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K-장녀가 육아물에 빙의하면-32화 (33/197)

32.

마침 의심 가는 놈이 한 명 있었다.

그놈은 원작에서 앨턴 공작가를 원망하고 미워했으니, 스파이가 될 가능성은 충분했다. 반지를 사용하면 쉽게 자백을 받아 낼 수 있을 테고.

놈을 잡으면 어떻게 요리할까 고민하던 중, 더 재미있는 아이디어 하나가 내 머릿속을 스쳐 갔다.

‘……그래. 이런 일에 굳이 반지를 쓸 필요 없잖아?’

이건 감시자들을 이용해 볼 좋은 기회였다.

난 당장 스파이를 잡아 처벌해 버리겠다는 계획을 수정한 후, 에밀리를 불렀다.

“부르셨어요, 벨라디 님.”

“에밀리, 이리로 와 봐.”

난 힐끔 반지를 보며 물었다.

“넌 앨턴가의 소식을 밖으로 빼돌린 적 없지?”

“그럼요, 벨라디 님. 전 언제나 앨턴 가문과 벨라디 님께 충성을 다할 뿐입니다.”

반지는 빛나지 않았다. 기대했던 결과를 보자 만족스러운 웃음이 나왔다.

그래, 충직한 에밀리가 날 배신할 리 없지.

난 기분 좋은 목소리로 에밀리에게 명령을 내렸다.

“밤이 되면 입이 가볍고 소문내기를 좋아하는 이들 몇 명을 응접실로 모아 놔. 이 저택에서 일한다면 누구든 상관없어.”

“입이……. 가벼운 자들이요?”

무릇 사용인들은 입이 무거워야 오래 살아남지만, 어디든 그렇지 않은 이들이 존재하는 법이다.

난 이들도 활용할 생각이었다.

“그래, 비밀리에 데리고 와.”

보통 주인이 사용인을 은밀히 불러낼 때면 과묵하고 믿음직한 사람으로 고른다. 은밀하게 불렀다는 것 자체가 조심스러운 일을 시킨다는 뜻이니까.

그런데 내가 정반대의 주문을 하니, 에밀리는 살짝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베테랑답게 필요 이상의 궁금증을 드러내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벨라디 님.”

시간이 지나고 그날 밤.

2층 응접실로 향하니 몇몇 사용인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난 소파에 털썩 앉으며 그들을 바라봤다.

“이 아이들이니?”

내 물음에 뒤따라왔던 에밀리가 공손히 답했다.

“예, 벨라디 님. 명하신 대로 저택 내에서 가장 입을 잘 놀리는 아이들로 모았습니다.”

“그래, 수고했어.”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사용인들은 두 손을 모은 채 고개를 숙였다.

“부, 부르셨습니까. 벨라디 님.”

내가 별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그들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곳에 모인 건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 표정들이었다.

난 손에 낀 반지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 중 앨턴 공작가의 내부 사정을 밖으로 유출한 자가 있나?”

이 말을 듣자 사용인들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내 질문을 이해했는지 입을 크게 벌리며 경악했다.

“아, 아닙니다!”

“제가 말하는 걸 좋아해도 어떻게 공작가의 일을 밖에 퍼트리겠어요!”

“저도 아닙니다! 한 마디도 뻥긋한 적 없습니다!”

“믿어 주세요, 벨라디 님!”

기겁하며 부인하던 이들을 보며 난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알겠으니 호들갑 그만 떨어.”

내 한마디에 요란스럽던 사용인들이 서둘러 입을 다물었다.

저 난리에도 반지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럼 저들의 말이 사실이라는 뜻이었다.

‘하긴, 스파이로 삼기에 너무 촐싹대지.’

아까 부인하는 것만 봐도 그들이 어떤 성향의 사람들인지 감이 왔다.

난 사용인들을 보며 살짝 입꼬리를 올리고는 그들을 향해 작게 손짓했다.

“이리 가까이로 와.”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다 주춤주춤 내게로 모여들었다.

난 가까이 다가온 사용인들에게 조곤조곤 속삭였다.

“소문을 하나 퍼트려. 저택에 배신자가 생겼고, 내가 증거를 찾고 있다고 말이야.”

내 명령을 들은 사용인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래도 에밀리에게 주의를 받았는지 섣불리 되묻지는 않았다.

잠시 눈을 깜빡이던 이들은 곧 자신들이 불려온 게 벌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명령을 부여받기 위함임을 깨닫고는 당당한 목소리로 답했다.

“맡겨 주세요, 벨라디 님!”

“예! 그런 건 제 전문입니다!”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게요!”

난 그들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 내일부터 바로 실행하렴. 이만 가도 좋아.”

내 축객령에 눈치 빠른 에밀리가 그들을 응접실 밖으로 내보냈다.

난 소파에 등을 기대며 후후 웃었다.

‘스파이로는 무리지만, 바람잡이로 삼기에는 안성맞춤이야.’

자, 이제 스파이가 어떻게 나오나 지켜볼 차례였다.

***

앨턴가의 저택에서 일하는 사용인들에게는 절대 허용되지 않은 불문율이 하나 있다.

‘저택 밖에서 함부로 입을 놀려서는 안 된다.’

저택 내부에서는 사용인들끼리 정보 공유 차원에서 여러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살짝 부풀린 소문이 만들어져도 괜찮았다.

소문과 이슈들은 고된 사용인들의 일상에 몇 안 되는 즐거움이었고, 관대한 앨턴가의 주인들은 그런 것들을 눈감아 주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런 소문들은 일일이 잡기에도 불가능했고 말이다.

그러나 주인들의 관대함은 내부에서만 허용된 것.

아주 사소한 정보나 작은 소문이라도 저택 외부에 유출될 경우, 그건 명백한 배신으로 취급됐다.

앨턴가의 주인들은 실수든, 고의든 소문을 유출한 자를 반드시 색출했다. 그리고 냉정하고 가혹한 처벌을 내렸다.

그렇기에 아무리 입이 가벼운 자라도 외부에서는 철저하게 말을 단속했다. 이것이 앨턴가에서 일하는 사용인들이 쉽게 바뀌지 않고, 새로운 이들을 쉽게 고용하지도 않는 이유였다.

그리고, 수도에서 가장 폐쇄적인 공간으로 뽑히는 앨턴 공작가의 저택. 그 저택의 어느 한적한 복도에서 한 남자가 거의 뛰다시피 걷고 있었다.

남자의 가슴은 다시없을 만큼 두방망이질 치고 있었다.

‘헛소문이야.’

그는 조금 전, 저택의 병사들이 떠들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들었나? 이번에 배신자가 나왔다는군.

-뭐? 배신자라고?”

-허, 참. 어느 미친놈이 입을 잘못 놀렸나 보네.

-우리한테 괜히 불똥이라도 튀는 거 아니야?

-이 사람아. 그냥 잘못 놀린 수준이 아니야. 아예 작정하고 정보를 유출한 모양이더라고!

-작정했다고?

-그래! 쉽게 말하자면,

“첩자가 있다는 거지!”

병사와 똑같은 말을 하는 낯선 목소리에 남자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남자는 서둘러 복도 벽에 바짝 붙어 몸을 숨겼다. 살짝 고개를 내밀고 코너를 살피니 창가 쪽에 하녀 세 명이 서 있었다.

“첩자라니!”

“무서운 소리 하지 마! 실수로 말해도 그 처벌을 받는데, 첩자면……. 으으!”

그 반응에 하녀 한 명이 혀를 찼다.

“나 같은 소식통이 헛소문을 말할 것 같아?”

“하긴……. 네가 과장은 좀 해도 거짓말은 하지 않지.”

“어머, 그럼 진짜 첩자가 있다는 거야? 벨라디 님은 알고 계시는 거고?”

‘벨라디 앨턴…….’

상전의 이름이 언급되자 소식통이라는 하녀가 휙휙 주변을 살폈다.

남자는 들키지 않도록 기척을 죽였다. 다행히 하녀는 그가 있는 걸 눈치채지 못하고 조용히 속삭였다.

“알다마다? 그게 누구인지도, 누구의 사주를 받았는지도 다 알고 계신대.”

‘그럴 리 없어!’

남자는 하녀의 말을 격하게 부정했다.

자신이 얼마나 세밀하고 은밀하게 움직였는데, 이렇게 금방 들킬 리가! 이제야 막 첩자다운 정보를 하나 빼돌렸을 뿐이다.

바로 벨라디 앨턴이 후계자인 멜도르 앨턴을 꺾고 저택의 완전한 실세가 된 것.

이왕 첩자가 되었으니, 남자는 아주 상세하고 영향력 있는 정보를 전달하고 싶었다.

그래서 사용인들 사이에서 떠도는 소문이나 겉으로 보이는 모습부터, 벨라디 앨턴과 멜도르 앨턴의 아슬아슬한 관계까지도 전부 관찰하고 정리해서 보고했다.

객관적 지표는 물론 사건의 개연성, 그리고 바뀐 관계성이 공작가의 후계 구도에 끼칠 여파까지 모조리 다.

시간은 오래 걸렸지만, 남자는 확신했다. 이건 단순히 사춘기 남매의 다툼 같은 것이 아니라고.

그동안 얌전히 지냈던 벨라디 앨턴이 조금씩 이빨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직은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것 같지만, 남모르게 그녀를 관찰했던 남자의 감이 경보를 울리고 있었다.

‘벨라디 앨턴은 위험한 인물이다!’

남자는 자신이 정리한 정보를 상대측에서 유용하게 사용하길 바랐다.

이 외에도 다양한 정보들을 제공할 의향이 있으니, 이 징그러운 앨턴 공작가를 완전히 끝장냈으면 싶었다.

‘그걸 위해서라면 난 더한 것도 할 수 있어.’

남자가 그렇게 다짐을 되새기는 사이, 하녀들의 수다는 계속되었다.

“그래서 첩자가 도대체 누구래?”

“그건 나도 몰라. 그런데 그 사주는 황실 측 사람이래!”

남자의 눈이 크게 떠졌다.

‘사주가 황실 측인 것도 안단 말인가!’

병사들도 그렇고, 저 하녀들도 그렇고.

자신은 분명 신중히 행동했는데, 도대체 언제 배후의 정체까지 들킨 건지 모를 일이다.

남자는 하녀들의 대화에 집중했다.

“넌 이걸 어떻게 알았어?”

“당연히 벨라디 님이 알려 주셨지! 첩자의 확실한 증거를 잡기 위해 준비 중이랬어!”

아무리 저택을 뒤져도 증거 같은 건 찾지 못할 것이다. 그런 것 따위 진작에 마법으로 처리했으니까.

그나저나 벨라디 앨턴은 어떻게 자신이 황실의 사주를 받은 걸 안 걸까?

상대방 측에서 정보 하나 얻은 것 가지고 섣부르게 움직였을 것 같지는 않고…….

‘혹시 이번 겨울 연회에서 뭔가를 알아챈 건가?’

안 그래도 이번 겨울 연회에서 벨라디 앨턴이 황제의 환심을 아주 단단히 샀다는 소식은 들었다.

그래도 자신과 손을 잡은 쪽은 황제가 아닌 황태자이니 안심하고 있었는데…….

벨라디 앨턴이 황제와의 대화만으로도 무언가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아직 어리지만, 그 테오도르의 딸이니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야.’

역시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라고 남자는 생각했다.

여기서 안타까운 현실을 하나 말하자면…….

남자에게 첩자를 제안한 황태자 측은 그의 정보를 완전히 믿고 있지 않았다.

황태자 측은 꽤 오랫동안 폐쇄적인 앨턴 공작가의 정보를 얻기 위해 적당한 인물을 물색해 왔다.

그러다 운 좋게도 앨턴가의 원한을 가진 이 남자를 발견했고, 그렇게 첩자로 심기는 했지만…….

벨라디 앨턴이 갑자기 후계자를 누르고 가문의 실권을 쥐었다고?

그동안 평범한 귀족 영애답게 고작 사교계에서나 활개를 치던 그 소녀가?

이건 가부장적인 황태자측이 이해하기에는 영 어려운 정보였다.

그래도 일단 케스퍼가 직접 움직여 보기로 했다. 반신반의의 마음으로, 벨라디 앨턴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는 건 전혀 예상 못한 채 말이다.

이를 전혀 모를 남자는 혼자서 오만가지 고민을 하고 있었다.

‘테오도르가 이 저택에 없는 틈을 타 다른 정보들도 수집하려 했는데……. 안 되겠다. 당분간은 몸을 사릴 수밖에.’

그래도 벨라디 앨턴이 자신의 정체까지 알아내진 못한 모양이었다.

남자는 재빠르게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마음이 급해진 그는 미처 몰랐다.

수다를 떨고 있는 하녀들.

그중 한 명이 안경을 치켜올리며 남자가 사라진 쪽을 주시하고 있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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