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처, 천만……!”
제플린의 대답에 남자가 기겁하며 연거푸 헛기침을 했다.
제플린은 그걸 보며 태평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안 되나?”
“그, 그것이……. 저희 측에서도 처음 듣는 금액이라…….”
“허허허, 내가 다 아는데. 자네들이 천만 정도는 단번에 빌려줄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걸.”
“그건 그렇지만…….”
“자, 이 진주들을 보게. 이것들은 다른 업자에게 팔면 억은 거뜬히 나올 것들이야.”
제플린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 진주는 장물아비들에게 팔아도 1억은 거뜬히 넘길 진품이었다.
하긴, 당연한 말이었다.
‘이건……. 이건 앨턴 공작님이 공작 부인을 위해 경매에 직접 참가해 낙찰받은 보석이니까.’
그때 테오도르가 지불한 금액이 무려 6억 골드였다. 그걸 생각하면 제플린 역시 가슴이 떨렸다.
벨라디는 도대체 무슨 심정으로 돌아가신 공작 부인의 보물을 이용하려는 걸까? 제플린으로서는 도통 모를 일이었다.
다만 그가 할 일은…….
‘아무런 의문 없이, 주인이 내민 임무를 완수하는 것에 있다……!’
이런 비하인드를 모를 얄팍한 인상의 남자는 조용히 제플린의 말에 동의했다.
“확실히 저도 전당포를 하며 여러 보석들을 감정해 봤지만……. 이런 최상품은 처음입니다.”
“혹여나 내가 돈을 못 갚게 되더라도 자네들은 이익이지. 이런 보석이 어디 돈만 있다고 구매할 수 있는 물건인가?”
이것 역시 사실이었다. 보통 이런 최상품의 보석들은 제일 먼저 귀족들의 손에 넘어가니까.
그것도 평민은 평생 눈도 마주치지 못할 제국의 고위 귀족들!
간혹, 간 큰 도둑들이 고위 귀족의 보석을 하나 훔치면 암흑의 루트로 풀려 나는 경우도 있었다. 그 경우가 매우 적어서 그렇지.
보석을 훔치는 데 성공하는 것도 일이지만 그 보석을 훔친 자도, 구매한 자도 말로가 상당히 처참했기 때문이다.
그걸 알면서도 남자의 눈이 욕심으로 빛났다.
“이것……. 저희에게 문제가 되는 건 아니겠지요?”
용병단 금고를 오랫동안 관리해 온 남자는 눈앞의 단골을 잘 알고 있었다.
북부 더미 남작가의 차남.
돈 욕심 하나로 이 더러운 웅덩이에 몸 담갔지만, 겁은 많아서 나름 신중한 사내. 저런 작자가 이만한 보석을 무슨 방도 없이 훔쳤을 리 없었다.
사내의 추측에 근거를 더해 주듯 차남, 아니 제플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자세한 건 말해 주지 못하지만, 문제 생기지 말라고 이렇게 담보로 내놓는 것 아닌가. 그게 아니었다면 업자에게 팔았겠지.”
확실히, 무슨 일이 생겨도 자신들은 돈을 빌려주고 가지고만 있었다고 하면 될 뿐. 아무것도 몰랐다고, 오히려 자신들은 피해자라고 하면 그냥 넘어갈 수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남자는 금고를 지키고 있던 이에게 속삭였다. 남자의 속삭임을 듣던 덩치 큰 사내는 고개를 끄덕인 후 잠시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사이 남자가 제플린을 보며 웃었다.
“좋습니다. 그럼 먼저 차용증을 작성하실까요?”
“일 처리가 빨라서 좋군.”
“저희는 속도가 생명이지 않습니까. 다만 담보가 워낙 비싸니 이율을 평소보다 더 높게 책정하겠습니다.”
“허허허, 좋네.”
남자가 데스크에 배치된 차용증 두 장에 액수를 적은 후, 제플린 앞에 내밀었다.
연기를 잘하는 것은 물론 필체까지 곧잘 따라 쓰는 제플린은 내용은 잘 읽어 보지도 않고 서명란에 사인을 했다.
그걸 확인한 남자가 탐욕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차용증 하나를 제플린에게 넘겼다. 때마침 덩치 큰 사내가 가방을 하나 들고 나타났다.
쿵-.
사내가 가방을 데스크에 올리자 묵직한 소리가 났다. 얄팍한 인상의 남자는 모노클을 벗으며 가방을 열었다.
달칵.
소리와 함께 거대한 가방이 열렸다. 안에는 금괴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엑트 님께서 워낙 금을 선호하시니 이렇게 준비했습니다. 어디, 한번 확인하시겠습니까?”
“허허허, 괜찮네. 우리가 그럴 사이인가? 그리고 이것.”
제플린은 이렇게 말하며 받은 차용증을 다시 사내에게 건넸다.
“이건 지금이 아니라 삼 일 뒤에 우편으로 보내 주게. 주소는 적어 주지.”
“우편으로 말입니까?”
“그래. 그리고 저 금괴도 너무 무거우니 일단은 내 금고 안에 보관하겠네. 자, 여기 내 열쇠.”
제플린은 이렇게 말하며 아까 술집 주인에게 보여 줬던 만년필을 내밀었다.
그걸 받아 든 사내는 익숙하게 만년필의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펜촉이 아니라 복잡한 형태의 열쇠가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는 그걸 덩치 큰 사내에게 넘기며 웃었다.
“확실히 많이 무겁기는 하지요. 알겠습니다, 이 금괴 역시 저희가 잘 보관하고 있을 테니 필요할 때 와 주세요.”
덩치 큰 사내가 금괴가 든 가방과 만년필을 받아 들었다.
대기하고 있던 또 다른 사내는 묵직한 쌍여닫이형 문을 열어 주었다. 그러자 문틈 사이로 좌르륵 금고들이 나열된 넓은 방이 얼핏 보였다.
덩치 큰 사내가 그중 가장 큰 금고를 열고 금괴를 보관하는 것을 보며 제플린은 웃었다.
‘역시 벨라디 님의 말대로야.’
제플린이 요구하는 것들은 모두 벨라디가 지시한 것들이었다.
벨라디의 지시 사항을 들으며 제플린이 한 가지 의견을 표했다.
-엑트 더미가 하지 않았던 짓을 하면 그쪽에서 의심할 수도 있습니다.
-안 그럴걸?
벨라디는 제플린의 말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천천히 기울였다.
-아마 진주 생각에 다른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거야. 그치들도 차남처럼 욕심에 눈이 먼 부류니까.
과연 벨라디의 말은 옳았다.
제플린이 분명 평소의 차남과 다른 요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얄팍한 인상의 남자는 아무 의문 없이 전부 들어 주었다.
그러면서 연신 진주가 담긴 상자를 힐끔거리는 꼴이 퍽 우스웠다.
‘역시 우리 벨라디 님! 사람을 보는 통찰력도 남다르시다……!’
그 광경을 보며 제플린은 다시금 주접을 떨었다.
자신의 주인이 그리고 있는 그림이 무엇일지 너무 기대가 되었다.
***
엑트 더미는 오늘도 설렁설렁 서류를 바라보며 하이에나처럼 어디 돈 뜯어먹을 구석이 있나 찾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엑트의 임시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똑똑-.
그 소리에 탐욕스러운 손길로 서류를 뒤지던 엑트가 작게 헛기침을 한 후, 입을 열었다.
“들어오세요.”
그렇게 말하는 엑트의 얼굴은 어느새 순박한 인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실례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들어온 이는 앨턴 공작가에서 일하는 하녀였다.
그녀는 책상으로 다가오더니 엑트에게 편지 한 통을 내밀었다.
“더미 님 앞으로 편지가 하나 도착해서요.”
“허허허, 그렇군.”
엑트가 다정한 목소리로 편지를 받았다.
그 웃음이 어디 시골 마을의 푸근한 빵집 주인 같아서 하녀는 자신도 모르게 경계를 풀고 마주 웃었다.
“그럼 저는 이만.”
“그래, 전달해 줘서 고마워요.”
다시 문이 닫히고 집무실에는 엑트 혼자만 남게 되었다.
엑트는 습관처럼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아버지께 참 고맙다니까.’
엑트는 아버지와 닮아 순박한 자신의 얼굴이 꽤 마음에 들었다. 그동안 이 인상 덕분에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고 수월히 돈을 빼돌릴 수 있었다.
물론, 더미 남작이 쌓아 올린 무해한 이미지 역시 엑트의 횡령에 큰 도움이 되었다. 최근에는 순진한 공녀님을 속여 한탕 했고 말이다.
‘앨턴 공작님도 참. 어디 그런 새파랗게 어린 계집애에게 내부 살림을 맡기신 건지.’
그러니 자신같이 속이 시꺼먼 놈한테 눈 뜨고 돈을 도둑맞은 거 아니겠는가.
‘앞으로 두고두고 그 공녀한테서 돈을 뜯어야지.’
예산 서류를 처리하는 것만 봐도 이래저래 틈이 많아 보였다. 그러니 별관 가구 때처럼 조금씩, 야금야금 돈을 빼돌리면 아무도 그의 횡령을 모를 것이다.
정작 누구의 속이 제일 시꺼먼지 전혀 알지 못할 엑트는 그렇게 벨라디를 비웃었다.
‘그나저나 편지라…….’
엑트는 하녀가 놓고 간 편지 봉투를 살폈다. 봉투에 적힌 송신인에는 익숙한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건 용병단에서 보낸 건데…….’
내가 그들한테 받을 편지가 있었나?
……혹시 금고에 무슨 문제라도?
엑트는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어 서둘러 편지 봉투를 찢었다.
그리고 안에 든 내용을 본 순간.
“차용증?!”
벌떡 일어나는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최근 용병단에게 돈을 빌린 적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차용증이라니! 심지어 거기에 적힌 액수는 엑트의 상상을 초월하는 금액이었다.
“처, 천만이라고?!”
혹시 차용증이 잘못 온 게 아닌가 살펴봤지만, 아무리 봐도 적혀 있는 이름은 자신의 이름이었다.
거기에 맨 아래 적힌 사인까지 자신의 것과 똑같았다.
“말도 안 돼!”
무언가가 크게 잘못되었다.
엑트는 서둘러 걸어 놓은 겉옷을 입고 편지를 꽉 쥔 채 집무실을 뛰쳐나갔다. 당장 용병단에 가서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확인할 심산이었다.
그렇게 엑트가 뛰쳐나가고.
잠시 뒤, 복도 기둥 뒤에서 액트의 집무실을 살펴보고 있던 검은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림자는 엑트가 완전히 저택 밖으로 나간 걸 확인한 후, 종종종 걸음을 옮겼다.
‘벨라디 님의 말씀대로 정말 더미 공이 움직였어!’
-며칠 내로 엑트 더미에게 편지가 하나 도착할 거야. 넌 그 집무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놈이 자리를 비우면 내게 알려.
-알겠습니다, 벨라디 님. 하지만 굳이 더미 공을 감시하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왜? 또 내 말에 토를 달고 싶어서 묻는 거야?
-히익! 아닙니다! 절대 그런 거 아닙니다!
-농담이야.
그렇게 말하던 벨라디는 한쪽 입꼬리를 피식 올렸다.
-나갈 때 그 작자의 얼굴을 잘 봐 봐. 온화했던 평소와 다르게 표정이 마구 일그러져 있을 테니까.
벨라디의 말처럼 엑트는 평소의 엑트가 아니었다.
집무실을 뛰쳐나가는 그의 얼굴은 전혀 다른 사람이라 봐도 좋을 만큼 사납게 일그러져 있었다.
‘지금 당장 알려야 해……!’
그렇게 생각한 그림자는 걸음을 서둘렀지만, 몸에 밴 예법은 착실히 지키고 있었다.
그는 바로 벨라디의 완벽한 심복이 된 로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