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벨라디는 말 그대로 정말 엄청난 힘으로 멜도르를 제압했다.
아무런 준비도 못 했던 멜도르는 벨라디에게 처참히 밀려, 그녀가 시키는 대로 따라야만 했다.
‘무식하게 힘만 세서는!’
아버지가 떠나던 그날, 멜도르는 벨라디에 의해 하루 종일 무릎을 꿇고 손을 들어야만 했다.
그냥 무시하고 도망치고 싶었지만, 어쩐지 벨라디의 무표정 앞에서는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다.
‘마치 아버지를 상대하는 것처럼……!’
벌을 받은 것보다 벨라디의 기에 짓눌린 순간이 멜도르에게는 더 치욕스러웠다.
그날 외에도 멜도르는 몇 번 더 벨라디에게 반발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항상 기상천외하게 힘든 기합들뿐이었다.
그렇게 당하는 동안, 멜도르는 알게 모르게 벨라디를 ‘이길 수 없는 상대’라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더더욱 그녀를 보고 겁을 먹는 건지도 모른다.
‘으으! 어머니와 아버지도 이렇게 나를 혼낸 적이 없는데, 그깟 누나라는 게 뭐라고!’
뭐라고 자신을 이렇게 대한단 말인가!
도저히 반항할 수 없었던 그 위압감은 또 뭐고!
‘설마 힘을 숨긴 채 가만히 때를 기다렸던 건가?’
그러고 보니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북부로 떠난 것도 수상했다.
분명 그 직전까지는 북부 동굴 탐사를 반대하시는 것 같았는데, 그렇게 하루 만에 의견을 바꾸시다니.
‘설마 아버지가 북부로 떠나신 것도 벨라디 앨턴의 계략이었던 건가?’
그렇다면 벨라디는 정녕 마왕까지 실직시킬 악마였다.
멜도르가 그런 악마를 이길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내 나이가 조금만 더 많았더라도……!’
그러면 이렇게 맥없이 당하지 않았을 텐데!
멜도르는 이를 악물고 주먹을 꽉 쥐었다.
“두고 보자, 벨라디 앨턴! 절대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
한참을 씩씩거리며 베개를 때리던 멜도르는 곧 하인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소공작님.”
“로버는 어디 있어?!”
“집사님은 온실에서 공사를 진행 중입니다.”
그 말에 멜도르는 인상을 팍 썼다.
‘얼마 전부터 벨라디 앨턴의 근처를 서성거리더니! 로버 그 자식!’
하녀장인 에밀리는 원래부터 벨라디의 수족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로버는 총집사가 되기 전부터 아버지와 멜도르를 보필하던 보조 집사였다. 벨라디보다 자신과 더 오랜 시간을 함께했고 친했단 말이다.
그런데 벨라디 엘턴은 언제 로버까지 구워삶은 건지!
‘이 방법은 쪼잔한 것 같아 쓰지 않으려 했지만……. 어쩔 수 없지!’
자신이 이렇게까지 하는 건 다 벨라디 때문이었다.
악마의 폭정을 멈추기 위해, 멜도르는 구조 요청을 보내기로 했다.
‘아버지한테 다 일러 버릴 거야!’
“종이와 펜을 준비해!”
“예, 소공작님.”
하인은 빠르게 종이와 펜을 꺼냈고, 멜도르는 자신의 억울함과 벨라디의 흉포를 거침없이 써 내려 갔다.
「그리운 아버지!
벨라디 앨턴 그게 드디어 미친 것 같아요! 저를 무력으로 짓누르고 자신이 이 저택의 주인인 것처럼 마구 휘젓고 다닙니다!
제가 막으려 했지만 역부족이었어요! 아직 제 나이가 어린 게 이렇게 분할 때가 없습니다!
당장 북부에서 돌아오셔서 집안의 질서를 다시 잡아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하루빨리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오기를 후계자로서 간절히 바랍니다!
망가진 집안 걱정에 밤을 새우는 멜도르.」
“이걸 당장 북부로 전달해! 제일 빠른 방법으로!”
“예, 멜도르 님.”
‘넌 이제 끝이야, 벨라디 앨턴.’
아버지가 돌아오시면 모든 건 원래대로 돌아갈 것이다.
그때가 되면 그 악마를 마음껏 비웃어 줘야지!
멜도르는 그 순간을 상상하며 사악하게 웃었다.
***
“벨라디 님, 여기 있습니다.”
난 하인이 건넨 편지를 받아 들었다. 하늘색 봉투를 뜯고 안을 보니 내용이 아주 가관이었다.
“흐음, 멜도르가 어지간히 억울했나 보네. 수고했어, 당분간 멜도르가 하는 건 전부 나한테 보고하도록 해.”
“예, 벨라디 님.”
멜도르의 하인이 고개를 푹 숙인 후 내 방을 나섰다.
난 편지를 가만히 보다 휙 벽난로 속으로 던졌다. 멜도르의 편지가 불 속에서 화르륵 타올랐다.
‘네 하인까지 전부 내 손에 들어온 걸 모르는구나, 멜도르.’
멜도르는 아마 로버 정도만 내 쪽에 붙었을 거라 생각하겠지. 안타깝지만 꽤 오래전부터 이 집안의 모든 사용인은 멜도르보다 내 명령을 우선시하고 있었다.
아주 뿌듯한 현상이었다.
‘그나저나 이제야 편지를 쓰다니.’
아버지가 저택을 떠나시고 벌써 보름이 흘렀다.
그날 이후, 멜도르는 나한테 찍소리 하나 내지 못하는 상태였다. 언제나 우쭈쭈 받으며 자랐던 왕자님이 이런 취급을 버틸 리 만무했다.
그래서 삼 일도 못 버티고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낼 줄 알았는데…….
지금까지 참은 것이 나름 용했다.
‘적절히 채찍을 사용했으니, 조금씩 당근을 던져 줄까.’
멜도르가 조금이라도 나이가 많았다면, 아주 가차 없이 힘으로 눌렀을 것이다. 아니, 이제껏 내가 무시당한 세월을 생각하면 그 정도로는 부족하지.
하지만 멜도르는 현대로 따지면 아직 초등학생이었다. 그리고 난 어린아이에게 마지막 기회를 줄 수 있는 사람이었고.
‘그놈이 정말 순수하게 못된 건지, 아니면 스트레스 때문인 건지.’
어디 한번 보자고.
타닥타닥 불타고 있는 벽난로를 바라보던 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미리 준비된 종이 위에 편지를 써 내려갔다.
받을 사람은 당연히 아버지였다.
“이걸 북부로 보내.”
“예, 벨라디 님.”
다 쓴 편지를 하녀에게 넘긴 후, 가볍게 기지개를 켰다.
지난 보름 사이, 어머니의 생일이 지나갔다. 그럼 아버지는 네시아를 만났겠지?
아버지는 갑작스럽게 생긴 아이 때문에 생각이 많아졌을 것이다. 그러니 내 요구를 승낙해 줄 확률이 높았다.
‘당근을 받은 멜도르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 우스운 표정이 조금 궁금해졌다.
***
아버지의 답장은 빠르게 도착했다.
편지를 읽어 가던 난, 마지막 문장에서 입꼬리를 씩 올렸다.
「네게 맡기마.」
‘역시 마음이 약해진 모양이군.’
난 만족스럽게 웃으며 아버지의 편지를 곱게 접었다. 그리고 대기하고 있는 하녀에게 물었다.
“멜도르는 지금 어디에 있지?”
“연무장에서 검술 훈련을 하고 계십니다.”
“잘됐네.”
훈련을 하고 있다면 스승인 브룩스 경도 함께 있을 것이다. 난 따라오려는 하녀들을 방에 두고 혼자서 멜도르의 개인 연무장으로 향했다.
멜도르의 연무장은 본관 오른쪽에 있는 기사단 건물 2층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곳으로 들어서니 우렁찬 기합 소리가 들려왔다.
“하앗!”
먼지투성이의 멜도르가 목검으로 짚 인형을 내리치고 있었다.
“허리를 똑바로 펴십시오!”
그 옆에서는 노장인 브룩스 경이 엄하게 지도하고 있었다.
나도 검을 배우고 있어서인지, 멜도르의 자세가 눈에 확 들어왔다.
‘확실히 멜도르는 검에 소질이 없어.’
검을 배운 지 몇 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놈의 자세는 어색한 부분이 많았다. 브룩스 경도 그걸 아는지 멜도르의 자세를 계속 교정해 주었다.
나는 일부러 발소리를 내며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두 사람이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너……. 누나가 여기까지 어쩐 일이야.”
“벨라디 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난 퉁명스러운 멜도르를 힐끔 바라보다, 브룩스 경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이군요, 브룩스 경. 훈련을 방해해서 미안하지만, 전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어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들고 있던 편지를 그들에게 보여 줬다. 그걸 보자 멜도르의 눈이 반짝였다.
“아버지의 편지지!”
“맞아, 멜도르.”
“뭐라고 적혀 있어? 곧 돌아오신대?!”
“아니, 북부의 일이 너무 바빠서 올 틈이 없으시다네?”
내 대답에 멜도르가 인상을 팍 썼다.
“그럴 리 없어! 이리 내!”
쯧쯧, 자신의 호소가 담긴 편지는 이미 태워진 것도 모르고.
멜도르는 목검을 바닥에 팍 내팽개치며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 무례한 행동에 브룩스 경이 단호하게 외쳤다.
“기사의 길을 걸으시는 분이 지금 무슨 짓입니까!”
그 외침에 멜도르의 몸이 우뚝 굳었다.
멜도르는 억울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다 쓰윽 몸을 돌렸다. 그리고 뒤쪽에 있는 브룩스 경을 바라봤다.
“죄송합니다, 스승님.”
“레이디에게 그렇게 손을 뻗는 건 매우 무례한 일입니다. 가족이라도 예법을 지켜야 함을 잊지 마십시오.”
“네…….”
‘역시 멜도르가 아버지나 브룩스 경의 말은 잘 들어.’
멜도르는 검술에 소질이 전혀 없지만, 기사들을 좋아했다. 그건 검을 배우지 않았던 원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마도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선망이겠지. 그래서 원작의 첫째를 그렇게 좋아하고 따랐나 보다.
‘흠, 이제 나도 검 꽤 쓰는데. 그럼 나도 따를까?’
난 순수한 의문을 뒤로하고, 브룩스 경에게 말을 걸었다.
“멜도르를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아버지와 이렇게 오래 떨어지는 게 처음이니 그리워서 그랬나 봐요.”
브룩스 경이 멜도르를 혼내는 것이 길어지면 내 시간만 뺏긴다.
대충 상황을 마무리시킨 난 편지를 브룩스 경에게 넘겼다.
“읽어 보세요, 브룩스 경.”
“제가 봐도 괜찮은 겁니까?”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는 직접 보시는 게 나을 거예요.”
브룩스 경은 편지를 열어 보았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님께서 드디어 큰 결심을 내리셨군요.”
“그동안 제가 꾸준히 설득했었는데, 브룩스 경도 마찬가지였다고 들었어요.”
“벨라디 님도 그러셨군요. 저 혼자 보고를 드렸을 때는 재고도 하지 않으셨는데, 역시 따님의 말에는 힘이 있나 봅니다.”
브룩스 경이 편지를 돌려주며 살짝 웃었다.
나 역시 그를 보며 방긋 미소 지었다.
‘물론 난 꾸준히 설득한 적 없지만.’
로버의 말에 의하면, 브룩스 경은 아버지께 계속 같은 보고를 올리고 있었다. 나는 거기에 숟가락만 올린 셈이다.
애초에 멜도르에게 약했던 아버지다. 거기에 네시아까지 돌보게 되면서, 양육에 대해 생각이 많아지신 모양이었다.
‘하긴 그것까지 예측하고 타이밍을 만든 건 나니까. 내 덕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모든 건 전부 내 계획대로.
난 언제나처럼 당당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