어넘는 특별한 존재였다.

그녀는 마법사였기에 여러 악조건 속에서도 세력을 모을 수 있었고, 그 세력으로 황권을 거머쥐었다. 또한 귀족들이나 제국민들의 반감도 훨씬 적게 살 수 있었다.

오히려 그녀는 평생 약자를 위해 살아온 황제로서 사람들에게 여전히 어마어마한 지지와 사랑을 받고 있었다.

‘그 후광의 여파로 그녀의 아들인 현 황제 역시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고.’

그리리카 선황이 재위 기간 동안 선보인 정책 중 가장 파격적인 건 이 두 가지.

‘평민의 의무 교육’.

‘여성의 소득 인정’.

둘 다 제국 사회에 매우 큰 격동을 일으켰지만, 나와 조금 더 밀접한 것은 ‘여성의 소득 인정’ 부분이다.

원래 제국의 여성들은 신분이나 능력에 관계없이 어떤 방식으로도 돈을 벌 수 없었다. 여자는 돈을 벌기보다는 가정에 충실해야 한다는 사상이 강했기 때문이다.

‘물론 여자도 일하며 돈을 벌 수는 있었지만…….’

소득을 인정받지 못하니 그 돈은 고스란히 집의 가장, 즉 남성에게 넘어갔다. 억울하고 더러웠지만 이게 그때 당시 제국의 법이었고, 일상이었다.

그렇다고 여자가 아예 재산을 가지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녀들이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던 단 두 가지 방법. 그건 바로 ‘증여’와 ‘상속’이었다.

그리리카 선황 역시 황녀 시절, 이 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따라서 그녀는 마법 공학으로 번 천문학적인 돈을 믿을 만한 부하에게 맡긴 다음, 그걸 다시 증여받는 형식으로 재산을 축적해야 했다.

‘그 후 황제로 즉위하고 기반이 다져지자마자 여성의 사유 재산을 억압하는 법을 뜯어고쳤지.’

이 법만 고쳤을 뿐인데, 제국 내 여성들의 인권은 조금씩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리카 황녀의 최종 목표는 ‘여자는 가주가 될 수 없다.’라는 법을 없애는 것이었다.

‘그와 더불어 여자도 자연스럽게 작위를 받을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고 싶어 했지.’

마법사가 아니어도 여자들이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를 꿈꾸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리리카 선황은 최종 목표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황제인 그녀가 품어야 할 약자들은 너무나 많았고, 대적해야 할 세력들은 생각 이상으로 견고했기 때문이다.

차라리 황녀 시절 때처럼 네 편 내 편, 편 가르기를 해서 찍어 누르면 편했을 텐데…….

균형을 지켜야 하는 황제는 그러기도 힘들었다.

‘그나마 선황이 자식 교육을 잘해서 다행이지.’

선황의 외동아들이자 현 황제인 ‘오티우스 웬넌 데커딜’.

그는 어머니의 유지를 이어받은 황제였다. 그리리카 선황이 고리타분한 법을 마구 뜯어고치는 역할을 했다면, 현 황제는 그 법을 다듬고 정착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가주 승계에 관한 법도 고쳐질 확률이 높아.’

생각해 보면 원작의 후반부에서도 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왔었다.

헤라 황녀에게 직위를 주고 싶어 하는 황제와 그럴 수 없다는 황태자의 대립. 그리고 그걸 관망하는 킬리언 2황자…….

‘음, 아닌가?’

2황자가 결국 황제의 편을 들며 황태자와 대립을 했었나?

후반부를 전부 읽은 게 아니라서 헷갈렸지만, 여하튼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었다.

‘마법사가 아닌 헤라 황녀가 직위를 얻으려면 든든한 기반이 있어야 했지.’

그래서 이번 겨울 연회 때 황제가 나를 눈여겨보고 있었던 것이고.

이렇게 봤을 때, 여러모로 현재 상황이 내게 유리했다. 난 언제 한번 황제를 만나 이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차별의 피해자면서 동시에 가해자인 누구네 어머니에 비하면 그리리카 선황은 참 급진적이면서 대단한 사람이었다. 여러 반대 세력과 싸우며 자신의 목표를 추진시키고, 그걸 후계에 물려주기까지 하다니.

‘소설 속 태평성대를 위해 이런 이상적인 황제가 나타난 걸까…….’

새삼 이곳이 소설이라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은 모를 정보들과 미래를 난 이미 알고 있으니까.

‘이 정보들을 최대한 활용해서 그 법을 없애 버리겠어.’

그리고 앨턴가를 내가 먹어 치우는 거야.

내 머리는 다시 팽팽 돌아가며 새로운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내 성년식까지 앞으로 3년. 그 안에 모든 준비를 끝마쳐야 했다.

‘앞으로의 일이 기대되는군.’

원래 벽이 높을수록 뛰어넘는 보람이 있는 법 아니겠는가.

계획대로 사람들을 배치하고 움직일 생각을 하니, 후후후 웃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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