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분노하는 아버지를 보며 처음 든 생각은 이거였다.
‘왜 저럴까.’
나를 가장 차별했던 어머니, 나를 제일 무시했던 멜도르. 그리고 누구보다 내게 무심했던 아버지였다.
근데 저런 반응을 보인다고?
이제 와서?
잠시 고민하는 사이, 살벌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네놈이 죽고 싶어서 환장한 모양이구나. 제국의 하나뿐인 공녀를 감히 비웃어? 그렇게 웃는 것이 좋다면 네 입을 아예 찢어 줄까?]
“우웁……. 우우우…….”
그가 내뿜는 위압감과 분노가 화면을 뚫고 느껴졌다.
그 압도적인 기세에 더미가의 차남은 찍소리도 내지 못하고 울기 시작했다. 리켄 남작과 개러딜도 잔뜩 긴장했고, 로버와 병사들 역시 사색이 되었다.
모두가 숨죽이고 있는 집무실. 유일하게 태평한 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아무리 관심이 없어도 자기 핏줄이 뺨을 맞고 오면 화가 나는 모양이지?’
이게 아니면 이유가 없잖아? 갑자기 저렇게 화를 낼 이유가.
‘아, 하나 더 있다.’
난 아버지가 네시아를 돌보며 멜도르에게만 죄책감을 느낄 줄 알았다.
그런데 아마……. 내게도 그런 감정을 느낀 모양이었다.
‘그래서 새삼 나에게 신경을 쓰는 거고.’
여기까지 생각한 난 비집고 올라오는 비웃음을 잘 갈무리했다.
아버지는 네시아를 통해서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
아버지의 작은 관심 하나에도 순수하게 기뻐하던 딸은 이제 여기 없는데.
‘진작에 나를 좀 봐 주지 그랬어요, 아버지. 진작에…….’
아니, 이런 말은 더 이상 의미 없다.
난 이제 아버지의 인정을 갈구하던 아이가 아니라, 오로지 나만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이니까.
아버지의 때늦은 변화가 어이없고 가소로웠지만, 내 머리는 빠르게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저 정도로 화를 내니, 어머니의 진주는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되겠어.’
아버지의 초점이 내게 맞춰져 있는 게 지금은 더 유리하니까.
머릿속 계산이 막 끝났을 무렵, 형형한 눈빛으로 차남을 노려보던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저놈의 처벌을 결정했다. 당장 지하 감옥으로 끌고 가서,]
“잠시만요.”
난 아버지의 말을 끊고 불쑥 끼어들었다.
그러자 집무실의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바라봤다. 어느 가문이든 가주의 말을 끊어 내는 무례는 허용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난 확신했다.
‘아버지는 이제 날 탓하지 못해.’
그가 지난 시간을 반성하고 정말 내게 미안해한다면 앞으로 내가 무슨 짓을 하든 터치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어쩌겠어. 아버지 혼자 멋대로 죄책감을 가지셨으니, 내가 또 이용해 줘야지.’
내 당당한 태도에 아버지도 살짝 놀란 눈치였다.
난 아버지를 마주 보며 말했다.
“더미 공은 아버지가 아닌 절 모욕했습니다. 그러니 그에 대한 처벌도 제가 직접 내리길 원합니다.”
[네가 처벌을 결정하겠다고?]
“예, 아버지. 더미 공뿐만 아니라 앞으로 저택의 모든 이들을 제가 직접 관리하고 싶어요.”
내 말에 아버지가 잠시 침묵했다.
그는 날 빤히 보다가 물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하는 말이겠지?]
“그럼요, 아버지. 가주 권한의 일부를 제게 양도해 달라는 뜻이에요.”
가주 권한의 일부 양도.
이건 즉, 나를 임시 가주로 임명하라는 뜻이기도 했다.
“베, 벨라디 아가씨.”
직접적인 내 요구에 오히려 리켄 남작이 당황한 모양이다.
난 곁눈질로 남작을 보며 말했다.
“남작이나 브룩스 공은 이번 횡령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인정하시나요?”
내 말에 남작과 개러딜이 순순히 수긍했다.
“……예, 제 불찰이 큽니다.”
“저 또한 더미 공을 너무 믿었습니다.”
“지금 저택에는 두 사람보다 더 냉정한 눈으로 사람을 관리하고 처벌할 자가 필요합니다. 전 제가 그 적임자라고 생각해요.”
[흠…….]
아버지가 잠시 입을 다물고 고민했다.
난 그 고민의 쇠사슬을 끊어 줄 또 다른 카드를 입에 올렸다.
“사실 더미 공 말고도 제가 처벌할 수 없는 죄인이 한 명 더 있어요.”
[더 있다고?]
아버지의 되물음에 리켄 남작과 개러딜이 잠시 서로의 눈을 바라봤다. 곧 개러딜이 입을 열었다.
“설마 저택 내의 소문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벨라디 님?”
“브룩스 공도 들으셨군요. 맞아요, 그 소문은 제가 퍼트렸어요.”
[무슨 말인지 처음부터 보고해라.]
아버지가 인상을 찡그리며 명령했다.
난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저택 내부에 배신자가 있었어요. 황태자 측의 첩자가 되어 정보를 유출하려고 했죠.”
[첩자라고?]
“그게 누군지 아세요, 아버지?”
난 피식 웃으며 아버지를 바라봤다. 그러자 아버지는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호위 기사요. 어머니를 연모했던 호위 기사가 상실감에 미쳐 앨턴가를 배신했습니다.”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화면 너머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쾅-!
그리고 연결되었던 화면이 뚝 끊겼다.
“아니, 영상구가!”
리켄 남작은 서둘러 책상 위 자수정을 살펴봤다. 자수정에는 커다란 금이 가 있었다.
그걸 본 남작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이거 아무래도 공작님 쪽에서 연결을 끊어 버린 것 같군요.”
“제 말의 파급력이 좀 크기는 했죠.”
아까의 소리로 유추해 보건대, 본인 책상 하나는 망가트리지 않았을까? 나와 아버지는 순간의 화를 식히는 방법이 똑같으니까.
그때 남작이 책상 서랍에서 새로운 자수정을 하나 더 꺼내었다. 자수정은 은은하게 빛나고 있는 상태였다.
“공작님이 다시 연락하셨습니다.”
“곧바로 연결하세요.”
내 말에 남작은 부서진 자수정 옆에 새 자수정을 놓았다. 마력을 부여하자 아까와 똑같은 화면이 허공에 생겨났다.
화면 속 아버지의 표정은 매우 험악했다.
[그 괘씸한 새끼는 지금 어디에 있지?]
그렇게 말하는 아버지는 아까와는 다른 방향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화면에 보이는 마호가니 책상은 두 쪽으로 갈라져 있었고 말이다.
‘아버지도 그 호위 기사가 싸하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나 보군.’
난 그렇게 생각하며 여상히 답했다.
“기사단에서 열심히 훈련을 받고 있겠죠.”
[첩자인 걸 아는데도 가만히 놔두었다고?]
“전 기사나 가신 같은 고급 인력을 처벌할 권리가 없으니까요.”
내 말에 이를 아드득 갈던 아버지가 잠시 멈칫했다.
난 그런 아버지를 보며 자세를 바로 했다.
“저를 임시 가주로 임명해 주세요, 아버지. 그러면 그 호위 기사를 비롯해 앨턴가를 갉아먹는 벌레들을 전부 처리하겠어요.”
내 말에 아버지는 뜻을 알 수 없는 눈으로 날 바라봤다. 나 역시 그의 시선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잠깐의 침묵 후, 곧 아버지의 입이 열렸다.
[…네 뜻대로 해라.]
그 말에 난 진한 미소로 화답했다.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리켄 남작이 조용히 속삭였다.
“축하드립니다, 벨라디 아가씨……. 아니, 이제는 벨라디 님이라고 해야겠군요.”
남작의 옆에 있던 개러딜도 내게 고개를 숙이며 예를 취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벨라디 님.”
‘좋았어.’
난 둘의 축하를 받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원래 앨턴 공작가 같은 대영지를 다스리는 가주들은 몸이 두 개라도 부족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임시 가주를 임명해 자기 대신 수도로 보내거나 영지로 보내는 경우가 빈번했다.
이런 임시 가주는 보통 후계자가 맡았고 말이다.
‘원작에서도 후계자인 첫째 아들이 임시 가주가 되어 북부로 향했지.’
하지만 난 후계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이렇게 원작과는 다른 방식으로 임시 가주직을 차지해야 했다.
‘이제 앨턴가의 수도 저택은 모조리 내 통제 아래야.’
가신도, 기사도, 보좌관도 모두 내 손아귀에 들어왔다. 게다가 임시 가주는 이 외에도 여러 권한들을 행사할 수 있었다.
난 그것들까지 전부 아낌없이 이용할 생각이었다.
‘아버지가 예상보다 수월하게 내 뜻을 따라서 다행이네.’
역시 죄책감 때문이려나?
이걸 이용하면 아버지 역시 내 입맛대로 마음껏 주무를 수 있을 것이다.
‘이대로 평생 내게 죄책감을 가지셨으면.’
물론, 아버지와의 사이를 개선할 의향은 눈곱만큼도 없지만 말이다.
“그럼 수도에 있는 가신들을 불러 제가 임시 가주로 임명되었다는 것을 발표할게요.”
[그래, 임명장은 곧 보내 주마.]
“절 믿어 주셔서 감사해요, 아버지. 실망시키지 않을게요.”
난 아버지에게 활짝 웃어 보였다.
내 미소에 아버지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벨라디……]
그때였다.
[우와.]
화면 너머로 갑자기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아버지가 휙 옆을 바라봤다.
[네, 네시……!]
여기까지 말한 아버지는 우리와 옆을 번갈아 보더니 허둥지둥 화면을 꺼 버렸다.
피웅-.
둥둥 떠 있던 화면이 사라지고, 리켄 남작과 개러딜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봤다.
“방금 들으셨습니까, 남작님?”
“그래, 들었네. 어린아이의 목소리였지?”
‘네시아로군.’
어렵지 않게 목소리의 정체를 추측한 난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바라봤다. 둘은 의문에 빠진 듯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지금은 네시아가 중요한 게 아니야.’
“그럼.”
난 일부러 목소리에 힘을 주며 말했다.
“그대들은 지금 당장 가신들을 소환하도록 해. 그리고 내가 임시 가주로 임명받았다는 증인이 돼 줘야겠어.”
확 달라진 내 말투에도 노련한 리켄 남작과 개러딜은 당황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당장 본인들의 눈앞에서 내가 더 높은 위치에 올랐으니까.
이곳은 그런 게 당연한 계급 사회였다.
“예, 벨라디 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그렇게 답하며 공손히 고개 숙이는 둘을 보자, 드디어 맞는 옷을 입은 듯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 이거지.’
역시, 나는 하대가 체질이었다.
***
네시아는 사라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런 작은 아이를 테오도르는 살짝 안아 들었다.
“네시아, 허락 없이 상대의 방에 들어오는 건 예법에 어긋나는 짓이다. 특히 내 집무실은 더더욱.”
“죄송해요, 공작님. 큰소리가 나서 저도 모르게…….”
그 말에 테오도르는 살짝 머쓱해졌다. 그 큰 소리는 호위 기사에 대한 보고에 화가 난 자신이 주먹을 휘두르다 낸 소리였기 때문이다.
테오도르는 네시아가 볼 수 없도록 몸을 기울여 자신이 두 쪽을 내 놓은 책상을 가렸다.
“시간이 늦었는데 왜 아직까지 깨어 있는 거지?”
“오늘은 제가 혼자 자고 싶다고 졸랐어요. 다른 분들은 일을 하러 가셨구요.”
그 말에 테오도르는 한숨을 쉬었다.
네시아의 존재는 아직 비밀이었다. 때문에 아이를 케어하는 건 북부 성의 집사와 하녀장, 그리고 자신밖에 없었다.
문제는 집사도 하녀장도 테오도르 못지않게 바쁘다는 거였다.
테오도르는 네시아를 잘 안아 들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내가 재워 주마. 가자.”
“공작님.”
“왜 그러지?”
“아까 누구예요?”
그렇게 묻는 네시아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