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우리의 말을 듣던 멜도르는 고개를 갸웃갸웃거리며 주위를 서성였다.
그러다 시선이 마주치면 눈을 치켜떴는데, 그 모양새가 몸을 억지로 부풀리는 작은 짐승 같았다.
“궁금해?”
“편지나 내놔!”
그러더니 브룩스 경의 눈치를 보며 말을 고쳤다.
“아니, 줘!”
브룩스 경은 그런 제자를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다 멜도르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토닥였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멜도르 님.”
“네?”
“오늘 훈련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수업 일정은 다시 차분히 조정하도록 하지요.”
“네에?”
“수고하셨어요, 브룩스 경. 멜도르에게는 제가 말해 놓을 테니 그만 들어가세요.”
“예, 벨라디 님, 그럼 저는 이만.”
브룩스 경은 애썼다는 듯 다시 한번 멜도르의 어깨를 툭툭 다독이고는 연무장 밖으로 향했다.
항상 엄격하던 스승의 다정한 모습에 멜도르는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이게 뭐야?”
“수고했어, 멜도르. 앞으로는 이렇게 과하게 훈련을 받지 않아도 돼.”
“……뭐라고?”
“자, 너도 읽어 봐.”
난 편지를 멜도르에게 넘겼다.
휙, 그걸 낚아챈 멜도르의 눈이 빠르게 내용을 훑었다.
「벨라디 네 편지는 잘 받았다.
멜도르의 훈련이 또래에 비해 과하다는 것은 나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멜도르 그 어린 건 아무것도 모른 채 부모인 내 말을 믿고 따르는 거겠지.
……네 말대로 가장 중요한 건 멜도르의 마음인데 말이다.
검에 매달리고 있던 건 멜도르가 아니라 도헤미아와 나였던 걸지도 모르겠다.
이제 멜도르에게 더 많은 길을 열어 줘야겠구나.
브룩스 경에게 말해 멜도르의 검술 훈련을 줄이도록 해라.
그 외의 수업 조정은 네게 맡기마.」
멜도르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편지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긴 내용도 아닌데 왜 아무 말도 없는 건지.
난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멜도르. 난 네가 검술 수업을 줄이고 마법을 더 심도 있게 배웠으면 하는데……. 너 울어?”
“크흡!”
멜도르가 서둘러 팔뚝으로 눈을 문질렀다.
“아니거든! 안 울거든!”
“우는 게 뭐 창피하다고 숨기니? 며칠 전에도 내 앞에서 울었으면서.”
내 말에 멜도르가 고개를 번쩍 들며 발끈했다.
“그건 네가 울린 거잖아!”
“뭐? 너?”
“누, 누나가 울린 거잖아!”
“울린 거라니. 부모님이 제대로 못 한 훈육을 한 거지.”
“그게 무슨 훈육이야! 누나가 돼서 동생을 그렇게 굴렸던 게 창피하지도 않냐?!”
멜도르는 이제 숨길 생각도 하지 않고 펑펑 울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저렇게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다니, 참 기운도 좋은 놈이다.
난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하나도 창피하지 않아. 날 무시하는 널 그대로 두는 게 더 창피했을 거야.”
“무, 무시한 적 없어!”
“양심이 없는 것도 훈육해야 하나?”
내 말에 멜도르가 서둘러 입을 다물었다. 난 내 눈치를 살피는 멜도르를 보며 고개를 천천히 기울였다.
확실히 훈육이라는 명목으로 멜도르에게 너무 과한 기합을 준 건 맞았다. 하지만 애초에 나는 멜도르를 훈육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건 멜도르를 정말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 싶은 아버지나 하는 것이고, 난 단지 그걸 핑계 삼아 수없이 날 무시하고 감정 쓰레기통 취급을 했던 놈을 혼내 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오히려 처음에는 대화를 시도하려고 했던 나 자신에게 칭찬을 날리고 싶은데?’
사실 멜도르는 나에게 반쯤 타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내가 멜도르에게 당근을 준 이유는 역시나, 놈이 아직 어렸기 때문이다.
‘앞으로 너 하기 나름이겠지. 우리가 다시 가족으로 돌아갈지, 아니면 완전히 남이 될지.’
나는 멜도르를 주시하며 의미 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멜도르는 약간 경계를 누그러뜨리며 물었다.
“도대체 왜 이런 편지를 보낸 거야?”
“뭐가?”
“왜 나 좋은 일을 하는 거냐고. 너, 아니 누나는 나를 싫어하잖아.”
그렇게 물어보는 멜도르의 눈은 특유의 천진함이 담겨 있었다.
저것까지 포함해서 멜도르는 참 어머니와 똑같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더 놈에게 약해지는 걸지도.
난 고개를 기울였다.
“글쎄, 내가 나름 정이 많아서?”
내 말에 멜도르가 더 혼란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드물게 내보인 내 진심인데, 안타깝게도 멜도르는 헷갈리는 모양이었다.
아리송한 멜도르를 구경하는 건 꽤 우스운 일이었지만, 볼일은 이제 끝났다.
“수업 일정은 네가 스승들과 타협해서 보고해. 네 의견을 전적으로 존중해 줄 테니.”
난 할 말을 마무리하고 연무장을 나섰다. 뒤에서 멜도르의 시선이 계속 느껴졌지만, 돌아보지 않은 채 걸음을 옮겼다.
그로부터 며칠 후.
멜도르의 수업은 검술의 비중을 확 낮추고, 대신 마법의 비중을 확 올렸다.
확실히 수업 일정을 조정하자 멜도르의 히스테리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리고 브룩스 경이 나를 따로 찾아왔다.
-저와 같이 공작님을 설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 역시 멜도르의 성격이 점점 더러워지는 이유가 검술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참, 참된 스승이라니까.’
제플린이 싫은 건 아니지만, 브룩스 경에게 수업을 받아도 재미있었을 것 같다.
제플린이 들으면 무릎 꿇고 한탄할 생각을 하며 저택의 겨울 예산을 체크하고 있는데, 하녀 한 명이 다가왔다.
“벨라디 님.”
“무슨 일이지.”
“황실에서 초대장을 보냈습니다.”
“황실?”
난 하녀에게 받은 고급스러운 초대장 봉투를 펼쳤다.
안에는 올겨울 첫눈을 기념해 황실에서 연회를 연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걸 읽은 난 창밖을 바라봤다. 지난 밤 사이 내린 눈이 소복이 쌓인 정원은 참 고즈넉하고 아름다웠다.
“슬슬 겨울 연회 시즌이 다가온 건가.”
겨울은 최악의 계절이었다.
수많은 평민이 겨울의 추위와 식량난에 괴로워했고, 부유한 귀족들은 따뜻한 남쪽으로 도망갔다. 특히 우리 앨턴가의 뿌리인 북부는 그 강도가 훨씬 심했고.
뭐, 그것도 전부 과거의 일이다.
위대한 황제 한 분이 제국의 모든 판도를 뒤집어 줬으니까.
‘그리리카 켄뉴브 데커딜’.
바로 켄뉴브 학교를 설립한 선황 말이다.
***
전생의 기억이 돌아오면서 난 한 가지를 깨달았다.
‘이곳도 결국은 하나의 세계구나.’
원작에서 나오지 않은 역사와 배경을 배울 때면, 이곳도 결국 사람 사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여기는 지구와 다르게 ‘마법’이라는 것이 존재했지만.
역사에 따르면 대륙은 언제나 전쟁으로 혼란스러운 곳이었다. 그리고 마법은 일당백의 역할을 하는 최고의 공격이자 방어의 수단이었다.
항상 피바람이 불던 시절.
그러나 200년 전, 정령이라는 존재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 인간의 전쟁을 중재했다.
[의미 없는 전투를 반복하여 세계를 어지럽히지 마라.]
정령의 개입으로 대륙의 모든 나라는 ‘평화 협약’을 맺어야 했다. 그 협약은 정령의 고대 마법으로 절대 깨질 수 없는 불문율이 되었다.
그렇게 대륙은 전례에 없던 대평화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꿈과 사랑, 희망이 가득한 로판 세계관에 딱 어울리는 시대이지.’
물론 이 세계는 마물도 있고 타 대륙의 존재도 있으니 병력을 소홀히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난세는 끝났다.
자연스럽게 최강의 공격 수단이었던 마법도 학문으로 변화했다. 그 흐름 속에서 마법사들은 독자적인 연구 기관을 만들었는데, 그게 바로 지금의 마탑이다.
마탑의 마법사들은 가끔 외부의 의뢰를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개인 연구에 몰두했다. 애초에 진입 장벽이 높았던 마법은 점점 그들만의 전유물이 되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기존 마법사들과 전혀 다른 사상을 가진 인물이 등장한다.
-마법은 수많은 사람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 힘이다!
그동안 마법은 화려하고 강력한 공격 마법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녀는 거기에서 벗어나 아주 실용적인 마법 기술들을 개발해 냈다. 그리고 그걸 이제 막 싹 트고 있던 과학과 결합했다.
마법 수식이 아닌 마법 기술을 만들고, 그것을 과학과 결합한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덕분에 보석에만 새길 수 있었던 마법이 다양한 형태로 변환되어 효과를 발휘했으니까.
마법 기술과 과학이 탄생시킨 역사적인 첫 번째 발명품. 그것이 바로 지금 내 집무실을 밝히고 있는 저 ‘전등’이었다.
중세 시대에 버금갔던 소설 속 열악한 환경을 현대와 비슷한 수준으로 끌어올려 준 ‘마법 공학’이 시작된 것이다.
‘그 마법 공학의 창시자이자 역사상 가장 혁명적인 마법사로 불리는 이가 그리리카 선황이고.’
마법 공학이 처음 나왔을 때, 기존 마법사들은 이를 이단아 취급했다.
하지만 그 취급은 얼마 가지 못했다.
그리리카는 평범한 마법사가 아닌 고귀한 황족이었다. 또한, 마탑을 이끄는 장로들의 상당수는 과거 황실에 충성을 바쳤던 전투 마법사 출신이었다.
그 때문에 마법사들의 반발은 순식간에 잠재워졌다. 오히려 마법 공학의 가능성을 알아본 몇몇은 그리리카 황녀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그렇게 마법 공학은 꽃폈고, 수많은 발명을 성공시켰지.’
탄생한 발명품 중 가장 성공적이고 대중적인 물건으로 손꼽히는 것은 수도와 난방 시설이었다.
새로운 수도, 난방 시설 덕분에 제국민들은 편하게 물을 쓸 수 있었고, 최악의 계절이었던 겨울을 안락이 보낼 수 있었다.
그때 당시 황녀였던 그리리카는 구호의 목적으로 수도와 난방 시설을 빈민층이 사는 곳까지 지원했다.
덕분에 얼어 죽는 이들이 없어졌고, 위생까지 관리되었다. 질병이나 전염병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평민들 사이에서 황녀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정도로 높아졌다.
이제껏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나 크게 존재감이 없었던 그리리카 황녀.
그녀는 이 인기를 놓치지 않고, 세력을 키워 나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황제의 자리도 욕심냈고.’
다만 황녀의 위로는 이미 황자가 셋이나 있었다.
때문에 그녀를 반대하는 세력이 많았지만, 기세는 차근차근 황녀에게로 기울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황녀는 초반에 누구든 자신이 만든 발명품을 살 수 있게 허락했는데, 권력 싸움에 뛰어들며 자신의 세력에게만 구매를 허락한 것이다.
이 때문에 같은 귀족이라도 황녀의 세력과 아닌 이들의 일상이 점점 벌어지기 시작했다. 반대파 귀족들은 황녀의 독점에 대해 엄청난 불만을 토로했다.
하지만 황녀는 이 한마디로 불만을 일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