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연회는 자정이 다 되어서야 끝이 났다.
황제를 비롯한 황족들이 먼저 자리를 떠났고, 시온과 모스틴도 가족들과 함께 돌아갔다.
난 건물 입구 계단에서 마부를 기다렸다. 혹여라도 내가 늦으면 마차가 눈에 젖지 않게 잘 피해 있으라고 말해 놓았던 탓이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돌아가는 귀족들과 마차로 북적거렸을 입구지만, 지금은 아무도 없어 고요했다.
원래 겨울 연회는 오후에 시작하는 대신 이르게 집에 돌아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갑작스러운 황제와의 대면이 아니었다면, 나도 다른 귀족들처럼 일찍 귀가했을 것이다.
‘어쩌다 보니 남은 게 나밖에 없네.’
시온과 모스틴은 혼자 남은 날 걱정하며 연회장에 마련된 파우더 룸에서 기다리라 말했지만, 난 그걸 가볍게 거절했다. 황제와 이야기를 하며 계속 샴페인을 들이켰기에 볼이 조금 뜨거웠기 때문이다.
난 입구 계단에서 찬 바람을 맞으며 코트를 여몄다. 연회장 건물 입구와 마찻길 너머에는 황궁의 중앙 정원이 이어져 있었다.
달빛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밤.
곳곳에 놓인 가로등 아래로 쌓이는 함박눈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누군가 정원을 걷고 있는 게 보였다.
‘이 시간에 누구지?’
검은 그림자는 정원을 빠져나와 마찻길을 가로질렀다. 그러더니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와 내 쪽으로 다가왔다.
연회장 건물 빛에 의해 드러난 얼굴은 처음 보는 낯선 용모였다.
“하아, 아직 늦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남자가 어깨와 머리에 묻은 눈을 툭툭 털며 방긋 웃었다. 채도 낮은 붉은 머리와 투명한 회색 눈동자가 인상 깊었다.
난 그를 잠시 응시하다, 간단히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킬리언 앨러만 데커딜 황자님께 인사드립니다. 벨라디 앨턴이라고 합니다.”
내 인사에 붉은 머리의 남자, 킬리언이 잠시 눈을 깜박이다 같이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습니다, 앨턴 양. 아직 제 이름을 밝히지 않았는데, 먼저 절 알아보실 줄 몰랐습니다.”
“때마침 오늘, 킬리언 전하께서 귀국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답니다.”
덕분에 ‘킬리언’이라는 이름이 머릿속에 남아 있던 참이었다.
거기에 킬리언은 굽이 낮긴 하지만 힐을 신고 있는 나보다 키가 컸다.
수도의 귀족들 중 나보다 키가 큰 남성은 아버지를 포함해 몇 없었고, 난 그들의 얼굴을 모두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붉은 머리는 황족의 특징이기도 하고요.”
채도는 조금 달랐지만, 선황도 황제도 황태자와 헤라 황녀도 머리가 붉었다.
나보다 키가 큰 붉은 머리의 낯선 남자. 그러니 자동적으로 눈앞의 이는 킬리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감이 좋으시군요.”
킬리언은 그렇게 말하며 보기 좋게 미소 지었다.
그는 밖에 오래 있던 모양인지, 코와 뺨이 발그레 물들어 있었다.
“오늘 겨울 연회에 앨턴 양이 참가하는 줄 알았다면 저도 참석할 걸 그랬습니다. 그러면 좀 더 빨리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을 텐데…….”
킬리언이 듣기 좋은 목소리로 사근사근 말했다.
그걸 들으며 난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제게 볼일이라도 있으신가요?”
“그런 건 아닙니다. 단지…….”
그렇게 말하는 킬리언은 우아하게 손을 내밀었다. 난 그걸 잠시 바라보다, 그의 손 위에 내 손을 겹쳤다.
킬리언은 조심스럽게 내 손을 자신의 입가로 가지고 가더니, 손가락에 입을 맞췄다. 흔히 귀족 남성이 친애하는 레이디에게 행하는 인사였다.
“마갈라 제국에 있었을 때부터 앨턴 양과 친해지고 싶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킬리언의 눈동자가 예쁘게 접혔다.
“그러니 이렇게 잠시나마 당신을 만나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킬리언은 그렇게 말하며 엄지로 내 손끝을 살짝 쓸었다.
장갑 너머로 느껴지는 그 간지러운 감각에 난 고개를 기울였다.
‘오늘 진짜 무슨 날인가 보네.’
케스퍼도 그렇고, 황제도 그렇고, 킬리언도 그렇고. 오늘따라 낯선 이들이 내게 무언가를 바라며 접근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킬리언의 속이 제일 안 보이는군.’
사람의 속마음을 읽는 게 내 특기였다.
그런 나조차 속내를 꿰뚫기 어려울 정도로 킬리언은 다른 이들보다 더 두꺼운 가면을 쓰고 있었다.
뭐 그의 속마음은 보이지 않아도, 이 행위가 띠고 있는 의도는 너무나 투명했지만.
난 자연스럽게 킬리언의 손에서 내 손을 빼며 입을 열었다.
“지금 제가 하고 있는 머플러는 붉은 여우의 털로 만들었답니다.”
내 동문서답에도 킬리언은 의아해하지 않고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앨턴 양의 눈과 잘 어울리는 색이로군요.”
“킬리언 전하의 머리와도 잘 어울리는 색이지요.”
붉은 여우의 털과 킬리언의 머리는 색이 비슷하니까.
난 그렇게 말하며 머플러의 털을 쓰다듬었다.
“붉은 여우는 평범한 짐승들보다 경계심이 많은 만큼, 지능도 뛰어납니다. 가끔은 사람 앞에 일부러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고요.”
“경계심이 많은데 사람 앞에 나타난다……. 이유가 있을까요?”
“오랜 관찰 끝에 자신이 속일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한 대상이거든요. 그 피를 먹을 수 있을 거란 확신.”
붉은 여우는 마물과 섞인 짐승이다. 그리고 마물들이 가장 좋아하는 먹이가 사람의 피였다.
“붉은 여우는 평범한 여우인 척 사람 앞에 나타나 갖은 애교를 부린 다음, 방심한 틈을 타 손을 문답니다. 숨기고 있던 이빨이 무척 날카로워서 큰 부상을 입는 사람이 꾸준히 나타나고 있죠.”
“이런, 안타까운 이야기군요.”
“그리고 전 붉은 여우를 사냥하는 데에 아주 능숙하답니다. 이 머플러처럼 털끝 하나 손상시키지 않고 단번에 끝낼 수 있어요.”
여름 사냥 대회에서, 나무에 숨어 날 관찰하던 붉은 여우의 눈을 겨냥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킬리언은 그제야 내가 왜 이 이야기를 꺼냈는지 얼추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의 표정이 순간 미묘하게 바뀌었다. 난 그걸 보며 가지런히 입꼬리를 올렸다.
내 미소를 보자 잠시 말이 없던 킬리언이 씨익 마주 웃었다.
“대단하군요, 앨턴 양. 그 이야기를 들으니 더욱 당신과 가까워지고 싶어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영광이군요, 전하.”
난 그렇게 말하며 킬리언에게서 시선을 떼 계단 아래의 마찻길을 바라봤다. 때마침 내 마차가 눈발을 뚫고 달려오고 있었다.
그걸 눈치챘는지 킬리언이 아쉬움 가득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벌써 돌아가시는 건가요?”
그 물음에 맞춰 마차가 연회장 입구에 도달했다.
마부는 서둘러 마차의 문을 열었다. 난 그걸 보며 말했다.
“시간이 늦었으니까요.”
“괜찮으시다면 다음에 저와 따로 만나 주시겠습니까? 이대로 앨턴 양을 돌려보내면 너무 미련이 남을 것 같아서…….”
그 말에 난 고개를 돌려 킬리언을 바라봤다. 건물에서 새어 나오는 빛이 그의 이목구비에 음영을 만들어 냈다.
수려한 그 외모를 보니, 자동적으로 연회장에서 엘로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마갈라 제국에서 킬리언 전하의 여성 편력이 심하셨다고 해요.
과연, 그럴 만하겠네.
만약 내가 전생을 자각하지 못했고, 빼어나게 아름다운 시온의 얼굴에 익숙해지지 않았다면 저 제안에 조금 설렜을지도 모르겠다.
‘아쉽게도 권력을 맛본 지금은 다른 게 눈에 들어오지도 않지만.’
“아쉽게도 이번 겨울은 제가 무척 바쁘답니다.”
난 그렇게 말하며 계단을 내려가 마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문을 닫으려는 마부를 제지한 후, 계단 위에 있는 킬리언과 시선을 마주했다.
난 그를 보며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부터 저와 친해지고 싶다고 하셨나요?”
“……그렇습니다, 앨턴 양.”
“저희 같은 사람들은 아무런 속셈도 없이 사람과 친해지지 않죠.”
내 말에 킬리언의 몸이 멈칫했다. 난 그걸 보며 싱긋 입꼬리를 올렸다.
“참 재미있게도, 저 역시 전하께 호기심을 가지고 있답니다. 그러니 이번 겨울이 지나고 날이 따뜻해지면 한번 뵙도록 하죠.”
킬리언은 아무런 말 없이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끼를 부리던 아까와 비교되게 꽤나 당혹스러운 눈치였다.
“다음에 만날 때엔 본인의 패를 어느 정도 드러낼 각오를 하는 게 좋을 거예요. 그럼 이만.”
“자, 잠시만요, 앨턴 양.”
킬리언은 조금은 급하게 계단을 내려와 마차로 다가왔다.
그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날 올려다봤다.
“혹시……. 저를 보고 뭐 느껴지는 게 없습니까?”
“없습니다.”
난 단호하게 말한 후,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춥군요.”
내 말에 킬리언이 흠칫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마부가 조심스럽게 마차의 문을 닫았다.
마차가 출발하기 직전, 난 창을 살짝 열고 킬리언을 바라봤다.
“전하께서도 눈 맞지 마시고, 그만 궁으로 들어가세요.”
“아…….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난 미소를 유지한 채, 고개를 까딱였다.
그리고 마차가 출발했다.
힐끔 뒤를 보니, 킬리언은 움직이지 않고 내 마차를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난 창을 닫고 등받이에 기대앉았다.
“여성 편력이 심한 킬리언 2황자라…….”
오늘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마주한 킬리언에게는 수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특히 여성 편력이 심하다는 건 꽤나 미심쩍은 부분이었다.
그가 속내를 잘 숨기기는 했지만…….
‘여자를 유혹하는 데 능숙하지는 못해.’
내가 설렘을 느낄 수도 있겠다 싶은 포인트도 외모와 목소리였지, 말솜씨와 분위기가 아니었다.
‘물론 얼굴이 잘났으니, 외모만으로 인기를 얻을 수야 있겠지만.’
정말 그것만으로 그 콧대 높은 마갈라 제국의 귀족들이 킬리언 황자를 좋아했을까?
다른 이들은 모르겠지만, 마갈라 제국의 쌍둥이 황녀는 나라에 대한 자긍심이 상당히 높다고 들었다.
그런 그녀들이 적대국의 황자를 단순히 잘생겨서 좋아했을 리는 없고…….
또 킬리언은 왜 마지막에 그런 말을 한 걸까?
-저를 보고 뭐 느껴지는 게 없습니까?
응당, 내가 그를 보며 뭔가를 느껴야 하는 것처럼…….
‘킬리언 황자가 숨긴 비밀은 뭐지?’
그에게 따로 감시자라도 심어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일단 고개를 저었다.
일단 지금은 할 일이 많았다. 킬리언 황자가 제국으로 돌아오고 내게 먼저 접근한 이상, 급할 건 없었다.
난 피곤한 눈을 감으며 덜컹이는 마차에 몸을 맡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