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참고로 어린 네시아는 몸이 매우 약해서 환경이 바뀔 때마다 크게 아파했다.
‘덕분에 원작에서도 수도로 오고 며칠을 꼬박 앓았다고 했어.’
이렇게 약한 네시아를 데리고 수도로 돌아오기 힘들 것이다. 그럼 어쩔 수 없이 북부의 저택에서 네시아를 케어할 테고.
‘그 기간은 대략 3년.’
원작에서 네시아의 몸이 건강해질 때까지 3년이란 시간이 걸렸으니까.
그게 내가 벌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 안에 나는 내 입지도 높이고, 멜도르 그 새끼도 처리하든가, 사람으로 만들든가 해야 했다.
‘아, 그러고 보니 그걸 챙겨야지.’
난 일기의 맨 뒷장을 폈다. 그곳에는 수식들이 어지럽게 적혀 있었다.
언뜻 평범한 마법 수식처럼 보였지만, 이건 어머니가 유일하게 마탑에 넘기지 않은 것들이었다.
‘정령과 계약할 수 있는 고대 마법 수식.’
어머니는 과거, 이 수식으로 눈의 정령 셰넌을 부르는 것에 성공했다. 하지만 수식이 어설퍼 계약을 하지는 못했다.
그 후 어머니는 정령과 함께 숲에서 생활하며 더 완벽한 수식을 연구했다. 그 열의는 엄청나서 아버지를 만나 수도로 와서도 연구를 멈추지 않으셨다.
‘결국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대신 일기를 발견한 네시아가 이 수식을 완성해 낸다. 그리고 자신을 키워 준 눈의 정령과 계약을 맺는 것에 성공한다.
‘그렇게 눈의 정령 고유의 힘을 얻게 돼.’
세간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정령은 마법과는 별개로 각자 고유의 힘을 가지고 있다. 이걸 계약자에게 줄 수 있었고.
눈의 정령 고유의 힘은 ‘그리운 사람의 향수를 느끼게 하는 힘’이었다. 이 힘으로 사람들은 네시아에게서 소중한 이의 잔향을 보게 된다. 아주 본능적으로 말이다.
네시아에게 향수를 느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경계를 풀고 호감을 느끼게 된다.
네시아 특유의 밝은 기운과 이 힘이 어우러져, 그녀는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여주가 되는 것이다.
당연히 나한테 그따위 힘은 필요하지도, 어울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다른 정령의 힘은 탐이 나거든.’
난 음흉하게 웃으며 어머니의 수식을 쓰다듬었다.
“이것도 제가 잘 쓸게요, 어머니.”
나는 조심스럽게 수식이 적힌 종이 몇 장을 뜯어냈다. 노트가 두꺼워서 종이 몇 장 없어진 것은 티도 나지 않았다.
난 뿌듯한 마음으로 일기장을 탁 덮었다.
‘이제 아버지께 보여 드리면 되겠다.’
슬슬 자기 위해 의자에서 일어나는데, 일기 사이로 삐죽 빠져나온 종이 한 장이 보였다. 원래 일기 사이에 끼워져 있다가 내가 펼치면서 밖으로 나온 모양이었다.
난 빠져나온 종이를 빼다가 손을 멈추고 말았다.
‘이건…….’
일부분만 드러난 그것은 사진이었다.
살짝 낡은 사진 속에서 어머니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녀의 품에 아기가 안겨 있었는데, 사진을 전부 빼지 않아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작은 발만 겨우 보일 뿐.
그걸 보자 일기의 위치를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동안 찾지 않은 이유가 떠올랐다.
‘원작에서 어머니는 사진 한 장을 일기에 간직하고 있었어.’
바로 첫째 아들의 첫 생일 때 찍었던 사진이었다.
어머니는 자신의 아들을 누구보다 자랑스러워했고 사랑했으니까.
‘첫째는 이 사진을 보고 어머니의 사랑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걸 전달해 준 네시아를 진정한 동생으로 받아들이게 되지.’
그럼 나는?
난 어머니의 자랑스러운 장남이 아닌, 존재감 없는 장녀였는데.
어머니는 원작처럼 첫째와 찍은 사진을 간직하셨을까?
아니면 내가 아닌 자신의 사랑을 모조리 쏟아부었던 멜도르의 사진을 간직하셨을까?
난 차마 이걸 확인할 결심이 서지 않아서, 반년 동안 차일피일 미루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확인할 때가 온 것 같았다.
나는 침착하게 일기장에서 사진을 마저 빼내었다.
그리고 곧 참은 숨을 토해 낼 수밖에 없었다.
“하아…….”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는 아기는 짙은 검은 머리에 붉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 이건 나였다.
어머니가 나를 소중히 안고 있는 사진을 보자 가슴이 술렁거렸다.
상처받고 소외당하였던 지난날들.
우습지만 그 안에서도 추억이라는 것은 있었기 때문이다.
-벨라디, 이리로 오렴.
추억 속 어머니의 모습이 환영처럼 떠올랐다.
돌아가기 전까지 어머니는 계속 침대에 누워 계셨지만, 컨디션이 좋은 날에는 책을 읽고는 하셨다.
그날이 딱 그런 날이었다.
평소처럼 어머니의 방으로 갔던 난, 내가 방해가 될까 봐 문가에서 머뭇거렸다.
이런 나를 눈치챈 어머니가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괜찮으니까 엄마한테 와.
그 말에 난 조심스럽게 침대로 다가갔다.
내가 그녀의 옆에 앉자, 어머니는 책을 덮고 나를 품에 안았다.
-표정이 안 좋네. 오늘도 무서운 꿈을 꿨니?
그맘때 난 항상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악몽을 꾸고는 했다.
그래서 어머니께 지나가는 말로 요즘 나쁜 꿈을 자주 꾼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제 말을 기억하고 계셨어요?
-그럼. 벨라디가 한 말인데 기억하지.
어머니는 나른하게 말하며 내 등을 토닥였다.
난 어머니의 손길을 받으며 그녀의 품에 파고들었다.
-별거 아니에요.
-그래, 꿈은 꿈일 뿐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렴.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며 내 머리를 쓰다듬다가 손가락으로 내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게 슬픈 표정 말고 웃어 줘야지. 벨라디 넌 웃을 때 제일 예쁘다고 엄마가 말했던가?
-네, 항상 그러셨어요.
난 어머니의 상냥함이 좋아 바보처럼 활짝 웃었다. 그러자 어머니도 웃으셨다.
이게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최근의 추억이었다.
“웃는 게 제일 예쁘면, 웃을 일만 만들어 주든가.”
말은 누가 못 해. 내 표정을 굳힌 건 결국 어머니 본인이었다.
난 몇 안 되는 추억으로 동생을 편애했던 걸 잊을 만큼 착한 딸이 아니었다.
사진이 보기 싫어져, 그걸 휙 뒤집어 버렸다.
‘차라리 이게 멜도르였으면…….’
그럼 이렇게 찝찝하지는 않았을 텐데.
어머니는 왜 나를 안고 있는 걸까.
그래도 나름대로 날 사랑하기는 했던 걸까?
‘……그럼 뭐 해, 그 사랑이 멜도르를 사랑하고 남은 찌꺼기인데.’
당시에는 그것도 목말라서 매달렸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잠시 한숨을 내쉬며 난 사진을 책상 서랍에 깊숙이 넣어 두었다.
원인을 치웠지만, 술렁이는 가슴은 진정되지 않았다. 이게 다, 내가 아직 어머니에게 감정이 남아 있어서 그런 것일 테지.
‘애증이든 뭐든. 빨리 증발했으면.’
그래서 어머니와 내가 완전한 타인이 되었으면.
난 풀썩 침대에 누웠다.
그날은 계속 잠이 오지 않았다.
***
원치 않게 잠을 설쳤지만, 컨디션이 나쁘지는 않았다.
덕분에 무사히 하루를 보냈고, 다시 밤이 찾아왔다.
‘이 시간이면 아버지도 집무실에 계시겠지.’
난 성큼성큼 5층 복도를 걷다 반가운 사람과 마주쳤다.
“오랜만입니다, 벨라디 아가씨.”
“예, 오랜만이군요. 리켄 남작.”
리켄 남작은 아버지의 최측근 보좌관으로 성실하고 합리적인 인물이었다. 그리고 어릴 적, 잠시나마 나와 멜도르에게 후계자 수업을 가르쳐 주었던 스승이기도 했다.
‘이 저택에서 나를 편하게 대하는 몇 안 되는 사람이기도 하고.’
난 리켄 남작의 손에 있는 서류들을 바라보았다.
“아직 퇴근을 안 하신 건가요? 다른 보좌관들도요?”
“예. 이 늙은이를 아주 알뜰살뜰 부려 먹고……. 공작님도 참 너무하십니다.”
“이해해 주세요. 리켄 남작만큼 뛰어난 이가 없으니까요.”
“허허허, 별말씀을. 선대 공작님 때부터 부려 먹히기만 하는 것 같지만, 아가씨의 칭찬도 있으니 다시 힘을 내야겠군요.”
“힘을 내실 수 있게 남작과 보좌관들께 따로 몸에 좋은 약재들을 선물할게요.”
“오호, 정말 감사합니다. 녀석들이 무척 기뻐할 겁니다.”
리켄 남작은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럼 저는 이만.”
“수고하세요, 남작.”
인사를 마친 그가 아버지의 집무실 맞은 편에 있는 문을 열었다. 열린 문 틈으로 방 안의 풍경이 보였다.
붙어 있는 네 개의 책상에 앉은 남녀가 쉴 틈 없이 펜을 움직이고 있었다. 리켄 남작의 자리는 네 개의 책상 뒤쪽에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각자의 책상 위에는 서류 더미가 한가득 쌓여 있었는데, 흡사 전생의 블랙 기업과 같은 풍경이었다.
난 혀를 찼다.
‘대영지를 소유한 공작가의 보좌관도 할 게 못 돼.’
심지어 최고 상사가 자신들이 일하는 공간 바로 맞은편에 있다고 생각하면 더더욱 말이다.
마음대로 퇴근도 못 하고, 툭하면 야근이고.
‘……흠, 아버지를 북부로 내보내고 보좌관들도 내 편으로 만들까?’
살짝 보였던 보좌관들 표정을 보니, 근무 환경을 조금만 개선해 줘도 넘어올 것 같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난 아버지의 집무실을 바라봤다. 집무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인이 나를 보고 공손히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벨라디 님.”
“아버지께 내가 찾아왔다고 전해.”
“예.”
하인이 문을 두드린 후, 내가 왔다고 알렸다. 곧 허락의 소리가 들렸고, 하인이 문을 열었다.
그 안으로 들어가니 서류를 보고 계시는 아버지가 보였다.
“좋은 밤이에요, 아버지.”
“무슨 일이지.”
아버지는 평소처럼 무심한 목소리로 물으셨다.
난 그런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
“아버지께 꼭 보여 드려야 할 것이 있어서요.”
그제야 아버지가 날 바라봤다.
난 아버지께 들고 있던 노트를 내밀었다.
“어머니의 일기에요.”
“……뭐라고?”
아버지가 한쪽 눈썹을 까딱이며 내 손에서 일기를 받아 들었다.
잠시 일기의 표지를 바라보던 그가 페이지를 한 장 넘겼다.
“확실히 도헤미아의 필체군. 유품을 정리할 때는 없었는데……. 넌 이걸 어디서 난 거지?”
“어머니의 연구실 침대 밑에서 발견했어요.”
“연구실?”
“예, 어젯밤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계속 잠이 오지 않았거든요.”
난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