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아글라 소공작님.”
눈앞에는 시온의 나이 차이 많이 나는 형이자, 차기 아글라 공작인 ‘케스퍼 아글라’가 서 있었다.
난 소파에서 일어나 그에게 인사했다. 내가 인사하자 주위에 있던 영애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같이 고개를 숙였다.
그는 이런 우리에게 방긋 웃어 보였다.
“벨라디가 반가워 다가온 것인데, 제가 레이디들의 대화에 폐를 끼친 게 아닐까 염려되는군요.”
그 말에 영애들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머, 아니에요!”
“그러고 보니 저희가 벨라디 양을 너무 오래 독차지했나 봐요!”
난 그녀들의 반응을 잠시보다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왕 오셨으니, 잠시 이야기를 나눌까요?”
“그래, 벨라디. 마침 저쪽에 좋은 와인이 있으니 한잔하자.”
케스퍼가 매너 있게 내 손을 감싸 쥐었다.
난 영애들과 눈으로 인사를 나눈 후, 케스퍼의 에스코트에 따라 연회장 가운데로 향했다.
가운데에 있는 테이블 위에는 와인 잔이 탑 모양으로 쌓여 있었다. 케스퍼는 그중 하나를 집어 내게 내밀었다.
딱 봐도 도수가 높아 보이는 붉은 와인이 찰랑거렸다. 난 그걸 받아 들며 웃었다.
귀족들은 어릴 때부터 술에 대한 매너와 상식을 배운다. 술은 귀족 사회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이고, 예법에도 포함된 기본 교양이었기 때문이다.
나도 샴페인 정도는 가볍게 한, 두 잔 즐기지만…….
‘독한 와인은 취향이 아닌데.’
이런 날 눈치채지 못한 케스퍼가 내 잔과 자신의 잔을 부딪쳤다.
쨍-.
맑은 유리 소리와 함께 케스퍼의 눈매가 활처럼 휘었다.
“오랜 침묵을 깨며 돌아온 사교계의 꽃을 위해.”
‘으, 느끼해.’
케스퍼는 느끼하고 허례허식이 담긴 옛날 말투를 즐겨 쓰는 편이었다.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기성세대의 귀족들은 상당히 그를 좋아했다.
난 도저히 저 말투가 적응되지 않았지만.
“환영 감사합니다, 소공작님.”
일단 케스퍼의 멘트에 적당히 대답하며 와인을 한입 마셨다. 씁쓸한 액체가 입 안을 적셨다.
난 와인을 삼키며 케스퍼의 말을 곱씹었다.
‘사교계의 꽃이라…….’
흔히 나와 황태자비를 보고 사교계에 꽃이라고 일컫는다. 하지만 나도 그녀도 한철 피고 지는 꽃에 비교될 사람이 아니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우리는 사교계의 양대 산맥이지.’
하지만 케스퍼는 옛날 말투를 쓰는 만큼, 생각도 옛날에 머물러 있는 남자였다. 그는 꽃이든 산맥이든, 사교계 일은 거기서 거기라고 판단할 확률이 높았다.
난 입 아프게 반박하는 것보다 그냥 와인을 마시는 걸 선택했다.
“그런데 저에게는 무슨 볼일로 오셨나요?”
내 물음에 케스퍼는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애초에 케스퍼는 나와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일단 케스퍼와 시온 자체가 그리 우애 좋은 형제가 아니었고, 케스퍼의 부인인 아글라 소공작 부인은 황태자비와 친분이 두터웠다.
‘평소에는 만나면 인사만 하고 말았는데……. 무슨 속셈으로 내게 접근한 거지?’
내 눈초리에 케스퍼가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벨라디 네게 소개해 줄 분이 있어.”
“소개해 줄 분이요?”
“그래, 이제 곧 이 연회장에 들어오실 거야.”
연회는 벌써 한참 전에 시작되었고, 초대받은 귀족들도 전부 도착한 상태였다.
하늘은 어느덧 어두워질 무렵. 이런 때에 연회장에 들어설 이라면 딱 하나밖에 없었다.
오늘 연회의 주최자.
‘황족……!’
특히 케스퍼가 내게 소개해 줄 사람이라면 뻔했다.
“황태자 전하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케스퍼는 황태자의 충실한 오른팔이었으니까.
그들이 이런 사이라, 황태자비와 소공작 부인도 가깝게 지내는 것이고.
내 말에 케스퍼가 여유로운 몸짓으로 지나다니던 시종의 쟁반에 빈 와인 잔을 올렸다.
“벨라디 네 성년식도 몇 년 안 남았지. 그러니 인맥을 만들어 두는 것이 좋을 거야.”
내 성년식과 인맥을 만들어 주는 것은 아버지인 앨턴 공작이 움직일 일이었다. 그러니 케스퍼가 신경 쓸 필요 전혀 없었다.
‘갑자기 웬 오지랖일까…….’
난 찝찝한 마음을 숨기며 입을 열었다.
“인맥이라면 멜도르에게 소개해 주는 거 어떨까요?”
괜히 귀찮은 일 나한테 벌이지 말라는 뜻이었다.
분명 내 말을 알아들었을 케스퍼가 생긋 미소 지었다.
“벨라디는 이럴 때에도 동생을 먼저 생각하는 착한 누나구나? 괜찮아. 멜도르에게도 나중에 소개할 거니까.”
착한 누나 좋아하시네.
순간 주먹이 꽉 쥐어졌다가 풀어졌다. 짜증이 치솟았지만, 벌컥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케스퍼는 중앙 정치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만큼 능글맞고 계산이 빠른 사내였으니까.
섣불리 화를 내 봤자 나만 손해를 보게 될 터였다.
얼굴과 미소는 순진한 시온과 닮았지만, 그 안에 담긴 속내는 전혀 다를 것이 뻔했다.
‘나한테 이렇게까지 친한 척이라…….’
애초에 케스퍼는 꽤 노골적으로 앨턴 공작가를 황태자의 세력에 넣고 싶어 했다. 그렇기에 평소 나보다 후계자인 멜도르에게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걸 뭐라고 하는 건 아니다. 원래 귀족들이 하는 것이 다 이런 세력 다툼이니까.
다만 내게 일말의 관심도 없었으면서, 갑자기 황태자와 다리를 놓으려 하다니…….
‘황위 계승권이 높은 킬리언 황자가 돌아와서 조바심을 느낀 걸까?’
난 잠시 케스퍼의 얼굴을 살펴봤다. 그의 얼굴에는 어떠한 초조함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건 킬리언 황자를 경계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는 걸 의미했다.
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였다.
‘나와 멜도르의 관계가 뒤집힌 걸 눈치챘군.’
나도 외부에서의 내 평가를 잘 알고 있다.
공작 가문의 별다른 영향력 없는 장녀.
그래서 귀족 남성들은 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 평가는 내가 가족을 사랑하는 착한 딸이었을 때의 일이고.’
나는 더 이상 멜도르나 아버지에게 휘둘리지 않았다. 그러니 내 평가는 완전히 틀렸다고 보면 된다.
다만 내가 멜도르와 서열을 정리한 건 순전히 집안 내부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것도 아주 최근에.
그걸 이렇게 빨리 눈치채고 나에게 접근한다는 건…….
‘집 안에 스파이가 있다.’
어머니가 쓰러지고 온 집안이 정신없을 시기에 심어 놓은 건가?
일전의 윌리엄 사건 때문에 안 그래도 찝찝했는데, 마침 잘됐다.
‘돌아가면 내부 청소를 해야겠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우렁찬 시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엄한 제국의 주인이신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 황태자 전하, 황태자비 전하, 황녀 전하 드십니다!”
그 말과 함께 연회장 문이 활짝 열리며 황족들이 입장했다.
아직 정정한 황제 부부와 야무지게 걷는 황녀.
그 뒤에 당당한 걸음의 황태자와 그의 팔짱을 낀 황태자비.
예상대로 킬리언 황자는 등장하지 않았다.
그때 백금발을 화려하게 틀어 올린 황태자비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입가에 화사한 웃음을 유지했지만, 눈만큼은 살벌하게 날 노려보고 있었다.
나 역시 그녀를 마주 보며 피식 웃어 주었고 말이다.
황태자비는 황태자를 따라 걸음을 옮기면서도 내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나마 내가 황태자비를 인정하는 점이 바로 저거였다.
‘여전히 도망가지는 않네.’
내게 먼저 시비를 걸어 놓고 기백에 눌려 꼬리를 마는 놈들이 허다했다. 그런 이들과 달리, 황태자비는 끝까지 내게 맞서는 소수의 인물 중 하나였다.
‘저 패기는 마음에 들어.’
하여튼 황족의 등장은 겨울 연회의 하이라이트 이벤트였다.
황제가 나타나자, 연회장에 있는 모든 귀족이 우아하게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황제는 웃는 얼굴로 귀족들의 인사를 받았다.
“오늘 겨울 연회에 와 주어 무척 반갑소. 이 연회에서 서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길 바라오.”
황제는 간단하게 인사를 끝내고, 연회장에 마련된 계단 위 상석에 앉았다. 황후와 황녀도 그 뒤를 따랐다.
황태자 부부는 마련된 자리로 가지 않고 모여드는 귀족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동안 계속 잔잔했던 악단의 음악은 황제의 인사 후, 경쾌하게 바뀌었다. 황족이 등장하면 즐거운 댄스 타임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 중앙 홀로 향했다.
케스퍼도 내게 손을 내밀었다.
“자, 전하가 오셨으니 가자.”
‘아, 가기 싫다.’
이렇게 뜬금없이 정치에 엮이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황태자는 그다지 실속 있는 놈 같지 않단 말이야.’
나름 내놓는 정책들이 빛을 보고 있기는 하지만, 어쩐지 황태자는 믿음이 가질 않았다.
애초에 케스퍼의 속셈은 얼추 알았으니 참을 이유도 없어졌다.
난 대답 없이 케스퍼가 내민 손을 응시했다. 그러자 케스퍼의 손이 잠시 움찔거렸다.
“벨라디?”
난 대놓고 시선을 옮겨 황태자를 바라봤다.
황태자는 멀지 않은 곳에서 귀족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만, 알 수 있었다. 그의 신경이 온통 이쪽으로 쏠려 있는 것을.
내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케스퍼는 답답해졌는지 다시 나를 재촉했다.
“긴장돼서 그러니? 그래, 갑작스럽게 황태자 전하를 마주하려니 그렇겠지. 그래도 내가 옆에 있으니 너무 걱정할 것 없어.”
그때였다.
“벨라디 앨턴 공녀님.”
누군가가 나를 불렀고 나와 케스퍼는 동시에 뒤돌아보았다.
뒤에는 황실 시종복과 비슷하지만, 더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황제의 시종이었다.
“폐하께서 공녀님을 부르십니다.”
“……하하, 이것 참.”
시종의 말에 케스퍼가 헛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는 잠시 입을 다물다, 날 바라봤다.
“아무래도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네. 다음에 다시 자리를 마련할 테니 기다려, 벨라디.”
케스퍼는 다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나름 상냥한 척을 하려는 것 같지만, 본인 성격을 버리지 못한 모양이다. 내게 명령조로 말을 하니 말이다.
난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글쎄요……. 소공작님은 그 자리가 저와 어울릴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뭐라고?”
난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필요해지면 제가 따로 언질할 테니. 그때까지 기다리세요, 아글라 소공작님.”
내가 그의 말투를 따라 말하자, 그제야 케스퍼는 자신의 어투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가 곤란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려 하길래 난 가차 없이 고개를 돌렸다.
“가자.”
“예, 이쪽으로.”
난 시종을 따라 황제가 있는 상석으로 향했다.
가면서 옆을 보니 황태자의 표정이 꽤 찡그려져 있었다.
‘저 남자도 참. 황태자씩이나 되면서 감정을 잘 못 숨긴단 말이야.’
그나저나 케스퍼와 황태자에게서 큰 탈 없이 벗어나긴 했는데…….
“폐하, 앨턴가의 딸 벨라디 앨턴 인사드립니다.”
“그래, 사냥 대회 이후로 오랜만이구나. 테오도르의 딸이니 편하게 벨라디라 부르마.”
“제게는 과분한 영광입니다.”
‘황제라는 더 거대한 벽과 마주해 버렸네.’
난 평온하고 웃고 있는 황제, 그리고 그의 품에 얌전히 안겨 있는 어린 황녀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