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베, 벨라디 님!”
로버가 헐레벌떡 내게로 달려왔다. 때마침 알렉산더와 평원 질주를 끝내고 마구간에 도착한 참이었다.
난 말에서 내리며 물었다.
“엑트 더미가 밖으로 나갔니?”
“예! 벨라디 님의 말씀대로 표정이 험악했습니다!”
“그래?”
영문도 모를 차용증과 그 액수 때문에 기겁을 했겠지.
난 피식 웃으며 옆에 있던 제플린에게 명령했다.
“병사들을 데리고 그놈 잡아 와.”
“예, 벨라디 님.”
제플린은 절도 있게 고개를 숙인 후, 신속히 움직였다.
난 알렉산더를 쓰다듬었다.
“또 올 테니까 사고는 적당히 쳐야 한다, 알렉.”
이제는 내게 오롯이 복종하는 알렉산더가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푸르릉-.
난 마구간지기에게 알렉산더를 맡긴 다음, 로버를 바라봤다.
“자, 그럼 로버.”
“네!”
“넌 나를 따라와.”
그렇게 말하며 난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내 빠른 보폭에 로버 또한 부지런히 발을 놀렸다.
“저기, 근데 벨라디 님. 토를 달려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왜 더미 공을 그렇게 신경 쓰시는 겁니까?”
로버의 질문에 난 여상한 목소리로 답했다.
“놈이 저택의 예산을 횡령했다.”
그러자 헉헉거리며 나를 쫓아오던 로버가 펄쩍 뛰었다.
“네에?! 더미 공이요?!”
로버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어버버거리기만 했다. 그러다 당황스러운 마음을 추슬렀는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정말 더미 공이 횡령을 했을까요? 그 더미 남작의 아들인데요?”
더미 가문의 가주인 더미 남작은 싸움을 싫어하고 수더분한 인물이었다.
그런 남작의 성격을 잘 아는 로버는 그 아들이 횡령했다는 말이 영 이해가 안 가는 표정이었다.
난 흘깃 로버를 바라봤다. 내 시선이 닿자, 로버는 순식간에 입을 다물고 찍소리도 내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벨라디 님.”
그가 다급히 내게 사과했다. 자신의 질문이 주제넘었다는 사실을 인지한 모양이었다.
확실히 로버는 오랫동안 더미 부자와 친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고작 차남의 표정 변화만으로는 내 말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다.
이게 로버와 제플린의 뚜렷한 차이점이었다.
‘제플린은 감시자답게 내가 하는 일에 의문을 표하지 않지만, 이놈은 따르기는 하면서 궁금한 점은 못 참아 하지.’
애초에 로버에게 엄중하고 은밀한 명령을 내릴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난 로버의 호기심을 관대하게 넘어가기로 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 아버지와 리켄 남작도 너처럼 생각했으니까 엑트 더미를 믿고 저택으로 불렀을 테지.”
내 태도에 로버가 감동받은 눈으로 날 바라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저택 별관에 마련된 차남의 임시 집무실 앞에 도착했다. 문고리를 잡자 고리가 수월하게 돌아갔다.
‘정신이 없기는 없었나 보네.’
얼마나 급했는지, 차남은 집무실 문을 잠그지도 않았다. 덕분에 난 손쉽게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집무실에 들어가자마자 망설임 없이 차남의 책상으로 향했다. 책상 위에는 여러 서류와 펜들이 뒹굴고 있었다.
난 그걸 거들떠보지도 않고 책상 반대 면으로 손을 뻗었다.
“베, 벨라디 님?”
뒤따라온 로버가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굳이 대답하지 않고 반대 면을 몇 번 더듬으니 손끝에 무언가 다른 재질이 만져졌다.
‘역시 여기에 숨겨 뒀군.’
난 그걸 확 잡아 뜯었다. 아니나 다를까 차남이 숨겨 놓은 횡령 장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원작은 이런 점이 참 좋아.’
내가 수고스럽게 찾지 않아도 원하는 정보가 다 담겨 있잖아?
차남이 가지고 있던 용병단 사설 금고의 열쇠는 무엇인지, 그리고 정해 놓은 암호는 뭔지. 굳이 알아보지 않아도 전부 알 수 있으니, 차용증도 무난히 차남에게 보낼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원작에서 차남은 자신이 숨겨야 할 서류들을 이렇게 책상 반대 면에 붙여 놓았다.
돈은 금고에 맡길 수 있지만, 자신의 약점은 남에게 맡길 수 없다는 조심성 많은 성격 탓이었다.
“멍청하기는.”
그렇게 조심성이 많을 거면, 애초에 남의 돈을 탐내면 안 됐지.
난 횡령 장부를 펼쳐 내용을 살폈다. 안에는 차남이 이번 별관의 가구 공사를 진행하며 어떻게 돈을 빼돌렸는지, 참 자세하게도 적혀 있었다.
대강 확인을 끝낸 후, 그걸 로버에게 넘겼다.
“들고 있어.”
“아, 넵! 혹시 이게 횡령의 증거입니까?”
“궁금하면 살펴봐도 좋아.”
내 말에 로버가 슬쩍 장부를 펼쳐 보았다. 그리고는 차근차근 내용을 읽더니, 이내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이, 이……! 이 나쁜 자식! 감히 벨라디 님을 속이다니!”
팔락팔락.
장부를 넘기며 내역을 살핀 로버가 아까보다 더 펄쩍 뛰며 성질을 냈다.
“더미 공이 이런 자식일 줄 몰랐습니다! 앨턴가의 가신이면서 어떻게 은혜도 모르고! 설마 더미 남작도 한 패입니까?”
머릿속에 체포된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죽기 살기로 뛰어다녔던 더미 남작의 모습이 스르륵 떠올랐다.
“……아니, 더미 남작은 아니야.”
더미 남작은 그저 아들이 멍청한 죄로 말년이 불우할 불쌍한 아비일 뿐이었다.
난 잡생각을 지우며 로버에게 물었다.
“리켄 남작은 어디에 있지?”
“지금쯤이면 브룩스 공과 휴식을 취하고 있으실 겁니다.”
“그럼 둘이 함께 있겠군.”
“네! 불러올까요?”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조금 이따 내가 찾아갈 거니까.
그때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곧 차남의 집무실 문이 열리고 제플린과 병사들이 들어왔다. 그 뒤로는 입이 막히고 두 손이 결박된 차남이 끌려왔다.
차남을 보며 피식 웃는데, 뒤에 처음 보는 남자 역시 결박당한 채로 끌려오고 있었다.
난 얄팍한 인상의 남자를 빤히 바라봤다. 내 시선에 곁으로 다가온 제플린이 입을 열었다.
“용병단 사설 금고의 책임자라고 합니다. 증인으로 끌고 왔습니다.”
이렇게 말한 제플린이 내 귓가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 속삭였다.
“그때 진주를 직접 받고 차용증을 작성한 놈입니다.”
“진주는?”
“챙겨 왔습니다.”
제플린은 그렇게 말하며 품 안에서 진주가 담긴 상자를 꺼내 내게 넘겼다.
난 별말 하지 않고 그 상자를 받아 열었다. 안에는 제플린이 작성했을 차용증과 진주가 담겨 있었다.
어머니의 진주는 처음 상태 그대로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상처 하나쯤은 생겨도 좋은데.’
뭐, 애초에 그건 기대 안 했으니.
난 진주에서 눈을 떼 얄팍한 남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병사들에게 반항하던 남자는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확 몸을 굳혔다. 그 행동이 본능적으로 자신의 위기를 직감한 동물 같았다.
“잘했어, 제플린.”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잘 끌고 왔네.
내 칭찬에 제플린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난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엑트 더미는 나중에 심문할 테니 저리로 치우고, 저 증인이라는 놈을 데리고 와.”
“예, 벨라디 님!”
병사들이 집무실 구석으로 차남을 끌고 가고, 얄팍한 인상의 남자는 내 앞에 놓았다.
“으으읍!”
차남이 몸을 버둥거렸지만 훈련을 거친 병사들의 손을 피할 수 없었다.
얄팍한 인상의 남자는 다리에서 힘이 풀렸는지, 무릎을 꿇은 채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난 남자를 붙잡고 있는 병사에게 고갯짓을 했다. 내 신호를 알아차린 병사가 그의 입을 막고 있는 재갈을 풀었다.
“누, 누구…….”
남자가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난 그런 남자를 보며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살고 싶지?”
그 말에 남자가 확 고개를 숙여 내 눈을 피하더니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분수에 맞지 않게 너, 너무 과한 욕심을 부렸습니다. 하, 하, 한 번만 살려 주십시오!”
상황 파악이 빠른 모양이었다. 다른 말을 듣지도 않고 곧바로 잘못을 시인하는 걸 보니.
‘그런 면에서 아직도 반항 중인 차남보다 낫네.’
난 힐끔 저 구석에서 씩씩거리는 차남을 바라보다 다시 얄팍한 인상의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돈을 빌려주고 진주는 보관만 했다고 하면,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았어?”
조곤조곤한 내 말에 남자가 고개를 마구 저었다.
난 진주가 담긴 상자를 닫았다.
탁-.
그 소리가 무슨 사형 선고라도 되는 듯, 고개를 젓던 남자의 어깨가 크게 떨렸다.
난 그 떨림에서 무심하게 눈을 떼 진주 상자를 로버에게 넘겼다.
로버도 나름 눈치가 있는지라, 이번에는 아무런 의문도 표하지 않고 묵묵히 상자를 받았다.
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살고 싶으면 네가 본 그대로만 말해.”
“예, 예?”
난 한층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였다.
“엑트 더미가 직접 이 진주를 맡기러 왔다. 이걸 담보로 천만 골드를 요구했다……. 사실이잖아?”
내 말에 남자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하니 내가 누구인지는 바로 파악한 모양이고…….
고위 귀족과 엮이면 본인 목숨만 위험해지는 걸 아는지, 놈은 연신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왜 욕심을 부려서.’
물론 그 욕심은 내가 부추긴 거지만.
그리고 이 모든 건 단 하나를 위해서였다.
난 남자에게서 눈을 돌려 차남을 응시했다. 차남은 여전히 기세등등하게 몸부림치고 있었다.
난 그 옆에 있는 병사에게 말했다.
“입에 재갈 풀어.”
“예!”
병사 한 명이 차남의 입에 물린 재갈을 풀었다.
풀리자마자 차남이 소리쳤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입니까, 벨라디 님!”
차남은 얼굴이 빨개지고 목에 핏대가 서도록 외쳤다.
“전 이 제국의 귀족이며, 북부 연합의 일원입니다! 앨턴 공작님의 명으로 몸소 수도까지 내려와서 충성을 바치고 있단 말입니다!”
난 그 말에 답하지 않고 유유히 걸음을 옮겼다. 당연히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차남의 앞이었다.
“이렇게 경우 없는 짓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당장 병사들에게 말해 이 결박을 풀라고 하십시오!”
내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차남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그 얼굴에는 언뜻 비웃음이 서려 있었다.
“혹여 제게 죄가 있다고 해도! 그렇다고 해도 벨라디 님 단독으로 절 조사하실 수 없습니다! 아직 어려서 잘 모르시나 본데, 함부로 귀족을 체포하시면!”
거기까지였다.
놈이 구구절절 말을 늘어놓는 사이, 난 차남의 지척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단번에 놈의 얼굴을 움켜잡고 뒤로 밀쳤다.
쾅-!
차남의 뒤통수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벽에 부딪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