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킬리언을 만나고 며칠이 지났다.
지금 난 전등의 희미한 빛에 의지한 채 지하로 이어진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겨울 연회도 무사히 끝났고.’
저택의 지하실은 총 세 공간이 존재했다.
와인을 숙성시키기 위한 지하 숙성실.
가문 내 죄인을 심판하는 지하 감옥.
그리고 잡동사니를 정리하는 지하 창고.
그중 이 계단은 지하 창고와 연결된 곳이었다.
‘슬슬 내부 청소를 준비해야지.’
뚜벅뚜벅.
긴 계단을 내려가니 곧 작은 자수정이 박힌 창고 문 앞에 도달했다.
이 자수정에는 보안 마법이 담겨 있었지만, 내게 열쇠는 필요 없었다. 보안 마법은 앨턴가의 피가 흐르면 자동으로 임시 해제되니까.
‘잡동사니를 보관하는 곳이라 특별히 귀한 것도 없고 말이야.’
문고리를 잡고 돌리자 투박하고 무거운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창고 안에도 마법 전등이 설치돼 있어 앞을 식별하는 것에 큰 문제는 없었다.
안에는 이제 쓰지 않거나 고장 난 가구들, 낡은 커튼들, 유행이 지난 장식품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보통 사용하지 않는 가구들은 다른 곳에 기부하지만, 하나둘 남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부터 그런 것들을 이 창고에 쌓아 놓았는데, 어느덧 이렇게 불어난 모양이었다.
‘지저분하네. 날 잡아서 전부 정리해야겠다.’
일단 오늘은 날이 아니었다. 난 유유히 가구들을 피해 창고 깊숙이로 들어갔다.
가구들을 살피며 계속 걷던 난, 한 서랍장 앞에서 멈췄다.
짙은 고동색의 앤티크한 서랍장.
‘소설 속 묘사대로 오른쪽 손잡이가 빠져 있어.’
생각보다 빨리 눈에 띄어서 다행이었다. 이 답답하고 먼지 많은 창고에 오래 있고 싶지 않으니까.
난 손잡이가 없는 서랍 빈틈에 손을 넣고 쭉 빼내었다. 드러난 서랍 안에는 토끼 모양의 작은 봉제 인형이 놓여 있었다.
인형을 꺼내 주물럭거리니, 배 부근에 솜과 함께 딱딱한 무언가가 잡혔다.
“제대로 찾았네.”
난 인형을 손에 쥐고 유유히 창고 밖을 나섰다. 그리고 계단을 오르며 인형을 바라봤다.
백화점 장난감 코너에 전시될 법한 고급스러운 디자인의 연분홍 꽃무늬 토끼 인형이었다.
원작에서 이 인형을 찾아내는 건 네시아였다.
공작가에 입양된 후, 멜도르와 친해진 네시아. 어느 날, 두 사람은 본관에서 숨바꼭질을 하게 된다.
네시아는 그때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발견했고, 창고 문 앞에 도달했다. 아이는 멜도르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 이 창고 안에 숨기로 결정한다.
‘문에 보안 마법이 있기는 하지만……. 네시아를 상대로 발동될 리 없지.’
창고 안에 들어온 아이는 쌓여 있는 잡동사니에 강한 호기심을 느낀다.
숨바꼭질은 까맣게 잊고 이것저것 살펴보던 네시아. 그러다 손잡이가 빠진 서랍장에서 이 인형을 찾은 것이다.
‘원작 덕분에 나도 손쉽게 인형을 찾았네.’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지하를 벗어난 난 2층 내 방으로 향했다.
방에 도착한 후에는 인형을 책상 위에 눕히고, 편지를 뜯을 때 쓰는 페이퍼 나이프를 치켜들었다.
쫘악-!
내 손은 거침없이 인형의 배 부근을 갈랐다. 그러자 천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인형의 배에서 솜이 튀어나왔다.
그 속에 손을 집어넣고 솜을 헤집자, 곧 딱딱한 무언가가 잡혔다. 난 망설임 없이 그걸 빼냈다.
내가 집은 건 기묘한 무늬가 새겨진 반지였다.
금으로 만들어졌고 가운데에 보석이 아닌, 커다란 유리가 박혀 있는 반지.
잠시 반지를 살펴보던 난 그걸 손가락에 끼어 봤다. 반지는 내 오른쪽 중지에 딱 들어맞았다.
반지가 끼워진 손을 이리저리 돌려 보던 난, 피식 헛웃음을 지었다.
“할아버지도 참 재미있는 짓을 하셨다니까.”
아니, 쓸데없는 짓이라고 해야 하나?
여자 주인공인 네시아가 괜히 이 토끼 인형을 발견한 것이 아니다.
이 인형에 대해 말하자면 세월을 꽤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인형 안에 이 반지를 넣은 장본인이 바로 할아버지니까.’
지금은 아버지에게 공작의 자리를 물려주고 따뜻한 남쪽 섬에서 요양 생활을 보내고 계시는 할아버지. 그분은 원작에서 손녀 사랑을 제대로 보여 주는 인물이셨다.
‘막상 난 몇 번 뵌 적 없지만.’
할아버지는 냉정한 아버지와 다르게 호탕하신 분으로 장난이나 이벤트를 좋아하셨다. 이 인형도 지금은 돌아가신 할머니를 위한 이벤트 중 하나였다.
그때 당시 사교계에서는 인형이나 케이크 안에 반지를 숨겨 놓고 나중에 보여 주는 이벤트가 유행이었다.
할아버지도 할머니에게 이 인형을 선물한 후, 마법으로 인형 안에 숨겨 둔 반지를 뿅 보여 줄 계획이었다.
‘문제는 할머니가 아버지 못지않게 냉정하고 이성적인 분이었다는 거고.’
그 탓에 할머니를 위한 할아버지의 이벤트 성공률은 거의 마이너스에 수렴했다.
원작에서도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토끼 인형을 보여 주기도 전에 이렇게 비판했다.
-요즘은 인형 안에 반지를 숨겼다가 선물하는 것이 유행이라더군요.
-하하! 그래요. 나도 들었소.
-참 한심한 짓이에요. 반지를 선물할 거면 그냥 선물할 것이지, 상대방이 실망한 후에야 반지를 보여 주는 건 무슨 심보인지.
-그, 그런가?
-그게 사람을 농락하는 거지 뭐겠어요? 하여튼 요즘 젊은이들 생각은 이해를 못 하겠어.
-나…….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할아버지는 그 길로 인형을 서랍장에 처박아 두고, 결국 완전히 잊어버렸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고, 서랍장은 손잡이가 빠져 창고로 보내진 것이다.
‘그걸 네시아가 찾아낸 거고.’
참고로 네시아는 인형을 가지고 놀다가 안에 있던 반지를 발견한 후, 때마침 수도 저택에 들렀던 할아버지에게 그걸 보여 준다.
할아버지는 그 반지를 보고 추억에 젖어 있다가 네시아에게 가지라 말했고.
‘그러다 네시아는 첫째 오빠의 생일날 이 반지를 선물하지.’
고로 이 반지의 최종 주인은 첫째 오빠, 즉 내가 되는 것이다.
애초에 내가 가질 거, 네시아를 통해서 받을 게 아니라 처음부터 내가 발견하면 더 깔끔하지 않은가.
무엇보다 이 반지는 평범한 반지가 아니었다.
‘그냥 비싸기만 한 물건이었으면 내가 그 지하까지 내려가 찾지도 않았어.’
난 반지의 효력을 확인하기 위해 방 밖에서 대기 중인 하녀를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벨라디 님.”
하녀는 공손히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난 그 아이를 보며 가볍게 말했다.
“나한테 거짓말을 한번 해 봐.”
“예?”
의아해하는 하녀 쪽으로 반지를 낀 손을 내밀었다.
“아무 거짓말이라도 좋아. 뭐든 해 봐.”
“어, 어떻게 벨라디 님께……. 제가 잘못한 게 있다면 부디 용서해 주세요, 벨라디 님.”
하녀는 사색이 된 채 몸을 떨었다.
난 그걸 보며 조용히 혀를 찼다.
‘왜 저렇게 무서워해? 내가 그동안 하녀들을 너무 꽉 잡고 살았나?’
아닌데……. 까다로운 주인이기는 해도 그렇게 겁을 준 적은 없었다.
……뭐, 내 입장에서는 그렇지만 모시는 처지에서는 또 다를 수 있으니까.
난 반지를 낀 중지를 잠시 까딱이다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 멜도르의 하인 중 갈색 머리를 가진 아이를 좋아하지?”
“아니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벌벌 떨던 하녀가 펄떡 뛰었다.
그 순간이었다.
하녀 쪽으로 뻗어 있던 반지의 유리가 초록색으로 변했다.
“흐음, 역시 좋아하는구나.”
난 뻗은 손을 다시 거둬 유리를 살펴봤다.
내 말에 하녀가 고개를 휙휙 저었다.
“아, 아니에요. 벨라디 님! 전 좋아하는 사람 없어요!”
그 하인을 볼 때마다 얼굴을 붉히면서 좋아하지 않는다니. 내 하녀들 중 가장 나이가 어려서 그런가, 참 거짓말을 못했다.
난 계속 초록빛을 띠는 유리를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최근 사용인 중에서 행동이 좀 수상한 이를 봤니?”
“행동이 수상하다고요?”
“그래.”
내 물음에 하녀는 곰곰이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전 본 적 없어요.”
그 말에는 녹색이었던 유리가 원래의 투명한 상태로 돌아갔다.
그걸 보며 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나가 봐.”
“아, 네.”
하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인사를 하고는 종종 방을 나섰다.
난 문이 완전히 닫히자마자 씩 웃었다.
“살짝 걱정이었는데, 원작대로 잘 작동되네.”
할아버지는 꽤 통이 큰 분이셨다. 그런 분이 할머니에게 선물할 반지로 평범한 유리 장식을 고를 리 없었다. 이 반지는 바로 ‘정령의 보물’이었으니까.
과거 정령들은 인간들에게 평화 협약을 맺게 하는 대신,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보물을 조금씩 내주었다.
그 보물들은 오랜 세월 동안 여러 사람의 손을 타며 대륙 곳곳에 퍼져 나갔다.
‘내가 가지고 있는 정령검도 그 보물 중 하나고.’
이 반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반지는 땅의 정령 고유의 힘이 담겨 있어, 상대방의 말이 거짓인지 아닌지 판단해 주었다.
정말 유용한 보물임이 분명한데, 이벤트에 실패했다고 존재 자체도 싹 잊으시다니. 할아버지도 참 범상치 않은 인물이셨다.
‘……사실은 나도 살짝 잊고 있었지만.’
스파이를 색출해야겠다는 생각이 없었다면 계속 잊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나는 겨울 연회가 끝나자마자 사용인들의 고용 날짜부터 확인했다.
어머니가 쓰러지셨던 건 작년 여름 무렵. 그때부터 일을 시작한 이들이 스파이일 확률이 높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록을 살펴본 결과, 그때 고용된 이는 한 명도 없었다.
그럼 모두 이 집안에 꽤 오랫동안 충성해 온 사람들이라는 말인데…….
‘감히 우리 앨턴가를 배신하다니.’
기존 사용인 중에 스파이가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하긴, 윌리엄의 사례가 있는데 또 나타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지.
그렇긴 하지만…….
‘내가 통제하는 저택에 황태자의 개가 숨어 있다?’
그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이 반지를 이용하면 아주 손쉽게 스파이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난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반지를 쓰다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