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2층 응접실로 들어가니, 소파에 앉지도 못한 채 서성이는 더미 남작이 보였다. 차남과 비슷한 분위기의 남작은 급하게 나왔는지 평소처럼 단정한 차림새가 아니었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털썩 무릎 꿇었다.
“제발, 제발 제 아들에게 선처를 베풀어 주십시오, 벨라디 님!”
더미 남작은 내가 오기 전부터 줄곧 울고 있었는지, 눈물이 범벅 된 얼굴로 아들의 용서를 빌었다.
난 가만히 더미 남작을 내려다보다 응접실 소파에 앉았다.
“앉아서 이야기하지, 더미 남작.”
내 말에 남작이 후다닥 소파에 앉았다. 그는 앉자마자 품에서 종이봉투를 하나 꺼내 내밀었다.
“펴, 편지로 말씀하신 텔레포트 진 공동 소유 계약서입니다. 마탑의 승인도 전부 받았습니다.”
그 말에 난 봉투를 받아 안에 든 계약서를 살펴봤다. 계약서의 내용은 대강, 더미 영지에 있는 텔레포트 진의 모든 권한을 나와 공유하겠다는 것이었다.
특히 이 마지막 문구가 중요했다.
「더미 가문은 텔레포트 진의 소유를 앨턴 가문의 장녀, ‘벨라디 앨턴’과 공유하며 그녀를 공동 소유자로 인정한다. 텔레포트 진을 관리하는 마탑 본부는 이를 보증한다.」
불쌍한 더미 남작이 더 이상 마음 졸이지 않게, 난 망설이지 않고 테이블에 마련된 펜을 집었다. 그리고 계약서 두 장에 사인을 한 뒤, 한 장을 남작에게 넘겼다.
“좋은 판단이군, 더미 남작.”
‘좋아. 이제부터 동부에서 가장 가까운 텔레포트 진의 사용을 내 마음대로 제한할 수 있겠어.’
내 만족스러운 웃음에, 더미 남작의 눈이 더 간절해졌다.
난 뚜렷한 발음으로 말했다.
“예산 횡령도 모자라 주인의 보석을 도둑질한 엑트 더미의 죄는 매우 무겁지만, 남작의 정성을 봐서 죄인의 처벌을 변경하지.”
“그 그럼……!”
“엑트 더미는 가신의 직책을 박탈하고, 다시는 북부 귀족 연합에 돌아오지 못한다. 또한 더미 영지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이동할 경우 앨턴 공작가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여기까지 말한 난 선심 쓰듯 말을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엑트 더미가 부당하게 모은 재산은 전부 앨턴 공작가에서 처리한다. 불만은?”
“어, 없습니다!”
“벌금은 서면으로 공지할 테니 기다리도록.”
“아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벨라디 님!”
‘별말씀을.’
내가 내린 처벌은 횡령을 한 자들에게 내리는 평균의 처벌이었다. 그럼에도 더미 남작은 이마저도 너무나 기쁘게 받아들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차남을 감옥에 가두자마자 내가 이런 편지를 보냈으니까.
「죄인이 다시는 횡령과 도둑질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양팔을 자르는 처벌을 생각하고 있네. 다만 그대가 앞으로의 신뢰를 회복한다는 의미로 나와 텔레포트 진의 소유를 공유한다면 생각을 바꿀 수도 있어.」
처음부터 내가 아주 극단적인 처벌을 적었으니, 이 정도도 그에게는 감지덕지일 것이다.
사실 원작을 생각하면 차남은 나한테 횡령을 걸리고 여기서 컷 당한 걸 감사하게 생각해야 했다. 만약 원작처럼 놈이 몇 년에 걸쳐 총 5억 골드를 횡령했다면…….
‘죄인인 차남과 그 직계는 사형, 더미 남작가는 연좌제로 전부 몰락하고 마니까.’
난 그렇게 생각하며 계약서를 잠시 바라봤다. 내용을 급하게 적었는지, 계약서의 필체는 꽤나 흔들려 있었다.
‘그렇다고……. 더미 남작이 영지의 최고 핵심 수입원을 손쉽게 공유할 줄은 몰랐지만.’
애초에 원작에 적힌 미래는 나만 알고 있는 거니까.
이 계약서야말로 자식을 살리겠다는 아비의 마음일까? 부모와 거리가 먼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마음이었다.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고.
‘물론, 이해와 이용은 엄연히 다르지만.’
애당초 내게 필요한 건 텔레포트 진의 사용권뿐이라, 수입까지 빼앗아 갈 생각은 없다. 그러니 남작에게 큰 피해가 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때 더미 남작이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한데 어째서 앨턴 공작가가 아니라 벨라디 님과 공유하라 적으신 건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그 말에 난 피식 웃으며 응접실에서 대기하고 있던 스티아에게 계약서를 넘겼다.
“내 방에 가져다 놔.”
“예, 벨라디 님.”
그러고는 여유로이 더미 남작을 바라봤다.
“텔레포트 진의 공유는 더미 가문과 앨턴 공작가의 새로운 충성 계약이라고 볼 수 있어. 그런데…….”
난 그렇게 말하며 더미 남작 쪽으로 살짝 몸을 기울였다.
“이 행위가 자칫 귀찮은 소문으로 변질되면 골치 아파지거든.”
“아!”
“수입의 공유가 아닌 소유권의 공유일 뿐이지만, 그 소문을 믿는 자들은 이런 자세한 내막을 알려고 하지 않으니까.”
내 말에 더미 남작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공작가 전체와 텔레포트 진을 공유하면, 북부의 다른 가문들에게 소식이 퍼지겠지. 하지만 개인으로 공유하면 소문을 막을 수 있어. 그러니 공유의 범위를 나로 한정한 거야. 이해했나?”
“예, 그런 깊은 뜻이 있었군요.”
그럴듯한 내 말에 더미 남작이 감동받은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다시 한번 제게 기회를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 평생 이 충성을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그 시선을 받으며 난 속으로 피식 웃었다.
‘소문이 무서울 리가.’
사실 더미 남작가와 얽히는 소문 따위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그 정도는 내 선에서 무마시킬 수 있으니까.
하지만 처음부터 판을 짜고 더미 남작의 차남을 유인한 것은 나다. 그러니 그 보상을 나 혼자 차지하는 건 당연한 일인데, 굳이 우리 가문과 공유할 필요 있나?
무엇보다.
‘이 텔레포트 진을 지금은 가문을 위해 쓰겠지만, 수틀리면…….’
협박의 재료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니까.
여하튼 원하는 걸 전부 얻었으니, 더 이상 차남에게 볼일은 없었다. 난 즉시 놈을 풀어 주기로 했다.
“병사들에게 미리 말해 놓았으니 지하 감옥 쪽으로 가자.”
“알겠습니다, 벨라디 님.”
남작은 서둘러 소파에서 일어나 나를 따라왔다.
우리는 응접실에서 나와 지하 감옥이 있는 별관 뒤쪽으로 향했다. 그곳에 도착하니, 입구를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 나에게 경례했다.
“벨라디 님을 뵙습니다!”
“그래, 죄인을 데리고 와.”
“예!”
병사들은 재빠르게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갔다.
잠시 밖에서 기다리자 곧 병사를 따라서 계단을 오르는 차남이 보였다. 차남은 밝은 햇빛을 오랜만에 보는지 눈가를 찡그리고 있었다.
“엑트!”
내 옆에 있던 더미 남작이 허둥지둥 자기 아들에게로 달려갔다.
“아, 아버지…….”
“어쩌자고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해서 이 사달을 낸 거냐!”
남작은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아들을 타박했다. 그러면서도 차남을 자신의 품에 꼭 껴안았다.
핼쑥해진 차남의 얼굴에도 그렁그렁 눈물이 차올랐다. 그는 남작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으으, 아버지……. 너무 무서웠습니다.”
“다시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면 안 된다!”
‘참 감~동적인 부자 상봉이네.’
그걸 가만히 바라보는데, 차남이 훌쩍이며 입을 열었다.
“아버지 이 사건에 대해 꼭 말하고 싶은 게 있는,”
여기까지 듣던 난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행이군, 엑트 더미.”
내 목소리를 들은 차남이 삐거덕 고개를 돌려 내 쪽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바짝 얼어붙고 말았다.
난 싱긋 웃으며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나마 널 위해 보석금을 내어 줄 아비가 있어서 말이야.”
“…….”
차남은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차남의 정수리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괘씸하기는 하지만, 네 아비의 정성을 봐서 적당한 처벌을 내렸다.”
“……그, 그렇지만 전.”
차남이 머뭇거리며 얼굴을 올렸다. 싸늘한 내 표정을 보는 순간, 빠르게 다시 숙였지만.
난 그 모습을 가만히 주시하며 말했다.
“분명 네 죄에 맞는 합당한 처벌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내가 한 마디 한 마디 내뱉을 때마다 차남의 목울대가 크게 울렁였다.
“다시 이 지하 감옥에 갇혀 나와 독대하는 수밖에. 안 그런가, 더미 남작?”
옆에 있던 더미 남작이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벨라디 님! 제가 이놈을 잘 지켜보겠습니다! 엑트도 충분히 반성하고 있을 거고요!”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를 남작은 다시 한번 내게 감사하다는 말을 내뱉었다.
난 더미 남작에게 웃어 주며 차남 쪽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갔다. 나와 가까워지자 차남의 몸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 반응이 흡사 파블로프의 개와 같았다.
‘이 정도면 거의 반사적으로 날 두려워하는 것 같은데…….’
내가 의도했던 그대로의 반응이라, 꽤 만족스러웠다.
차남의 바로 앞에 선 난 살짝 몸을 숙였다. 그리고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몇몇 정의롭고 용감한 자들은 자신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목숨을 걸고는 하지.”
그렇게 말하며 곁눈질로 차남의 상태를 살폈다.
차남은 잔뜩 겁먹은 채로 자신의 옷자락을 움켜쥐고 있었다.
“난 자네가 그만큼 용감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러니 곱게 풀어 주는 거야.”
“으……. 으으…….”
“가까스로 부지한 목숨을 소중히 여기도록 해. 알겠나?”
“예,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벨라디 님.”
여기까지 말한 난 숙인 몸을 바로 했다. 차남은 사색이 된 채 내게 감사하다는 말만 중얼거렸다.
우리의 속삭임을 전혀 듣지 못한 더미 남작은 아들의 상태를 걱정했다.
“이런, 얼굴이 너무 창백하구나. 어서 가서 쉬어야겠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난 허락의 의미로 고개를 살짝 까딱이고는 자리를 벗어났다. 뒤에서 더미 남작이 차남을 부축한 채 마차로 향하는 소리가 들렸다.
‘쓸데없는 짓을 했다가는 황천길 갈 거라는 말, 잘 이해한 것 같지?’
내가 더 큰 보상을 위해 일을 조작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차남에게 원래 받아야 할 처벌 그 이상을 내리지는 않았다.
그러니 그도 크게 억울할 건 없을 것이다.
‘이 정도는 협박이 아니야. 진심 어린 조언이지.’
애초에 더미 가문의 차남 따위는 굳이 내가 직접 협박을 해야 할 만한 레벨이 아니었다. 그가 ‘진주를 전당포에 맡긴 적 없다! 이건 조작이다!’라고 주장해도 한 손으로 잠재울 자신 있으니까.
그런데도 굳이 차남에게 저런 말을 해 준 건, 발판이 되어 준 그를 위한 내 마지막 보답이었다.
‘차남이 내 보답을 가슴속에 잘 새겼으면 좋겠네.’
이제 지하 감옥에는 스파이만 남게 되었다.
그 발칙한 호위 기사는 또 어떻게 요리해야 완전히 발라먹을 수 있을까…….
고민하며 한적한 복도를 걷는데, 누군가가 나를 불러 세웠다.
“잠깐 나 좀 봐.”
그 말에 난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