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네가 날 가르치려 들어? 감히?”
주변의 공기가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
제플린을 제외한 모두가 숨을 헉 들이켜며 몸을 굳혔다.
차남은 대답 대신 고통에 찬 신음만 내뱉었다.
“끄으윽…….”
그래도 나름 힘을 조절했기에 기절하지는 않은 듯했다. 난 그걸 관찰하며 입을 열었다.
“그래, 아버지와 리켄 남작은 더미 가문을 믿고 널 이 저택에 머물게 했지.”
손가락 사이로 차남과 시선이 마주쳤다. 난 서슬 퍼런 눈으로 그 눈을 응시했다.
“그런데 너 따위가 그 영광을 짓밟고 저택의 돈을 빼돌려?”
얼굴을 움켜쥔 손아귀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 통증 때문인지, 아니면 날 향한 공포심 때문인지 차남의 두 눈에 서서히 눈물이 고였다.
“……베, 벨라디 님……. 오해……. 오해입니다.”
더듬더듬 차남이 내뱉는 말에 난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방금 네놈 책상 밑에서 횡령 장부를 발견했다. 그러고도 오해라.”
내 말에 맞춰 로버가 자신이 들고 있는 장부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것까지 본 차남의 온몸이 파들파들 떨리기 시작했다.
난 살기를 띠며 그런 차남의 모든 걸 주시했다. 그러자 놈은 숨을 헐떡이며, 사지가 굳은 것처럼 꼼짝을 못 했다. 마치 포식자 앞에 선 피식자처럼.
난 그걸 보며 이를 아득 갈았다.
‘생각해 보니 열 받네.’
애당초 이놈의 횡령은 예상하고 있었다. 거기다 더 확실한 효과를 위해 내가 직접 일까지 부풀렸다.
‘그렇게 부풀리기는 했지만…….’
미우나 고우나 앨턴 공작가는 결국 내 가문이었다.
그리고 난 내 것을 건드리는 새끼들이 세상에서 제일 괘씸했다.
“주인을 배신한 대가는 각오했겠지?”
난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지 않고 그대로 표출했다.
내 기세에 완전히 꼬리를 만 차남이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 잘못했습니다.”
한번 말문이 트이자 차남은 싹싹 내게 자비를 빌었다.
“욕심에 제가 눈이 멀었습니다.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차남의 처진 두 눈에서 굵은 눈물 줄기가 주르륵 흘렀다.
무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난 한 글자 한 글자 새기듯 말해 주었다.
“앨턴 공작가는 배신자를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
난 그렇게 말하며 얼굴을 움켜쥔 손을 풀었다.
풀썩-.
손을 놓자마자 힘이 풀린 차남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자유를 찾은 차남의 얼굴은 핏기가 전부 사라진 상태였다.
“헉, 허억.”
이윽고 그는 몸을 웅크린 채 숨을 몰아쉬었다.
난 그 꼴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지금이 쉬는 시간인 줄 아나.’
내가 또 괘씸한 죄인이 한숨 돌리는 꼴은 못 보거든.
난 손을 뻗어 차남의 뒷덜미를 확 낚아챘다.
“으윽!”
“공의 말이 맞긴 맞아. 귀족을 관리하는 건 가주인 아버지의 몫이지.”
난 그렇게 말하며 거침없이 집무실 입구로 향했다. 내게 목덜미가 잡힌 차남은 질질 바닥에 끌렸다.
“공의 충고대로 아버지를 봬야겠군. 지금 당장 말이야.”
“크으윽! 제발! 벨라디 님……!”
내게 제대로 겁을 먹은 차남은 차마 손을 놓아 달라는 말은 못 하고 버둥거렸다. 난 그런 차남을 무시하며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저놈도 데리고 따라와.”
난 제플린이 증인으로 데리고 온 남자를 지목했다.
나와 시선이 마주친 남자는 바로 눈을 내리고 손을 덜덜 떨었다.
“네, 벨라디 님!”
병사들이 무릎 꿇은 남자를 일으켜 세웠다.
난 내 옆으로 온 제플린에게도 조용히 다음 명령을 내렸다.
“넌 기사단에 가서 첩자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준비를 해.”
“오늘 안에 일을 끝내실 겁니까?”
“그래.”
“명대로.”
제플린은 소리 없이 걸음을 바꿔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뒤를 힐끔 보니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로버도 종종종 내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것까지 확인한 후, 난 목적지를 향해 성큼성큼 발을 옮겼다. 그걸 보던 병사 몇이 안절부절못하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벨라디 님. 그러다 귀한 몸이 상하시겠습니다. 죄인은 저희가 끌고 가겠습니다.”
난 병사를 바라보지도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이건 내가 할 일이야. 아까의 재갈은 잘 챙겼나?”
“예.”
“좋아. 내가 신호를 보내면 엑트 더미에게 그걸 물리도록 해. 움직이지 못하도록 더 강하게 구속해도 좋다.”
내 명령에 병사들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벨라디 님!”
그사이에도 차남은 몇 번이나 내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다.
물론 그의 필사적인 저항은 내 발걸음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자, 그럼 오늘의 하이라이트로 가 볼까.’
내가 이런 요란스러운 퍼포먼스를 하는 건, 이 꼴을 보여 줘야 할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난 거침없이 리켄 남작의 집무실로 향했다.
원래 리켄 남작은 아버지의 최측근 보좌관이기에 5층에 집무실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새로 온 가신들은 별관에 집무실을 얻었고, 동선의 간편함을 위해 본인도 이곳으로 집무실을 옮긴 참이었다.
‘덕분에 나도 편하게 이동하네.’
이 상태로 본관 5층까지 가는 건 거추장스러웠을 테니까.
곧 리켄 남작의 임시 집무실에 도착하자 뒤따라오던 로버가 눈치껏 문을 열었다. 활짝 열린 문 너머로 적당한 넓이의 집무실이 보였다.
리켄 남작은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날 발견한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벨라디 아가씨. 연락도 없이 여기까지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로버의 말대로 리켄 남작의 옆에는 개러딜 브룩스도 함께 있었다.
개러딜은 멜도르의 스승인 브룩스 경의 동생으로 차남과 같이 저택에 상주 중인 가신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벨라디 님. 그런데 뒤에 있는 건…….”
개러딜의 말에 난 가차 없이 끌고 온 차남을 내팽개쳤다.
“크흑!”
“아니, 더미 공!”
“세상에, 이게 무슨 일입니까!”
놀란 두 사람은 서둘러 바닥에 엎어진 차남에게 향했다.
난 그 광경을 무미건조하게 보며 입을 열었다.
“두 분 다 그 뻔뻔한 자에게서 떨어지세요.”
“예?”
“뻔뻔하다니요?”
난 시선을 내려 더미 가문의 차남을 응시했다. 사색이 된 차남은 자신의 뒷덜미를 보호하며 몸을 쭈그렸다.
그 반응에 둘은 더욱 의아한 표정으로 내 대답을 기다렸다.
“저자가 저택의 예산을 횡령했습니다.”
“더미 공이 횡령이라고요?”
두 사람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로버에게 말했다.
“그 장부를 보여 줘.”
“예, 벨라디 님!”
뒤쪽에 있던 로버가 후다닥 리켄 남작과 개러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내내 들고 있던 차남의 횡령 장부를 내밀었다.
두 사람은 얼굴을 맞대고 장부의 내역을 확인했다. 차남이 워낙 상세하게 적어서 굳이 설명을 덧붙일 필요도 없어 보였다.
“맙소사……. 이게 정말입니까?”
“하아, 공작님의 신임을 이렇게 되돌리다니, 엑트 자네.”
둘의 한탄에 차남의 목이 시뻘겋게 변했다. 이런 면에서는 뻔뻔하지 못한지, 차남은 입을 굳게 다물고 얼굴조차 들지 않았다.
그때 개러딜이 조심스레 내게 말했다.
“횡령은 확실히 중죄지만, 공작님도 없으신데……. 이 정도의 액수로 이렇게 과격히 체포해도 되는지 걱정이 좀 됩니다.”
그 말에 난 개러딜을 보며 반듯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확실히 그렇지요.”
그러며 로버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로버가 공손히 진주 상자를 내 손 위에 올려놓았다. 난 그 상자를 그대로 둘에게 넘겼다.
“이것도 확인하세요.”
내 행동에 리켄 남작이 쓰고 있던 안경을 올리며 상자를 받았다.
그리고 신중하게 안에 든 것을 확인했다.
“이건…….”
리켄 남작과 개러딜은 단번에 진주가 누구의 것인지 알아챈 눈치였다.
개러딜은 안에 접힌 차용증을 서둘러 펼쳤다. 차용증의 등장은 상당히 파격적이었는지, 그의 안색이 대번에 굳었다.
“이게 사실입니까!”
아까와는 확연히 다른 반응에 리켄 남작도 차용증을 살폈다. 그리고 충격을 받은 듯, 잠시 몸을 비틀거렸다.
“이, 이……! 엑트 더미! 이 배은망덕한 놈!”
언제나 평온했던 리켄 남작의 표정에서 처음으로 노여움이 느껴졌다.
그 반응에 이상함을 느꼈는지 차남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리켄 남작이 들고 있던 차용증을 차남의 얼굴에 집어 던졌다.
“어떻게! 어떻게 사람이 이따위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리켄 남작의 노성과 바닥에 떨어진 차용증에 차남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닙니다!”
차남은 매우 억울한지 제자리에서 펄떡 뛰었다.
“이건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 이 차용증도 진주도 전부 거짓입니다!”
차남이 두 손으로 기어와 내 발치에서 통곡했다.
“벨라디 님! 벨라디 님, 전부 잘못된 일입니다! 누명이에요! 누군가 절 모함하려고 하는 겁니다!”
그래, 누군가 널 모함하려고 일을 꾸몄겠지.
‘누가? 내가.’
난 검은 속내를 숨기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다기엔 증거도 정황도 너무 많은데?”
엑트 더미는 보석을 보관할 별관의 가구 공사를 진행하며 횡령을 저질렀다. 그러니 보석과 아예 연관이 없다고는 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거기에 내 보석보다는 죽은 사람의 유품이 더 큰 효과를 발휘할 테니, 특별히 어머니가 가장 아꼈던 보석을 이용하기로 했다.
어차피 내가 착용하지 않는 이상, 계속 보석 창고 모퉁이에 처박힐 어머니의 진주…….
‘그러니 이런 식으로라도 내게 도움이 되어야 가치가 있지 않겠어?’
이 와중에 내게는 가능성이 없어 보였는지, 차남은 개러딜과 리켄 남작에게 달려가 본인의 억울함을 토했다.
“리켄 남작님! 브룩스 공! 전 공작 부인께 진주가 있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제발! 제발 한 번만 절 믿어 주세요!”
이 이상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지 않게 다시 입을 막을 차례였다.
난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을 보며 고개를 까딱였다.
‘물려.’
내 신호를 알아들은 병사들이 재빠르게 차남에게 달려갔다.
“제가 횡령을 하려고 한 건 맞웁!”
때마침 차남이 초 치는 소리를 하기 직전, 병사들이 그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구속구로 몸까지 꽁꽁 묶어 두었다.
난 병사들에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줬다. 내 미소를 본 병사들은 칭찬받았다는 걸 눈치챘는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우우웁!”
그 거친 행동에 리켄 남작과 개러딜이 흠칫 몸을 굳혔다.
난 그걸 보며 방긋 웃었다.
“죄인 주제에 너무 시끄러워서.”
내 말에 리켄 남작이 떨리는 손으로 진주 상자를 닫더니 책상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그리고 본인의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엑트가 이런 짓을 했다니…….”
“우웁! 우우웁!”
리켄 남작의 한탄에 차남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 몸부림이 너무나 처참했다. 순박한 눈망울에서 눈물이 주룩주룩 흐르는 모습이 묘하게 동정심을 자극하는 모양이었다.
개러딜이 조금은 마음 약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저렇게 부인하는데, 말이라도 들어 볼까요?”
그러자 난 느긋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럼 마법의 힘을 사용해 보도록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