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K-장녀가 육아물에 빙의하면-29화 (30/197)

29.

“만나서 반가워요, 앨턴 양. 헤라 앨러만 데커딜이에요.”

화려한 붉은색 머리를 앙증맞게 묶은 황녀가 푸른 눈을 비비며 말했다.

황녀는 초상화로 봤던 그리리카 선황과 상당히 닮은 아이였다. 선황의 피가 아들을 통해 손녀에게도 짙게 내려온 모양이었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벨라디 앨턴이라고 합니다.”

“제가 황제 폐하의 품에 안겨 있는 건 양해해 주세요. 연회 준비 때문에 오늘 낮잠을 못 자서.”

또랑또랑한 말투와 달리 헤라 황녀의 목소리에는 졸림이 가득 담겨 있었다.

황제는 그런 자신의 딸이 귀여운지 연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귀족들에게 얼굴을 비췄으니 황녀는 그만 가서 자도 된단다.”

“아니요, 폐하. 폐하와 앨턴 양이 나누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그렇게 답하는 와중에도 헤라 황녀는 하품을 크게 했다. 그걸 보다 못한 황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헤라. 폐하께서는 긴히 할 말이 있어 앨턴 양을 부르신 거야. 시간이 많이 늦었으니 같이 방으로 가자.”

“으음……. 그렇지만…….”

황녀가 힐끔 나를 바라봤다. 그 눈에는 날 향한 호기심이 깔려 있었다.

‘황녀가 내게 관심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오늘이 무슨 날인가?

케스퍼도 그렇고, 황녀도 그렇고. 전혀 접점이 없는 인물들이 자꾸 내게 다가오려고 한다.

난 황녀의 시선을 모르는 척 시선을 내렸다.

황후는 헤라 황녀에게 두 팔을 벌렸다. 저렇게까지 나오자 황녀는 아쉽다는 듯이 한숨을 폭 쉬었다.

“알겠어요.”

황제는 황녀의 이마에 입을 맞춘 후, 아이를 황후의 품에 넘겨주었다.

황후는 능숙하게 아이를 안고 상석에서 일어났다. 옆에 있던 유모가 안절부절못하며 자신이 안겠다 말했지만, 황후는 이를 거절하고 황녀의 등을 토닥였다.

참, 다정한 광경이었다.

점점 멀어지는 황후의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 있던 황녀와 눈이 마주쳤다.

황녀는 배시시 웃으며, 내게 고사리 같은 손을 흔들었다. 그 천진난만한 인사에 나 역시 고개를 숙여 답했다.

옆에서 중후한 목소리가 들렸다.

“내 딸이지만 참 귀여운 아이야.”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황제였다.

“네, 그렇군요.”

“무척 영특하고 조숙하기도 하지. 이렇게 공적인 자리에서는 꼬박꼬박 나를 폐하라고 부르지 뭔가. 고작 7살짜리가.”

황제는 하하하 인자하게 웃었다. 난 마주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똑 부러진 황녀님이 계시니 나라의 경사입니다.”

“참 아쉽구나. 우리 헤라가 조금만 더 나이가 많거나 벨라디 네가 조금 더 어렸다면, 둘이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그랬을 수도 있겠네요.”

그렇게 대답하긴 했지만, 굳이 우리 둘의 나이가 비슷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헤라 황녀는 몇 년 뒤에 네시아라는 단짝이 생길 테니까.

‘원작에서 동갑인 두 사람은 서로 죽고 못 사는 친구가 되지.’

그나저나 황제가 사적인 자리에서 날 부른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여름 사냥 대회가 이례적인 경우였고, 그는 보통 각 가문의 가주와 이야기를 나눌 뿐 그 자제와는 말을 섞지 않았으니까.

‘순전히 황녀를 보여 주기 위해 날 부른 건 아닐 테고.’

물론 인맥을 만든다면 황태자보다는 황녀가 낫기는 하다. 원작에 따르면, 황녀는 인품도 능력도 뛰어난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오늘따라 내게 생소한 사람들이 다가오는 걸 보니…….

‘황제도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단 말이야.’

그때 문득, 내 머릿속에서 원작의 한 부분이 스쳐 갔다.

「네시아와 함께 앨턴 공작가의 정원을 산책 중이던 헤라가 한숨을 쉬었다.

그 모습에 네시아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

“전에 말했던 일 때문이야?”

“으응……. 아무래도 나 때문에 오라버니들과 폐하의 사이가 점점 틀어지는 것 같아.”

“그래도 킬리언 전하께서는 네 편이라며.”

“그래, 내 뜻을 지지해 주겠다고 하셨지. 그런데 난 잘 모르겠어. 폐하께서는 나한테 작위를 내려 주고 싶어 하시고, 첫째 오라버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폐하께서 다 네 능력을 높이 사셨기 때문 아니겠어? 솔직히 나도 네가 그냥 황녀로서 결혼을 하는 건 아깝다고 생각해! 넌 귀족 작위를 받을 자격이 충분하니까!”

네시아의 말에 헤라가 살짝 서글프게 웃었다.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 안 그래도 요즘 폐하께서 계속 후회하시는 것 같아. 좀 더 적극적으로 나를 지지해 줄 기반을 마련했어야 했다면서.”

그렇게 말하는 헤라의 얼굴에는 슬픔이 가득했다.」

이 장면이 내가 읽은 마지막 장면이다.

그 후 사고를 당했고, 정신을 차리니 이곳에 환생 겸 빙의를 했으니까.

‘헤라 황녀의 말에 따르면, 황제는 진작부터 황녀의 지지 세력을 찾고 있었다는 건데…….’

설마, 지금 그 타깃이 나?

내 예상에 근거를 더해 주듯 황제가 입을 열었다.

“북부의 가문들은 선황께서 황녀였던 시절, 그녀를 지지해 준 든든한 기반이었지.”

“저희는 언제나 황실에 충성을 다합니다, 폐하.”

“그 충성이 하나의 황족에게만 향했을 때를 이야기하는 거란다.”

난 잠시 입을 다물었다.

내 대답이 없어도 황제는 말을 이어 갔다.

“선황께서는 북부의 대표인 앨턴 공작가에 항상 애정을 가지고 계셨어. 그건 나도 마찬가지고.”

“…….”

“또한 헤라 황녀도 그러하지.”

난 숙였던 고개를 들어 황제를 마주 봤다. 예법에 어긋난 시선이었지만, 황제는 화를 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는 웃고 있었다.

“황녀는 거센 추위에도 물러나지 않는 북부의 정체성이 마음에 든다고 하더구나. 살아생전 그리리카 선황께서도 그리 말씀하셨는데. 참 재미있는 일이야.”

‘거센 추위에도 물러나지 않는 정체성이라…….’

우리가 전쟁이 끝나도 북부에서 벗어나지 않는 건, 그곳에 돈이 되는 철광석들이 수두룩하게 많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면 뭣 하러 살기 척박한 그곳에 머물겠는가.

어린 헤라 황녀라면 몰라도, 황제가 이런 속물적인 사정을 모르지는 않겠지.

인자하게 웃고 있지만, 황제의 눈은 내 반응을 예리하게 살피고 있었다. 그는 지금 나보고 황녀와 친하게 지내라 압박을 주고 있었다.

단순한 친구, 그 이상으로 말이다.

‘과거 앨턴가가 그리리카 선황을 지지했던 것처럼, 헤라 황녀를 지지하라 이 말인가.’

그런 정치적인 건 아버지한테나 말하지, 왜 나한테 이러는 걸까?

난 속으로 한숨을 푹 쉬었다. 거대한 제국을 통치하는 사람답게, 황제의 위압감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하지만 기 싸움 하면 나도 한몫하는 사람이거든.’

얕게 심호흡 후, 나는 큰 무리 없이 반듯한 미소를 유지했다.

“아버지께서 들으시면 무척 기뻐하시겠군요. 저희 가문의 큰 영광입니다.”

나는 짐짓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황녀 전하의 애정이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을까 염려가 됩니다.”

내 말에 황제의 눈에 조금 이채가 돌았다.

“오해라?”

“황녀 전하께서 북부를 애정하고 있다는 것이 다른 지역의 귀족들에게 편애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을까 싶어서…….”

여기까지 말을 마친 난 쓱 뒤를 돌아보았다.

상석은 넓은 연회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자리였다. 황제도 나를 따라 연회장으로 시선을 옮긴 것이 느껴졌다.

‘어디 보자.’

사람들이 바글바글한데 찾을 수 있으려나.

이런 내 염려와는 다르게, 난 아주 쉽게 모스틴과 시온을 찾을 수 있었다. 타이밍 좋게도 시온이 이쪽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저 외에도 다른 지역을 대표하는 공작가의 자제들과 이야기를 나누시는 건 어떨까요?”

난 이렇게 말하며 까딱 고갯짓했다.

내 시그널을 읽은 시온은 바로 옆에 있던 모스틴을 데리고 이쪽으로 달려왔다.

시온과 모스틴이 순식간에 상석과 연결된 계단에 도착하자, 계단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황제를 바라봤다.

황제는 별말 없이 그들의 접근을 허락했다. 우아하지만 서두르는 게 느껴지는 모습으로 올라온 시온과 모스틴이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존엄하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아글라가의 아들, 시온 아글라라고 합니다.”

“황제 폐하를 뵈어 영광입니다. 프레도 공작가의 모스틴 프레도 입니다.”

“그래…….”

황제는 둘의 인사를 받아 주며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이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라? 내가?”

“네, 폐하. 두 공자 모두 정말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랍니다. 이야기를 나누면 폐하께서도 무척 마음에 드실 거예요. 이들의 매력을 황녀 전하께 알려 주시기도 편하실 거고요.”

“하하하하하!”

내 말에 황제가 크게 웃었다.

어찌나 호탕하던지 먼 곳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황태자 부부가 대놓고 이쪽을 주시할 정도였다.

황제는 유쾌하게 웃으며 날 바라봤다.

“이것 참, 내가 몸소 황녀를 소개해 주려 했는데. 반대로 네 친구들을 소개받았구나.”

황제가 아주 친절하게 지금까지의 대화를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덕분에 시온과 모스틴은 상황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착하고 성실한 미소를 지으며 황제에게 고개를 숙였다.

“앨턴 양의 말대로 전 꽤 재미있는 놈입니다, 폐하!”

“오늘 하루, 제가 폐하의 즐거움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난 스르륵 둘의 옆에 서서 같이 고개를 숙였다.

“부디 저희 셋에게 폐하와의 대화를 허락해 주시겠어요?”

이런 우리의 모습에 황제는 미소 지었다. 아까 보여 줬던 것보다 조금 더 편안한 미소였다.

“너희 셋이 퍽 막역한 사이라는 건 나도 알고 있지. 그래, 어디 얼마나 나를 즐겁게 해 줄지 기대해 보마.”

황제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시종들이 신속하게 모여들어 황제의 자리 옆에 의자를 마련해 주었다.

몇몇 시종들은 작은 테이블, 음료가 든 잔, 그리고 카나페 같은 먹을거리를 세팅해 주었다.

“제국의 새싹들은 요즘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지는군. 오늘 연회는 생각보다 신선한 시간이 되겠어.”

신선하다마다.

그 후 연회가 끝날 때까지 우리는 황제와 계속 함께했다. 황제는 시종일관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우리에게는 어르신 비위 맞추기의 달인이 있는 덕분이었다.

시온도 나도 말솜씨가 나쁜 편은 아니었지만, 모스틴에 비하자면 보름달 앞의 반딧불에 불과했다.

“제가 폐하께 바치고 싶은 노래 한 곡조 뽑아도 괜찮겠습니까?!”

“하하하! 좋다! 해 보아라!”

모스틴이 아주 일당백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었다.

새삼, 저 녀석은 현대에 태어났으면 아부 하나로 임원까지 승진할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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