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난 그렇게 말하며 반지를 낀 손가락을 흔들었다. 저택 창고에서 찾은 그 유리 반지였다.
“두 분 다 이게 뭔지는 아실 거라 믿습니다.”
반지가 잘 보이도록 그들 쪽으로 손을 뻗었다.
내 동작에 리켄 남작이 안경을 치켜들며 외쳤다.
“그건 진실과 거짓을 구분해 준다는 정령의 보물 아닙니까!”
“저것이 정령의 보물이라고요?”
역시, 박학다식한 리켄 남작이라면 이 반지를 단번에 알아볼 줄 알았다.
반대로 개러딜은 처음 본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 반응에 나는 미소 지으며 반지를 설명했다.
“맞습니다. 이 반지는 상대방이 거짓을 말하면 초록색으로 빛나지요. 그러지 않는다면 빛나지 않습니다.”
난 그렇게 말하며 엎어진 차남에게 다가갔다.
내 행동에 차남의 얼굴에 처음으로 희망이 피어올랐다. 본인의 억울함을 풀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난 그걸 보며 피식 웃었다.
‘이걸 너한테 사용할 리가.’
난 차남을 지나쳐 뒤에 있는 남자에게로 향했다.
“이미 횡령이 확정된 죄인의 말은 들을 가치가 없고……. 제 기사가 데리고 온 증인에게 물어보도록 하지요.”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얄팍한 인상의 남자는 잔뜩 겁에 질린 채 날 올려다봤다.
공손히 무릎 꿇은 남자를 보며 난 반지 낀 손을 내밀었다.
“두 귀가 있으니 내가 한 말은 다 들었겠지?”
“예, 예!”
“넌 한 치의 거짓 없이 진실만 말해야 한다.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그러자 리켄 남작과 개러딜이 입을 다물고 내 목소리에 집중했다.
“일단 넌 누구지?”
“저, 전 엑스 용병단의 사설 금고 겸 전당포의 총책임을 맡고 있는 트라라고 합니다.”
“저 진주와 관련된 차용증을 작성한 게 본인 맞나?”
“네! 제가 작성했습니다!”
“진주가 누구의 것인지는 알고 있었고?”
“아닙니다! 전 단지 진주를 담보로 천만 골드를 빌려준다는 계약만 했을 뿐입니다!”
남자의 말은 모조리 사실이었기에 반지는 미동도 없었다.
난 반지의 효과를 더 확실히 어필하기 위해 유도신문용 질문도 던졌다.
“넌 이 진주가 욕심이 나서 덥석 차용증을 쓴 거지? 일단 손에 넣고, 모조품을 만들 생각으로?”
열심히 질문에 응하던 얄팍한 인상의 남자가 움찔거렸다.
“아, 아, 아닙니다…….”
그러자 반지가 초록색으로 빛났다.
그걸 본 리켄 남작과 개러딜의 안색이 점점 굳어 갔다. 남자의 얼굴도 사색이 되었다.
난 힐끔 그들의 표정을 확인한 후 조용히 미소 지었다.
“마지막 질문이다. 진주를 네게 맡기고 돈을 받은 자가 누구냐.”
“저, 저자!”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남자가 서둘러 차남을 지목했다.
“엑트 더미 공이었습니다! 엑트 더미 공이 직접 이 진주를 맡기러 왔고, 담보로 천만 골드를 요구했습니다!”
남자는 아까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서인지 필사적으로 내가 시킨 말을 반복했다. 반지는 빛나지 않았다.
난 그걸 보며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이게 바로, 원작에서 첫째가 발견한 이 반지의 최대 약점이었다.
‘이 반지는 상대의 거짓말만 잡아낼 수 있거든.’
그 말은 즉, 아무리 거짓이라고 해도 말하는 대상이 진실이라고 믿는다면 반지는 빛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난 약점도 내 입맛대로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만.”
내 한마디에 얄팍한 인상의 남자가 입을 합 다물었다. 난 고개를 돌려 차남을 노려봤다.
“저 순진한 얼굴과 눈물로 리켄 남작님과 브룩스 공을 현혹하려 들다니. 가증스럽기 짝이 없군.”
“우우우우웁-! 우웁!”
그 모습에 차남이 몸을 격하게 꿈틀거리며 괴상한 소리를 냈다.
그는 순박한 인상이 무색하게 찢어 죽일 듯한 눈으로 얄팍한 남자를 노려봤다. 그 시선에 난 병사 몇을 보며 명령했다.
“증인에게 이제 볼 일은 없으니, 저택 밖으로 내보내.”
내 명령에 옆에 있던 로버가 물었다.
“저자에게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으셔도 괜찮겠습니까?”
난 한쪽 눈썹을 까딱이며 남자를 내려다봤다.
“너 계속 나랑 엮이고 싶니?”
내 말에 남자는 감히 나와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넙죽 엎드렸다.
“아, 아닙니다. 살려, 살려만 주십시오. 죽을 때까지 오늘 일을 함구하겠습니다.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싹싹 빌며 울먹이는 남자의 모습에 난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로버도 고개를 끄덕였다.
“내보내.”
“예!”
“우우웁! 우우우웁!”
병사들이 남자를 끌고 가자 차남이 목에 핏줄을 세우며 소리쳤다. 난 그런 차남을 보며 살기를 띠고 말했다.
“시끄러워.”
그 말에 미친 듯이 소리치던 차남의 몸이 딱 굳었다.
나와 시선이 마주친 그는 아까처럼 사지를 벌벌 떨더니 이내 몸을 웅크렸다. 본인의 억울함보다는 나를 향한 공포심이 더 큰 모양이었다.
‘전부터 나를 어린 여자라고 깔보더니, 꼴이 우습게 됐군.’
한편, 리켄 남작과 개러딜은 연신 한숨을 쉬며 착잡해했다.
“하아, 저 귀한 진주를 훔쳐서 무려 천만 골드나 욕심냈다니!”
“더미 공이 돈을 좋아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그들은 심란함과 배신감이 섞인 얼굴로 의논을 하고 있었다.
“더미 남작에게 이 일을 어떻게 알려야 하나…….”
“그나저나 처벌도 문제입니다. 공작님의 답장을 기다리는 동안 더미 공을 저렇게 구속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착실히 내 예상대로 말하는 두 사람을 보며 난 쾌재를 불렀다.
“리켄 남작.”
내 부름에 남작과 개러딜이 동시에 날 바라봤다.
“북부와 연결된 영상구를 작동시키세요.”
내 말에 남작이 눈이 커졌다.
“하지만 아가씨. 영상구는 일회용입니다. 그러니 아주 긴급할 때가 아니면 사용하지 않고요.”
“맞습니다, 남작. 그러니 영상구를 작동시키세요.”
난 단호한 목소리에 리켄 남작은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는 내 말의 의미를 이해한 모양이었다.
리켄 남작이 영상구 작동을 준비하는 사이, 개러딜이 내게 되물었다.
“영상구는 전쟁 시에나 사용되었던 긴급 연락 장치입니다. 벨라디 님께서는 지금이 그만큼 긴급한 때라고 생각하십니까?”
“전쟁은 이제 일어나지 않습니다, 브룩스 공.”
내 말에 개러딜이 잠시 멈칫하고 날 바라봤다. 난 그의 시선을 덤덤하게 받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긴급함의 기준은 엄연히 바뀌어야 하지요. 브룩스 공, 지금 꼴을 보세요.”
난 그렇게 말하며 차남 쪽을 바라봤다.
초반부터 내가 기를 완전히 꺾어 놓은 탓에 차남은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바닥에 누워 있었다.
“엄연히 범인이 있고 증거가 있는데, 가주가 없다는 이유로 우리는 저 작자를 감옥에 넣을 수 없습니다.”
“하, 하지만 그것만으로 영상구를 작동시키는 건…….”
“저 작자는 리켄 남작과 브룩스 공. 그리고 아버지의 믿음 아래 이 저택에 상주하게 되었지요.”
내 말에 개러딜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건…….”
“그렇게 반년도 채 안 됐는데, 횡령을 저질렀습니다. 그 횡령을 잡은 건 제 공이었고요.”
내가 뼈를 때리자, 개러딜은 말이 없었다.
“브룩스 공과 리켄 남작은 부하 관리에 완전히 실패한 겁니다. 난 이제 모든 가신이 의심쩍어요. 이래도 긴급한 상황이 아닌가요?”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개러딜이 수긍하기 무섭게, 리켄 남작이 입을 열었다.
“작동 완료했습니다, 벨라디 아가씨.”
그 말에 난 고개를 돌려 리켄 남작의 책상 쪽을 바라봤다. 책상에는 내 손가락만 한 자수정이 놓여 있었고, 자수정 위에 커다란 화면이 둥둥 떠 있었다.
“이제 북부와 연결될 때까지 기다리시면 됩니다.”
“수고했어요.”
이 네모난 화면이 바로 영상구의 효과였다.
영상구는 영상 마법이 담겨 있는 마법 보석을 말한다. 이걸 이용하면 같은 보석을 가지고 있는 상대방과 화상 통화가 가능했다.
‘한 번 사용하면 영상 마법을 버티지 못하고 보석이 깨져 버리는, 아주 값비싼 일회용이지만.’
그래서 영상구는 앨턴 공작가 같은 고위 귀족들이나 몇 개 갖추고 있었다.
아버지는 북부로 떠나기 전, 가장 신뢰하는 부하인 리켄 남작에게 영상구 몇 개를 넘겼다.
난 그걸 알고 있었기에, 당당하게 영상구를 작동시키라 말한 것이고.
‘아버지가 연결을 받아 줘야 할 텐데.’
내 걱정이 무색하게 화면에는 익숙한 얼굴이 떠올랐다.
[무슨 일이지?]
오랜만에 보는 아버지였다.
여전히 잘난 얼굴이었지만, 턱도 더 날카로워졌고 다크서클도 살짝 보이는 것이 전보다 수척해 보이는 몰골이었다.
‘네시아를 돌보는 게 만만치 않은 모양이군.’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작님.”
“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리켄 남작과 개러딜이 예를 갖추었다.
“잘 지내셨나요, 아버지?”
마지막으로 내 인사에 아버지의 붉은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벨라디? 네가 왜…….]
난 한 걸음 앞으로 나가 화면 속 아버지와 눈을 마주했다.
“아버지께 요구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영상구를 작동했어요.”
[요구?]
난 고개를 끄덕이며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을 바라봤다.
“저놈을 데리고 와.”
“예, 벨라디 님!”
병사들은 웅크리고 있던 차남을 질질 끌고 왔다.
“읍! 우웁! 웁웁!”
차남은 끌려가고 싶지 않은지 거세게 저항했지만, 억센 병사들의 손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아버지는 요란하게 등장하는 차남을 보며 인상을 썼다.
[저자는 더미 남작의 차남 아니냐.]
“먼저 죄송해요, 아버지.”
내 사과에 아버지가 날 바라봤다.
“귀족을 조사하기 위해서는 가주의 허락이 필요하지만, 그사이에 증거라도 인멸될까 봐 제가 임의로 더미 공을 체포했어요.”
[귀족을 조사한다고? 저자가 무슨 죄라도 저질렀나?]
“예, 아버지. 리켄 남작을 도와 저택 외부의 일을 관리하라고 뽑은 더미 공이……. 괘씸하게도 저택의 예산을 횡령했습니다.”
내 말에 리켄 남작과 개러딜이 착잡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 또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횡령? 그 더미 남작의 아들이?]
이쯤 되면 저들에게 더미 남작은 도대체 어떤 이미지인지 궁금해졌다. 무슨 성자라도 되는 건가?
속마음을 감춘 난 입꼬리를 반듯하게 올리며 웃었다.
“아시잖아요, 아버지. 자식과 부모가 반드시 닮은 건 아니라는 걸.”
내 의미심장한 말에 아버지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말을 이었다.
“이자는 명백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귀족이라는 이유로 체포를 거부했습니다. 오히려 저 같은 공녀에게는 그런 권한이 없다며 절 비웃고 모욕했죠.”
내 말에는 약간의 과장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내가 그렇다는데 뭐 어쩔 거야?’
심지어 그때 상황을 다 봤던 병사들과 로버조차 기억이 조작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억울한 건 또 차남뿐이었다.
그때 아버지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을 보였다.
[감히……. 내 딸한테 그딴 짓을 했다고?]
난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아버지는 화면을 뚫고 나오기라도 할 기세로 크게 분노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