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내 선조 되는 앨턴 공작가 출신 양반이 엄청난 것을 발견해 냈다. 바로 북부에 길게 뻗어 있는 산맥 전체에 걸쳐진, 어마어마한 크기의 철광석 광맥을 말이다.
이 철광석 광맥 중 80%가 앨턴 공작가 영지에 있었다. 관대한 내 선조들은 그 이익을 독점하지 않았다. 철광석을 판 돈의 상당 부분을 북부 귀족들에게 지원하는 데 썼던 것이다.
공작가의 돈을 바탕으로 점점 발전해 나가는 북부.
경제적으로 많은 것을 의지하게 된 북부의 가신들은 당연하게도 우리 가문에 절대적 충성을 바치게 된다.
‘지금은 그때보다 시간이 훨씬 지나서 그 충성이 전보다 못하지만.’
전쟁이 끝난 건 200년 전. 그때 태어났던 이들조차 전부 흙으로 돌아갔을 긴 시간. 그러니 이곳에 있는 가신들은 모두 가난을 몰랐다.
‘늘 해 왔던 대로 경제적인 부분을 앨턴 공작가에게 의지하면 어느 정도 먹고살 만하니까.’
난 답이 없는 스라코 자작을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왜 대답이 없지? 가주의 명령을 거부하는 가신은 필요 없다. 딱히 방해하지 않을 테니 공작가의 지원에서 자립해 알아서 살아남도록.”
“그……. 그게…….”
스라코 자작은 내가 이렇게까지 나올 줄 몰랐는지 침을 꿀꺽 삼켰다.
앨턴가의 지원이 끊기면 그들 영지의 경제는 완전히 파탄이 날 수도 있었다. 스라코 자작도 그걸 아는지 상당히 겁을 먹은 상태였다.
그는 애써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아, 아무리 벨라디 님이라고 해도 오랫동안 충성을 바쳐 온 저희 가문을 북부 연합에서 쪼, 쫓아내실 수는 없습니다. 공작님께서 결코 용납하지 않으실.”
“스라코 자작.”
난 피식 나오는 웃음을 굳이 참지 않았다.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위치의 의미를 정녕 모르겠어?”
내 말에 자작은 꾸욱 입을 다물었다.
난 눈썹을 으쓱이며 가신들을, 특히 반대의 목소리를 내던 가신들을 쭉 둘러보았다.
“이게 내가 공들에게 날리는 협박이야. 설마 어리석게도 내 협박에 맞설 자가 있는 건 아니겠지?”
내 말에 당당하게 소리치던 가신들이 침묵을 유지했다. 모두들 내 눈을 피하며 어떻게든 자신의 존재를 숨기려 했다.
이것이 아무리 가신들이 목소리 높여 내가 임시 가주직에 오르는 걸 반대해도 큰 의미 없는 이유였다.
북부 귀족들 전부를 합해도 앨턴 공작가의 상대가 되지 않는데, 깜냥도 안 되는 것들이 모여서 뭐 어쩌겠어.
‘이래서 내가 앨턴 공작가를 못 떠난다니까.’
난 씨익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오늘 회의는 임시 가주로서 날 소개하는 자리였어. 모두 알아들은 걸로 알고 이만 회의를 마치지.”
그렇게 내가 참석한 첫 가신 회의는 막을 내렸다.
***
회의가 끝난 후, 기력을 잃은 채 터덜터덜 나가려는 가신들에게 난 짓궂은 목소리로 제안했다.
“나가기 전에 아부라도 한마디씩 하고 가는 거 어때? 그렇게 하면 내가 오늘 그대들의 망발을 잊어 줄 수도 있잖아?”
내 말에 가신들이 힐끔힐끔 서로의 눈치를 봤다. 용서는 받고 싶지만, 그렇다고 먼저 체면을 구기기는 꺼려지는 모양이었다.
그때, 누구보다 빨리 내게로 달려오는 이가 있었으니…….
“임시 가주가 되신 것을 진심으로 감축드리옵니다~! 벨라디 님!”
바로 내게 제일 호되게 당했던 스라코 자작이었다.
“저 노온 스라코. 벨라디 님의 말에 언제나 충성할 것이며, 벨라디 님을 돌아가신 저희 부모님보다도 더 극진히 모시겠사옵니다!”
그는 간드러진 목소리로 거의 절을 하듯 허리를 꺾었다.
그런 자작을 보자, 다른 가신들도 앞다투어 달려와 나를 둘러쌌다.
“벨라디 님이 임시 가주님으로 임명받으신 것은 저희 북부 연합의 큰 기쁨입니다! 성실히 벨라디 님을 보필할 것을 맹세합니다!”
“벨라디 님의 명령을 가주님의 명령보다도 더 충실히 응하겠습니다! 믿어만 주십시오!”
아까는 그렇게 나를 반대했던 가신들이 지금은 간이라도 빼 줄 듯 알랑방귀를 뀌고 있었다.
그 꼴이 우스워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 그대들이 오늘 같은 건방진 짓만 하지 않는다면, 우리 사이는 무탈할 거야.”
가신들은 웃는 얼굴로 내 말이 옳다며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저 작자들 성격으로 보아 아마 속에서는 천불이 날 텐데, 낯짝도 참 두꺼웠다.
‘늙은이들이 사회생활 하나는 참 잘한단 말이야.’
내게 아부성 인사를 마친 이들이 하나둘 이곳을 떠났다.
이제 회의장에는 리켄 남작, 개러딜 외에 세 명의 가신들이 남아 있었다. 세 명 모두 나를 인정하는 소수의 가신이었다.
“허허허, 축하드립니다. 공작님께서 정말 훌륭한 결정을 하셨습니다.”
“그래요. 이제 임시 가주님도 계시고, 제 마음이 한결 편해졌어요.”
“슬슬 저희 일도 좀 줄어들겠군요.”
그들의 축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축하는 고맙지만 글쎄……. 난 내게 정해진 몫 이상으로 일을 벌일 예정이라.”
내 말에 그들이 껄껄껄 웃었다.
“이런, 일이 줄지 않는다니 안타까운 일이군요.”
“그래도 벨라디 님이 앞으로 보여 주실 것들이 참 기대가 됩니다.”
“그나저나 횡령으로 잡힌 더미 공의 처벌은 정하셨습니까?”
“흐음, 어떻게 할까.”
난 아버지에게 임시 가주로 임명받은 즉시 차남과 스파이를 체포했다. 이미 자포자기한 차남은 순순히 감옥으로 끌려갔다.
스파이는 꽤 난동을 벌였다고 들었는데, 본인이 뭐 어쩌겠는가. 제플린이 미리 준비한 덕에 놈은 금방 제압되었고, 지금은 지하 감옥에서 내 처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때 가신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더미 공은 몰라도, 그 아비인 더미 남작은 성품이 괜찮은 자입니다. 남작을 생각해서라도 더미 공의 처벌을 신중히 정하심이 어떠십니까?”
“아비의 성품이 괜찮으니 관용을 베풀어라?”
“그 관용이 후에 앨턴 가문에 더 큰 이익으로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가신의 말에 난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올렸다.
“재미있는 말을 하는군.”
나와 눈이 마주친 가신은 살짝 움찔하였으나 꿋꿋이 대답했다.
“다 늙은 제가 임시 가주님께 드릴 수 있는 건 이런 충언밖에 없습니다.”
“좋아, 어디 그 충언의 근거를 말해 봐.”
옆에 있던 개러딜이 내 대답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렇게 티 나게 안심하다니, 누가 보면 내가 가신을 잡아먹기라도 하는 줄 알겠다.
‘하긴 요즘 기강 좀 잡겠다고 여기저기에 압박을 주기는 했지.’
내가 차남을 어떻게 잡았는지 목격한 개러딜이라면 충분히 긴장할 만했다.
나름 납득하는데, 가신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더미 가문이 가진 땅은 북부의 가장 동쪽에 있습니다.”
“그렇지.”
“만약 공작님께서 조사 중인 동굴이 정말로 마법 보석 동굴이라면……. 저희는 동부에 있는 텔레포트 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흐음…….”
“맞는 말입니다.”
가신의 말에 다른 이들도 동의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제국은 짐마차와 선박 외의 마땅한 운송 수단이 없었다. 모두 텔레포트 진 때문이었다.
‘텔레포트가 있으면 손쉽게 물건을 대량 운송할 수 있으니까.’
이 텔레포트 진의 가장 큰 단점은 바로 개수였다.
수도가 있는 동부, 교역이 많은 남부에 비해 서부와 북부는 설치된 텔레포트 진의 숫자가 매우 적었다. 특히 북부는 마갈라 제국이 침략해 올 시 악용될 수 있다며 법으로 텔레포트 진의 개수를 제한했었다.
‘그리리카 선황이 그 법을 없애 주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텔레포트 진을 추가로 설치할 수 없었지.’
텔레포트 진은 원한다고 마음대로 설치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진을 설치하기 위해서는 마탑의 지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들리는 말로는 요즘 서부 연합 귀족들이 그렇게 마탑의 비위를 맞춰 준다는데…….’
그 덕분인지 서부 쪽 텔레포트 진은 그 수가 점점 증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 북부는 콧대 높은 마탑을 만족시켜 줄 만큼 풍족한 영지가 아니었다.
때문에 타 지역과의 경제력 격차는 점점 더 벌어졌고, 이런 것들이 점점 북부를 폐쇄적인 곳으로 만들었다.
‘뭐, 원작에서는 마탑주가 네시아에게 빠지면서 무료로 대량의 텔레포트 진이 설치되었지만.’
마탑주는 꼬장꼬장하기로 유명한 늙은이였지만, 네시아가 ‘할아버지~’라고 불러 주면 뭐든 다 들어주었다.
문득 이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하나 떠올랐다.
선대 공작인 내 할아버지와 마탑주가 ‘네시아의 진정한 할아버지’ 타이틀을 차지하기 위해 세기의 결투를 펼치는데…….
“벨라디 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잠시 삼천포로 빠져 있던 난 생각을 멈추고 가신을 바라봤다.
“아, 그 말도 일리가 있지.”
원점으로 돌아와서, 결국 가신의 말은 이거다.
그 귀한 텔레포트 진이 설치된 북부의 영지 중 하나가 바로 동부와 붙어 있는 더미 남작의 영지였다. 그러니 원활한 텔레포트 진의 사용을 위해서라도 더미 남작을 포섭해야 한다는 것이다.
‘확실히 철광석 운송은 마차로 커버할 수 있지만, 앞으로 발굴할 마법 보석은 절대적인 보호를 받아야 하니까.’
그러니 차남에게 너무 과한 벌을 내려 더미 남작과 척을 질 필요 없다는 걸 나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가신의 눈에 난 아직 어리고 경험이 부족해 보이겠지.
그는 내가 걱정되어 이런 조언을 했을 것이다. 그 마음을 이해하기에 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대의 의견은 잘 알겠어.”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벨라디 님.”
그렇게 훈훈히 마무리를 짓고 회의장을 나설 때였다.
입구에서 대기 중이던 로버가 나에게 다가왔다.
“벨라디 님. 말씀하신 것처럼 더미 남작이 찾아왔습니다.”
로버의 말에 개러딜이 되물었다.
“더미 남작이 찾아왔다고?”
“분명 내게는 오늘 중요한 일이 있어서 가신 회의에 참석할 수 없다고 했는데.”
리켄 남작의 중얼거림에 난 여상히 말했다.
“자식 살리러 오는 것이 가신 회의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지 않겠어?”
그러자 내게 조언을 했던 가신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미리 더미 남작을 불러내신 겁니까?”
그 물음에 난 싱긋 웃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조건부이긴 하지만, 나도 관용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니까.”
그래도 협박보다는 조건부 관용이 낫지 않아?
내 말에 모두 당황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그들을 뒤에 두고 응접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