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앨턴 양께서는 시온 공자와 얼마나 가까운 사이인가요?
-혹시……. 약혼 이야기가 오가는 사이?
-설마요. 북부와 남부의 결합은 귀족 사회에 너무 큰 파장을 일으키지 않을까 싶은데.
이렇게 나를 떠보는 식으로.
물론 내 시선 한 번에 꼬리를 말고 도망갔지만 말이다.
난 시온의 미소를 보며 어깨를 살짝 으쓱였다.
‘하긴, 시온이 나랑 비슷했다면 우리가 이만큼 친해지지는 못했겠네.’
나도 내 성격과 분위기가 꽤 세다는 걸 안다. 만약 놈이 나와 동류였다면, 우리는 자석의 같은 극처럼 서로를 마구 밀어내느라 바빴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모스틴도 나랑 다른 족속이라는 게 참 다행이야.’
잠시 생각에 젖어 있는데, 내 오른쪽에 앉은 영애가 눈을 빛내며 날 바라봤다.
“벨라디 양! 앞으로 자주 모임에 나오실 건가요? 이번에 저희 가문에서 티 파티 룸을 새로 꾸몄는데, 벨라디 양을 초대하고 싶어요.”
그녀의 말에 모두 기대를 품고 내 대답을 기다렸다. 난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슬슬 다시 사교 활동을 시작할 참이었어요. 첫 시작으로 툴라 가문의 초대라니, 제게는 영광이죠.”
내 대답에 영애들이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특히 날 초대하려는 툴라 백작가의 영애는 뛸 듯이 기뻐했다.
날 보는 영애들의 눈에는 선명한 동경심이 깔려 있었다. 귀찮게 하는 이들에겐 가차 없지만, 선을 지키며 호감을 표하는 이들에게는 나도 상냥한 편이었다.
내 곁에 모인 영애들과 한동안 못 만난 회포를 푸는데, 멀리서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졌다.
난 고개를 들어 그 시선의 근원을 찾았다. 곧 적개심을 숨기지 않은 채 나를 보는 무리와 눈이 마주쳤다.
‘저 여자도 오랜만이군.’
난 무리의 중심에 서 있는 이를 바라봤다. 그 여자도 나를 노려보던 눈에 더욱 힘을 주었지만, 얼마 버티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저렇게 먼저 눈을 피할 거면, 왜 만날 때마다 시비를 거는 거지?’
사실 저 여자 자체는 그다지 눈여겨볼 인물이 아니다. 하지만 그녀를 조종하는 배후는 말이 달랐다.
난 여자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황태자비 전하께서는 그동안 잘 지내셨을지 궁금하군요.”
저 여자는 몇 년 전, 황태자와 호화로운 결혼식을 올린 황태자비의 사촌이었다.
그리고 황태자비는 자신의 사촌을 꼭두각시로 삼은 채, 사교계를 컨트롤 하려는 사람이었고.
내 말에 조잘조잘 수다를 떨던 영애들이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녀들은 들고 있던 부채로 살짝살짝 입을 가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한쪽이 없으면 다른 한쪽이 우세해질 수밖에요.”
“그래도 벨라디 양이 오셨으니, 사교계의 균형이 다시 돌아올 거예요.”
그렇게 말한 영애들은 황태자비의 최신 소식들을 전달해 주었다. 난 그 이야기를 귀담아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저 여자나 황태자비는 원작에서 중요하게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원작을 떠나서, 난 이전부터 황태자비를 주시하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황태자비가 나를 눈엣가시로 여기니까.’
원래 사교계는 황태자비가 평정하고 있었고, 그녀의 취미는 자신의 입맛대로 영애들을 휘두르는 것이었다.
그러다 황족이 된 후에는 품위를 위해 그 짓을 자제하는 듯했지만…….
‘그것도 얼마 안 갔지.’
저 사촌을 바람잡이로 세워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으니까.
그때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혜성처럼 등장한 이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나였고.’
그 시절의 난 가족에게 소외당한 시간을 외부에서 보상받고 싶었다. 그래서 데뷔탕트 이후 활발한 사교계 활동을 이어 갔다.
때마침, 황태자비의 과한 간섭과 사촌의 오만함에 부담을 느낀 일부 영애들이 새로운 리더를 찾고 있었다.
난 적극적으로 그런 이들을 품에 수용했고, 덕분에 자연스럽게 세력을 키울 수 있었다.
‘이렇게 사교계는 나와 황태자비, 두 부류로 나뉘었지.’
뒤늦게 이 흐름을 눈치챈 황태자비는 귀부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려고 했다.
하지만 사교계에서 잔뼈가 굵은 그녀들은 젊은 층의 분열을 상당히 재미있는 눈으로 구경하는 입장이었다.
결국 사교계의 왕으로 군림하고 있던 황태자비는 눈 깜박할 사이에 자신의 영향력을 나와 양분하게 되었다.
이 과정을 빠삭하게 알고 있는 영애들이 한마디씩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 황태자비 전하께서 저희를 티타임에 초대해 주셨어요.”
“맞아요, 그곳에서 참 멋진 시간을 보냈답니다.”
“벨라디 양과 함께였다면 더 좋았을 텐데…….”
“황태자비 전하께서 벨라디 양께도 초대장을 보내시겠지요?”
마지막 물음에 난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저도 그 순간이 기다려지네요.”
내 말에 영애들이 까르르 웃었다. 공식적인 자리라 말은 이렇게 했지만, 우리 모두 알고 있었다.
황태자비가 절대 나를 초대하지 않을 것이란 걸.
‘내가 없는 동안 나와 친한 영애들을 회유하려고 했나 본데.’
난 주위에 있는 영애들의 얼굴을 쓱 훑어봤다.
그녀들은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전부 내 곁에 꼭 붙어 있었다.
‘아무도 포섭하지 못했나 보군.’
하긴 여기 있는 이들 모두 날 진짜 리더로 인정하고 있는데, 어떻게 포섭에 성공하겠어?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한다고, 난 황태자비에게 벗어나 내 품에 들어온 사람들에게 최선의 호의를 베풀었다.
특히 황태자비의 신경에 거슬렸다는 이유로 사교계에서 퇴출당한 영애들. 난 이들이 다시 복귀할 수 있도록 여러모로 도움을 줬다.
그 과정에서 일부러 다른 영애들의 힘을 빌리기도 했고 말이다.
‘덕분에 내 이미지도 챙겼고, 영애들 사이에도 끈끈한 전우애가 생겼지.’
그 전우애는 이런 순간 더 빛이 나고 말이다.
내가 소홀했던 동안에도 내 사람들이 곁을 지켰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다.
난 황태자비 무리에게 보여 주듯, 들고 있던 샴페인 잔을 영애들의 잔에 부딪쳤다. 그 순간 부채를 들고 있던 황태자비의 사촌이 인상을 찡그리며 자리를 피했다.
난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샴페인을 한입 마셨다.
‘솔직히 황태자비와 내 사이가 나쁠 이유는 없는데.’
황실과 앨턴 공작가는 원활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니까.
그러니 이건 순전히 개인과 개인의 문제라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딱 한 번, 황태자비가 날 티타임에 초대한 적이 있었다. 내가 사교계에 막 데뷔했을 무렵의 일이었다.
-제 밑으로 들어오세요, 앨턴 양. 그럼 앨턴 양을 제 시녀장으로 임명해 드리지요.
날 부른 황태자비는 오만한 목소리로 제안했다.
참고로 그때의 난 가족 외에는 절대 고개 숙일 생각이 없던 아이였다.
-재미있네요. 제국에 하나뿐인 공녀에게 시녀가 되라니. 황실의 피는 하나도 흐르지 않는 분께서…….
내가 이렇게 대답해도 그녀는 날 벌할 수 없었다. 황후도 황녀도 아닌, ‘황태자비’라는 지위는 나와 엇비슷하니까.
내 대답을 듣고 일그러졌던 황태자비의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이렇게 첫 대화부터 그녀와 나 사이에는 아주 깊은 분열이 생기고 말았다. 덕분에 황태자비와 내가 사이좋게 지낼 일은 상당히 요원할 일이었다.
‘내 등장으로 본인의 입지가 줄어든 게 불만이라지만……. 어쩌겠어. 이 영애들은 그쪽보다 내가 더 좋다는데.’
난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연회의 분위기는 이렇게 무르익어 갔다.
그녀들과 여유로이 친분을 다지는데, 한 영애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들으셨어요? 마갈라 제국으로 유학을 가셨던 킬리언 전하께서 이번에 돌아오셨대요.”
그 말을 꺼낸 건 외무대신의 고명딸, 엘로샤 버그만이었다.
예상치 못한 이름에 모두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바라봤다.
“맙소사, 킬리언 전하요?”
“정말 그분이 돌아오셨다고요?”
영애들의 호들갑에 엘로샤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께 들은 것이니 확실해요!”
“어머, 그런데 사교계는 왜 이렇게 조용할까요?”
“그러게 말이에요.”
“전 아주 어렸을 때 이후로 전하의 소식을 처음 들어요!”
분위기는 한층 더 소란스러워졌다.
영애들은 본격적으로 킬리안 황자의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유학 생활이 정말 길었죠? 성년식도 마갈라 제국에서 치르셨잖아요.”
“도대체 왜 돌아오시지 않았던 걸까요?”
“혹시 버그만 후작님께 더 들은 건 없나요?”
“으음……. 그건 저도 잘…….”
엘로샤는 거기까지 말하는 건 곤란한지 얼버무리는 소리를 냈다.
난 그런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 상냥하게 웃어 보였다.
“저도 궁금하군요. 엘로샤 양, 더 자세히 말해 봐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튀어나온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자, 엘로샤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 그러고 보니…….”
그녀는 여기까지 말하고는 힐끔 주위를 살펴본 후 목소리를 낮췄다.
“마갈라 제국에서 킬리언 전하의 여성 편력이 심하셨다고……. 이번에 귀국하실 때도 전하를 배웅하러 온 여인이 한둘이 아니었대요. 거기에 제국의 쌍둥이 황녀도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세상에.”
“그게 정말인가요?”
“그것 때문에 황태자 전하께서 킬리언 전하의 귀국 소식을 쉬쉬하셨는데, 킬리언 전하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오늘 아침부터 외출을 하셨다고 해요.”
엘로샤의 말에 모두들 인상을 찡그렸다.
“이런, 어렸을 적에는 멋진 분이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하긴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까요.”
“황태자 전하와 황제 폐하께서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시겠어요.”
“그나저나 아침부터 외출을 하셨다면, 오늘 겨울 연회에는 불참하시려는 모양이네요.”
난 그녀들의 말을 가만히 들으며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킬리언 앨러만 데커딜…….’
어린 나이에 마갈라 제국으로 유학을 떠난 후, 한 번도 귀국하지 않은 2황자. 당연히 나와는 접점이 전혀 없는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그가 꽤나 신경 쓰였다.
‘원작에서 킬리언 황자는 유학을 떠나지 않았으니까.’
윌리엄이 스파이였던 건, 원작이 시작되기 훨씬 전의 일이니 그러려니 싶었다.
하지만 킬리언 황자는 아니었다.
그는 왜 유학을 떠난 걸까? 어떻게 원작과 다른 행동을 한 거지?
솔직히 말하자면 지난 반년간은 할 일이 너무 많아 그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이름을 듣고 나니 새삼 여러 의문들이 생겼다.
영애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에 잠겨 있는데, 누군가 내게 다가왔다.
“오랜만이야, 벨라디.”
난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고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