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흠…….”
네시아의 말에 테오도르는 살짝 고민했다.
이 아이에게 벨라디의 이야기를 꺼내도 괜찮을까?
이런 테오도르의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네시아는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작님과 똑같이 생겼어요.”
그 말에 테오도르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차피 언젠가 알게 될 사이이니, 굳이 숨길 필요 없겠지.’
그는 품 안의 네시아를 고쳐 안으며 답해 주었다.
“그야 내 딸이니까.”
“딸이요?”
“그래, 벨라디 앨턴이라고 한다.”
테오도르가 아이에게 조곤조곤 속삭였다. 그러며 문득 처음 네시아를 만났던 날을 회상했다.
북부로 올라온 뒤 테오도르는 눈의 정령을 찾아 헤맸고, 그사이 아내의 생일이 다가왔다.
눈의 정령은 거기에 맞춰 테오도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고는 당연하다는 듯이 네시아를 부탁했다.
-이 아이는 도헤미아의 중요한 보물이야. 부디 소중히 아껴 주렴.
도헤미아와 똑같이 생긴 네시아를, 테오도르는 도저히 거부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자신이 거두기로 했다.
‘처음에는 그랬지…….’
그래, 분명 처음에는 자신의 아내가 떠올라 네시아를 맡았는데…….
참 이상하게도.
아이를 키우면 키울수록.
테오도르는 네시아에게서 아내가 아닌, 어린 벨라디의 모습을 겹쳐 보았다.
-공작님이랑 같이 밥을 먹어서 그런가, 더 맛있는 것 같아요!
-아버지, 이번에 같이 식사를 하고 싶은데……. 아, 선약이 있으셨군요.
-와, 생일 선물! 감사합니다, 공작님! 아침부터 계속 함께 있어 주셔서 너무너무 좋아요!
-오늘 제 생일인데, 조금은 일찍 들어와 주시면 안 될까요? ……바쁘시군요. 죄송합니다, 아버지.
해맑은 네시아를 볼 때마다 딱 저 나이 때의 벨라디가 그의 눈에 아른거렸다.
테오도르의 기억 속 벨라디는 언제나 가지런히 미소 지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을 꾹 참은 채로.
‘……내가 그 아이를 그렇게 만들었지.’
벨라디가 제게 무언가를 부탁할 때마다 자신이 어떻게 대답했더라.
-응석 부리지 마라, 벨라디 앨턴.
그 말을 들은 벨라디는 언제나 죄송하다고 말하며, 어른스럽게 행동하려 노력했다.
그걸 생각하자 그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내의 도움 없이 아이를 돌본다는 건 생각보다 더 어렵고 벅찬 일이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낯선 벅차오름과 뿌듯함이 생기기도 했다.
이런 감정을 느낄 때마다 테오도르는 제가 벨라디에게 못 해 준 것들이 자꾸 생각났다. 그래서 사실, 아이가 임시 가주직을 요구했을 때 조금 기쁘기도 했다.
‘나답지 않아.’
테오도르는 새삼 스스로가 어색했다.
뒤돌아보지 않고 언제나 앞을 향해 나아가던 자신이었는데…….
제 딸은 뭐든 혼자서 잘하니 신경 쓸 필요 없다고 여겼는데…….
어린 벨라디가 짓던 체념의 미소와 네시아의 해맑은 웃음이 자꾸만 비교되었다.
그게 계속 그의 가슴을 툭툭 건드렸다.
‘이런 건 정말……. 나답지 않군.’
태어나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아쉬운 적 없던 테오도르. 그는 본인이 느끼는 감정이 ‘후회’라는 것도 모른 채, 그저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한편, 얌전히 테오도르의 품에 안긴 네시아는 몇 번이고 방금 들은 이름을 되뇌었다.
‘벨라디, 벨라디, 벨라디.’
네시아는 계속해서 방금 본 벨라디의 얼굴을 떠올렸다.
밤하늘 같은 검은 머리에 눈처럼 하얀 피부.
보기 좋게 올라간 입꼬리와 초승달처럼 휘어진 눈웃음.
그 사이에 숨어 있던 붉은 눈동자.
‘멋있어…….’
벨라디를 떠올리는 네시아의 눈이 몽롱하게 변했다.
그런 아이를 본 테오도르는 네시아가 졸린 줄 알고 어설프게 등을 두드렸다.
‘이름도 멋있어…….’
평소라면 좋아했을 다정한 손길이 지금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네시아는 고개를 올려 힐끔 테오도르를 바라봤다.
‘공작님이랑 똑같이 생겼어.’
그리고 다시 고개를 내려 벨라디를 떠올렸다.
‘그런데……. 벨라디가 더 멋있어.’
네시아의 조그마한 머릿속에는 화면으로 봤던 벨라디의 미소가 계속 맴돌았다.
‘또 보고 싶다.’
다음에 보면 인사를 해야지. 친해지고 싶은 사람한테는 먼저 인사를 해야 한다고 셰넌이 가르쳐 줬으니까.
네시아는 셰넌의 가르침을 상기하며 테오도르의 품에 얼굴을 기댔다.
아이의 뽀얀 뺨이 어느새 붉게 물들어 있었다.
‘벨라디랑 꼭 친해질 거야.’
네시아를 탄생시킨 눈의 정령 셰넌. 그도 미처 몰랐을 것이다.
도헤미아와 똑같이 생긴 네시아가 그 확고한 취향까지 고대로 물려받았다는 것을 말이다.
***
아버지가 날 임시 가주로 임명한 지 며칠이 지났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본관 1층에 위치한 회의장 안. 내 명령대로 수도에 거주 중인 북부의 가신들을 모조리 소환한 리켄 남작이 입을 열었다.
“모두 모여 줘서 고맙소. 오늘은 중요하게 발표할 일이 있어서 여러분들을 소집했소.”
리켄 남작의 말에 자리에 앉아 있던 가신들이 한마디씩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리켄 남작님? 오늘은 회의가 있는 날도 아닌데.”
“혹시 북부에 사건이라도?”
“어허, 그런 불길한 소리를.”
“벨라디 아가씨는 왜 이곳에 있는 겁니까? 그것도 하필 저 자리에…….”
한 가신의 말에 나에게로 시선이 집중됐다.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자리는 회의장의 맨 가운데, 바로 가주의 자리였기 때문이다.
리켄 남작은 헛기침을 하며 내게로 모인 시선을 분산시켰다.
“크흠-. 자, 다들 잘 들으시오!”
남작은 오늘 막 도착한 임시 가주 임명장을 휙 펼쳐 들었다.
“테오도르 앨턴 공작님이 벨라디 앨턴 님을 임시 가주로 임명한다는 임명장이오! 앞으로 벨라디 님은 모든 가신 회의에 참석하실 것이고, 가신들 역시 벨라디 님의 말을 가주님의 말이라 생각하고 따르시오!”
리켄 남작은 미리 준비한 것인지 쉬지도 않고 말을 쏟아 냈다. 그걸 듣던 가신들은 경악하며 소리쳤다.
“예?!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입니까!”
참고로 이곳의 가신들은 크게 두 개의 부류로 나뉜다.
“아니, 벨라디 아가씨는 후계자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임시 가주라니!”
“이보게, 리켄 남작! 후계자 교육도 제대로 받지 않은 여자가 무슨 일을 한다는 거요!”
날 무시하는 다수의 무리와.
“오호라! 벨라디 님이 결국 임시 가주로 임명받으셨군요!”
“저는 그럴 줄 알았습니다.”
“이렇게 시대가 변하네요. 허허.”
날 인정하는 소수의 무리.
난 책상을 툭툭 치면서 결사반대를 외치는 가신들을 바라봤다.
‘저 고리타분한 늙은이들이 생쇼를 하는구나.’
저렇게 반대해 봤자 본인들 목만 아프지, 달라지는 건 없었다. 애초에 저놈들 인정은 기대하지도 않았고 말이다.
“당장 가주님께 연락을 드리시오, 리켄 남작!”
“가주님께서 보내신 임시 가주 임명장도 보여 드리지 않았소, 스라코 자작.”
“그래도 난 인정할 수가 없소!”
“스라코 자작 말이 맞습니다! 여자가 임시 가주라니, 북부 귀족이 온 제국의 웃음거리가 될 겁니다!”
“그렇게 따지면 선황께서도 여성이었으니, 데커딜 제국이 온 대륙의 웃음거리가 된 겁니까?”
“내가 지금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브룩스 공!”
소란스러운 회의장을 보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슬슬 이곳도 서열 정리를 해 볼까.’
난 주먹을 쥐고 책상을 내리쳤다.
쿵-!
나름 조절해서 쳤기 때문에 원목 책상에는 가벼운 금만 생겼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주위가 적막해졌다.
서로 멱살을 잡을 듯 다투던 가신들이 놀란 얼굴로 내 쪽을 주시하자, 난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할 말은 다 끝났나?”
내 말에 넋을 놓고 있던 스라코 자작이 벌컥 소리쳤다.
“무슨 짓입니까!”
“그대들에게 할애해 준 투정의 시간이 끝났거든. 이제는 내 협박을 들을 차례야.”
“혀, 협박이라고요?!”
난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날 반대하는 가신들을 눈에 새겼다.
아까는 그렇게 발악을 하더니, 막상 일대일로 눈이 마주치자 그들은 스르륵 시선을 피했다.
“담도 작은 주제에 잘도 날 인정할 수 없다 떠들었군.”
내 비웃음에 가신 몇이 주먹을 꾹 쥐었다.
하지만 용감하게 나서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나 자신은 무서워하지만, 내 성별은 무시한다라.’
그럼 그 성별조차 무시할 수 없게 만들어 줘야지.
난 가신들 중 가장 목소리가 컸던 스라코 자작을 응시했다.
“날 임시 가주로 임명할 수 없다고?”
내 말에 힐끔 가신들을 살핀 스라코 자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습니다. 역사상 그 어느 공녀도 임시 가주가 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벨라디 님이.”
난 무의미한 뒷말을 자르며 단호히 말했다.
“그럼 북부 귀족 연합에서 나가라.”
“……예?”
스라코 자작이 순간 멍해진 채로 날 바라봤다.
난 또박또박 다시 말해 주었다.
“북부 연합에서 나가라고 했다, 스라코 자작.”
거대한 땅을 가지고 있는 데커딜 제국.
제국의 수많은 귀족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영지에 따라 네 개의 연합으로 나뉘었다.
무난한 기후에 비옥한 토지가 많은 동부와 서부 지역의 연합.
바다와 인접한 영지가 많아 교역의 중심이 되는 남부 지역의 연합.
‘그리고 비싼 철광석이 대량으로 묻혀 있는 북부 지역의 연합.’
특히 북부 연합은 다른 지역보다 상하관계가 더 뚜렷했다. 왜 그런지 알기 위해서는 북부의 역사를 조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건국 초기의 북부는 철광석이고 뭐고 개발된 것이 아무것도 없는 땅이었다.
‘그저 매일매일 벌어지는 전투에 살아남느라 바빴지.’
하필이면 적대적인 마갈라 제국과 맞닿아 있는 국경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척박하고 추운 땅인데 접전지로서 싸움만 일어나니, 북부 사람들은 항상 마갈라 제국의 침입과 굶주림, 그리고 가난에 시달려야 했다.
‘그나마 앨턴 공작가가 최전방에 나서서 큰 전투들을 승리로 이끌었으니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진작 마갈라 제국의 의해 분열돼 더 힘겨운 하루를 보냈을 터였다.
하여튼 그렇게 고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정령의 중재로 대륙의 전쟁이 끝났고, 북부에는 그토록 기다리던 평화가 찾아왔다.
‘그래, 평화가 찾아오기는 했는데…….’
오랜 전쟁으로 땅은 황폐해졌고, 추위와 굶주림은 더욱 심해진 상태였다.
모두가 절망에 빠져 있었던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