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K-장녀가 육아물에 빙의하면-23화 (24/197)

23.

“그래서 어머니와의 추억이 있는 연구실에 올라갔는데, 우연히 이 일기를 발견했어요.”

하녀들의 보고에 따르면, 아버지는 요즈음 어머니의 빈 침실을 자주 찾는다고 했다. 어머니의 생일이 다가오면서 그녀가 몹시 그리운 모양이었다.

본인도 그러하니, 내 말을 철석같이 믿는 눈치였다.

“연구실 물건은 다 정리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것이 있었군……. 수고했다.”

항상 얼어붙어 있던 아버지의 표정이 잠시 아련하게 변했다.

난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조심스러운 태도로 말했다.

“그런데 아버지……. 아버지께서 살펴봐야 할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내 말에 그가 일기에서 시선을 떼 나를 바라봤다.

“제가 어제 일기를 잠시 읽어 봤는데, 어머니께서…….”

이렇게 말하고 잠시 입을 다물자 아버지의 미간이 좁혀졌다.

“뭔데 그러지.”

“……아무래도 제가 말하는 것보다는 아버지께서 직접 보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제가 살짝 접어 두었으니 찾기 편하실 거예요.”

내 말에 그는 민첩하게 일기를 넘겼다. 그러자 딱 내가 표시한 그 부분이 펼쳐졌다.

그걸 읽는 아버지의 눈동자가 점점 흔들렸다.

‘하긴 어머니가 의미심장하게 일기를 써 놓기는 했지.’

사정을 다 아는 나도 수상하다고 느끼는데, 아버지에게는 얼마나 크게 다가올까.

내 예상대로 그의 목소리가 떨려 왔다.

“보물?”

“아무래도 어머니께서 북부에 무언가를 두고 오신 것 같은데. 그걸 저희가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찾을 필요도 없이, 그 보물은 알아서 아버지에게 올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이렇게 덧붙였다.

“보물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러는 순간에도 다른 누군가가 어머니의 보물에 손을 댈까 걱정이 돼요.”

난 한 손에 뺨을 묻고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눈의 정령은 믿을 수 있는 존재일까요?”

“……당장.”

아버지가 낮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당장 리켄 남작과 로버를 불러라. 예정되었던 가문 회의를 내일로 앞당겨야겠다.”

그의 눈을 보니 ‘혹시나 북부로 가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라는 걱정은 집어치워도 될 것 같았다.

‘바로 날아갈 기세로군.’

예정된 가문 회의의 안건은 당연히 ‘북부 동굴탐사’이다.

아버지는 여기서 무조건 찬성표를 던지실 거다. 당장 북부로 가야 하는데, 어머니의 보물을 찾으러 간다는 명목은 부족하니까.

‘하지만 때마침 동굴이 발견되었으니, 얼마나 좋은 핑곗거리야?’

게다가 그 동굴은 마법 보석 광산이 확실하니, 우리 가문에게도 큰 이익이었다.

“예, 아버지.”

난 걱정스럽다는 얼굴을 유지한 채 집무실을 나왔다. 그리고 대기하고 있던 하인에게 아버지의 명을 전달했다.

“리켄 남작과 로버를 불러. 지금 즉시.”

“네, 벨라디 님!”

하인이 사라지는 걸 본 후, 나는 유유히 내 방으로 향했다.

‘좋아, 일이 내 뜻대로 잘 굴러가네.’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자 새벽과는 다른 의미로 내 가슴이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북부행은 온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급하게 수행 기사단을 꾸려야 했고, 텔레포트 진을 관리하는 마탑에 웃돈까지 주면서 예약을 잡아야 했으니까.

아버지가 직접 간다는 소식을 들은 북부의 성도 아마 난리가 났을 것이다.

그렇게 소란스러운 준비가 지나고, 오늘 아침.

“멜도르, 넌 우리 앨턴의 하나뿐인 후계자이며 장남이다. 항상 책임감을 느끼고, 그 위치의 무게를 잊지 말도록.”

“네, 아버지! 명심하겠습니다!”

“벨라디.”

“예, 아버지.”

“넌 크게 걱정 안 하겠다.”

아버지는 이렇게 인사를 남기고 북부로 떠난 것이다.

드디어 아버지가 없어진 저택.

혼자 남은 멜도르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누, 누나.”

“응? 목소리가 작은데?”

“그래! 누나! 누나누나누나! 됐냐? 이 악마야!”

멜도르는 훌쩍거리며 버럭 소리쳤다.

그 반응에 내 손이 쓱 축음기로 향했다. 그걸 본 멜도르가 깜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누님! 그러지 마요!”

“그래, 멜도르. 오늘은 그렇게 좋아하는 교향곡이 듣기 싫은가 보네?”

멜도르는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교향곡 이제 싫어. 너무 싫어.”

난 멜도르의 등을 퍽퍽 다독였다.

“앞으로도 꼬박꼬박 누나라고 불러야 한다? 안 그러면 누나는 다시 축음기를 틀어야 할지도 몰라.”

“알겠다고오, 크흑…….”

드디어 집안의 위계질서를 바로잡은 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

멜도르의 성난 발걸음이 성큼성큼 온실 쪽으로 향했다. 실제로도 그는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라 있었다.

온실 앞으로 가니 그곳은 이미 여러 인부와 하인들이 오가며 가구들을 옮기고 있었다. 멜도르는 그걸 보며 버럭 소리쳤다.

“비켜!”

멜도르는 거센 손길로 인부의 어깨를 퍽 밀치고 온실 안으로 들어섰다.

안은 바깥보다 더 정신이 없었다. 그 가운데에서 휙휙 고개를 돌리던 멜도르는 인부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는 여자를 발견했다.

길쭉한 팔과 다리. 틀어 올린 검은 머리와 도드라진 하얀 피부. 곧게 뻗은 목.

사람들을 당당히 부리는 모습이 마치 주인 행세를 하는 것 같아서, 멜도르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그는 습관처럼 벨라디를 불렀다.

“야!”

순간 멜도르는 몸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와 똑같은 붉은 눈동자가 형형한 빛을 내며 그를 바라봤기 때문이다.

“누, 누나!”

다급히 수정된 멜도르의 호칭에 벨라디가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무척 간단한 행동임에도, 멜도르의 목은 긴장으로 바짝 타들어 갔다.

‘큭, 이게 무슨 꼴이야.’

언제나 자신의 밑에 있던 벨라디였는데, 왜 이렇게 압박감이 느껴지는 건지!

멜도르는 앨턴가의 장남이었고, 항상 당당했으며, 남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는 길만 걸어 온 아이였다. 하지만 요 근래 그는 이제껏 겪어 보지 못한 굴욕적인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벨라디가 내뿜는 위압감에 기가 죽은 멜도르는 잠시 ‘도망갈까?’ 고민하다가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이렇게 겁먹으면 저 악마를 멈출 수 없어!’

벨라디는 지금 어처구니없는 공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바로 어머니의 온실을 마음대로 뜯어고치려는 것이다!

비겁하게 자신을 이용해 어머니의 온실을 망쳤으면서, 저렇게 손까지 대려 하다니……!

아무리 아버지가 허락했다고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내가 막아야 해!’

멜도르는 아버지가 떠나기 전 했던 말을 상기했다.

-넌 우리 앨턴의 하나뿐인 후계자이며 장남이다. 항상 책임감을 느끼고, 그 위치의 무게를 잊지 말도록.

아버지의 말처럼 지금 이 저택의 책임자는 자신이었다.

아버지의 말을 주문처럼 외운 멜도르는 단전에서부터 용기를 끌어모아 외쳤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멜도르가 애써 큰소리를 낸 것과는 대조되게 벨라디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보면 몰라?”

“누가 몰라서 물어? 어머니의 온실에 무슨 짓을 하는 거냐고 묻는 거잖아!”

그 말에 벨라디가 다시 입을 다물고 멜도르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단지 그뿐이었는데, 끌어모은 멜도르의 용기가 순식간에 흩어지고 말았다.

“이 온실은 내 것이라고 전에 말했던 것 같은데.”

벨라디가 지겹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그 반응에 멜도르는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그, 그랬지.”

“그럼 무엇을 하든 내 마음인 것도 말해 줘야 아니?”

“아니…….”

“할 말은 그것뿐이야?”

“으……. 으응.”

“그럼 가서 네 할 일이나 해.”

“알겠어…….”

결국 멜도르는 어깨를 축 내리며 온실을 나왔다.

터덜터덜.

맥없던 멜도르의 발걸음은 어느 순간 달음박질로 변해 있었다.

‘크흑, 분하다-!’

자신은 이런 취급을 받을 사람이 아닌데!

불과 보름 전만 하더라도 벨라디는 자신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저런 기세를 내뿜지도 못했고, 오금이 저릴 것 같은 시선도 보내지 않았다.

이 모든 건 아버지가 북부로 향했던 그날부터 시작됐다.

멜도르는 아직도 그날의 악몽이 생생했다.

그가 사랑했던 교향곡이 지옥의 선율로 바뀌던 그 순간을!

-자, 멜도르. 나는 뭐라고?

-누, 누나입니다.

-누나한테 화풀이하면 돼, 안 돼?

-그게 화풀이냐! 넌 어차피 아무것도 안 하는데!

-너?

-으, 으아아앗! 누나한테 화풀이하면 안 돼! 안 돼요!

“으으으! 벨라디 앨턴!”

그때를 떠올리자 멜도르의 속에서 열불이 났다.

제 방에 도착한 멜도르는 침대로 뛰어 들어가 베개를 마구 때렸다.

“잊지 않겠어! 그 치욕! 모멸감!”

그 악마는 도대체 무슨 억하심정으로 자신을 괴롭히는 걸까! 멜도르는 너무 억울했다.

물론 자신이 벨라디에게 불친절했던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 정도는 괜찮지 않나?

자신보다 먼저 태어났으면서, 아무런 의무도 없이 자유만 즐기는 주제에!

벨라디가 프레도와 아글라 공자들과 놀러 다니는 동안, 멜도르는 마음껏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검술 훈련을 해야 했다.

온몸에 멍 자국이 생기도록!

‘그러면 그 정도의 투정은 받아 줘야 하는 거 아니야?!’

어머니도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멜도르는 언제나 자기의 편이었던 어머니가 너무나 그리워졌다. 그리고 매일 노는 주제에 누나 대접을 바라는 벨라디가 아주아주 얄미웠다.

사실 제일 화가 나는 건 자기 자신이었다.

‘왜 나는 벨라디 앨턴한테 한마디도 못 한 걸까!’

멜도르 인생에서 가장 만만했던 게 벨라디였다.

그가 기억하는 벨라디는 항상 한 발자국 뒤에 서서 어머니 품에 안긴 자신을 부러움 담긴 눈으로 바라보는 아이였다.

또는 자신에게 양보하고, 배려하고, 혹여나 싸우는 날이 있더라도 자기 대신 부모님께 혼나는. 그런 아무런 존재감 없는 아이.

때때로 벨라디가 불쌍하다고 느껴지는 순간도 있었지만…….

야외 훈련장에서 밤늦게까지 검술 연습을 하다 저택을 봤을 때, 벨라디의 방 불이 꺼져 있으면 분노가 먼저 치솟았다.

그래서 벨라디에게 모진 말들만 뱉어 낸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좋은 날도 이제는 끝나고 말았다.

아버지가 떠났던 그날, 멜도르의 천하는 막을 내렸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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