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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장녀가 육아물에 빙의하면-20화 (21/197)

20.

대련실에서 노닥거리니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유모를 불러 류스펠을 보낸 우리는 저택 밖으로 나왔다.

하늘을 보니 구름이 껴 날씨가 흐렸다.

“슬슬 눈이 오려나…….”

제국 동부에 위치한 수도는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한 곳이라 계절의 흐름이 잘 체감되는 동네였다.

내 말에 시온과 모스틴이 웃었다.

“벨라디! 이번 겨울에는 시온네 별장으로 놀러 갈 거지? 작년에는 너희 어머니 간호하느라 못 갔잖아!”

“나 그때 엄청 바빠질 거야.”

“바쁘다고? 물론 요즈음 네가 저택 관리로 바쁘기는 했지만.”

“그래도 겨울이면 좀 쉬엄쉬엄하지 않아? 모처럼 우리 별장 새로 단장했는데…….”

모스틴과 시온의 말에 난 빙그레 웃었다.

“이제 슬슬 때가 오고 있거든.”

“무슨 때?”

아버지를 수도에서 내보낼 때.

난 답하지 않고 그냥 미소 지을 뿐이었다. 내 미소에 모스틴이 미심쩍은 얼굴로 날 주시했다.

“저 미소는 뭔가 사고 칠 때 짓는 건데……. 혼자만 재밌는 거 계획하지 말고 우리랑 같이 하자!”

“글쎄, 일단 해 보고 재미있으면 끼워 줄게.”

“아, 그렇게 말하니까 더 궁금하잖아. 알려 줘~.”

“흠, 그렇게 부탁하니 더 말하기 싫은걸?”

난 그렇게 답하며 우리 가문의 마차에 올라탔다.

“난 이만 돌아갈게. 또 대련하고 싶으면 언제든 도전해, 모스틴.”

“좋아, 그때는 더 오래 버틸 거야!”

“우리 수업 일정도 정해서 알려 줄게, 시온.”

“난 언제든 좋으니까 편하게 정해 줘.”

“모두 좋은 저녁 보내.”

난 그렇게 말하며 자세를 바로 했다. 그러자 대기 중이던 프레도 공작가의 하인이 마차 문을 닫았다.

곧 마차가 출발했다. 겨울이라 날이 금방 어두워지니, 길거리에 사람이 없었다. 덕분에 갈 때보다 더 빠르게 앨턴가의 저택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내심 나 이제 검 잘 쓴다고 자랑하고 싶었는데, 시온과 모스틴 덕분에 풀었네.’

내년부터 차근차근 다른 이들에게도 실력을 오픈해야지. 난 평소보다 즐거운 마음으로 현관에 들어섰다.

그때 에밀리가 내게 다가왔다.

“벨라디 님.”

“표정이 왜 그래? 무슨 일 있니?”

“그게…….”

에밀리가 내게 조용히 속삭였다.

그 말을 듣는 즉시 난 상쾌한 기분을 패대기치고 발걸음의 방향을 틀었다.

발길을 돌려 향한 곳은 별관의 온실이었다.

거침없이 별관으로 향하자 그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로버가 반색을 표했다.

“베, 벨라디 님! 이제 오셨습니까!”

로버의 뒤에 굳게 닫힌 온실 문이 보였다.

문 사이로 희미하게 들려오는 음악 소리에 내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그건 어머니가 멜도르와 자주 듣던 교향곡이었기 때문이다.

옆에 있던 로버는 내 표정을 보고 서둘러 변명을 내뱉었다.

“저와 시종들이 말렸지만, 워낙 강경하게 나오셔서……!”

“내가 해결할 테니 너희는 물러나 있어.”

난 이렇게 말하고 벌컥 닫힌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음악 소리가 더욱 커졌다. 나는 귀를 아프게 때리는 소리를 뚫고 안으로 들어갔다.

온실 속 풍경은 그때 당시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굳이 다른 점을 뽑자면, 탐스럽게 피어 있던 꽃이 단 한 송이도 없다는 것 정도?

하긴, 아버지를 이 저택에서 내보낸 후 손보려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마치 바깥의 계절처럼 삭막한 온실은 등도 켜지 않아 어둑했다. 그나마 거대한 창으로 어슴푸레하게 빛이 들어왔기에, 나는 개의치 않고 온실 안을 걸었다.

곧 익숙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멜도르.”

멜도르는 아무 대답도 없이 소파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어머니가 살아 계실 적, 놈과 자주 앉아 있었던 그 소파였다.

난 성큼성큼 그쪽으로 다가가 멜도르 옆에 있는 축음기를 껐다. 그러자 시끄럽게 귀를 자극하던 음악 소리가 멈췄다.

고요함이 찾아오고 나서야 멜도르는 감았던 눈을 떴다.

“왜 마음대로 음악을 멈추는 거야. 당장 다시 재생해.”

“너야말로 누구 허락 받고 이곳에 있는 거야? 이 축음기는 또 뭐고? 아버지께서 하신 말 기억 못 하나 본데, 여긴 이제 내가 관리하는 곳이야.”

내 말에 멜도르가 미간을 찡그렸다.

“여기는 어머니의 공간이었어.”

“그걸 망가트린 게 너지. 이제는 내 것이야.”

“하, 그래?”

멜도르는 코웃음을 치더니 나를 사납게 노려봤다.

“그러면 여기를 음악 감상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 애초에 날 이해시키겠다며 아버지를 꼬드겼잖아?”

그 말에 내 표정이 굳어 갔다. 멜도르는 이런 나를 보며 킥킥 웃었다.

“어머니가 제일 좋아하셨던 취미는 이 온실을 돌보고 음악을 감상하는 거였어. 그러니 여기를 음악 감상용으로 꾸미면 나도 이해해 줄게.”

“그건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음악 감상은 네 방에서나 실컷 해.”

“명령이야, 벨라디 앨턴.”

멜도르가 목소리를 깔며 내 눈을 빤히 바라봤다.

“더는 어머니와 내 추억에 끼어들지 마. 설치고 싶으면 네 영역에서 놀란 말이야.”

어머니와 멜도르의 추억…….

난 입가에 삐뚤어진 웃음을 걸쳤다.

멜도르는 참 내 역린을 잘 건드리는 놈이었다.

난 밀려오는 분노를 참아 내고 멜도르를 바라봤다.

“이곳을 전적으로 내게 맡긴 건 아버지야. 지금 아버지 말을 어길 셈이니?”

본인이 뭐라고 으름장을 놓든 결국 이 집의 주인은 아버지였다.

내 말에 멜도르가 인상을 쓰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기어코 네 입맛대로 바꾸시겠다? 아버지가 그 꼴을 가만히 두실 것 같아?”

‘당연히 가만두지 않겠지.’

그러니까 아버지를 내쫓은 다음, 고치려고 대기하는 거 아니겠어?

나는 이런 속마음을 숨긴 채, 놈의 적의 어린 시선을 비웃음으로 대응했다.

“멜도르, 어머니 생신이 다가오니 네가 예민해진 것 같은데…… 괜히 나한테 화풀이하지 마. 난 더 이상 네 화풀이 대상이 되어 줄 생각 없으니까.”

“누가 화풀이를 했다는 거야!”

“불과 며칠 전에도 그랬잖아. 벌써 잊었어?”

며칠 전, 저택의 복도에서 훈련을 마친 멜도르와 마주친 적이 있었다.

멜도르는 날 보자마자 이렇게 이죽거렸다.

-누구는 밤낮 가리지 않고 훈련에 임하는데, 누구는 우아하게 말이나 타면서 놀고 있네.

-그게 불만이면 너도 얼른 훈련 끝내고 알렉산더를 보러 가. 본인 진도 늦은 것 가지고 나한테 뭐라 하면 안 되지.

-이익! 아무것도 안 하는 식충이 주제에!

그렇게 소리친 멜도르는 들고 있던 목검을 휙 내게 던졌다. 물론 난 그걸 가볍게 잡아챈 후 곱게 돌려줬고.

“이제는 그렇게 목검을 돌려주지 않을 거야.”

아주 박살을 내고 말지.

내 말에 멜도르가 표정을 구겼다. 놈이 뭐라고 대꾸하기 전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제 네 방으로 돌아가.”

“내가 왜? 누가 네 마음대로 할 것 같아?”

멜도르가 날 살벌하게 보며 소파에 벌러덩 누웠다. 그걸 본 난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몸을 돌렸다.

“그래? 그렇게 떼쓸 거면 멜도르 넌 여기서 살아. 난 방에 돌아갈 테니.”

이곳에 있으면 본인 손해지, 뭐.

멜도르가 갑자기 온실에 갔다길래 무슨 속셈이지 싶었는데, 그냥 축음기 들고 청승 떠는 거면 관심 꺼도 될 것 같았다.

내가 미련 없이 문 쪽으로 걸어가니 뒤에서 멜도르가 악을 쓰는 소리가 들렸다.

그걸 무시한 채 온실을 나오자 밖에서 에밀리와 로버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난 둘에게 간단히 말했다.

“멜도르가 그냥 떼를 쓰는 것 같으니 놔두고 각자 일들 해.”

“예, 벨라디 님.”

“알겠습니다!”

난 다시 방으로 향했다. 긴 복도를 걷자, 지난 반년 동안 내가 했던 시도들이 떠올랐다.

나도 멜도르와 대화라는 것을 해 보려 노력은 했었다. 멜도르가 날 무시하고 싫어하는 이유는 명확했으니까.

자신은 하루 대부분을 훈련과 수업에 시달리는데, 상대적으로 난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멜도르 입장에서는 자신만 피 터지게 공부하고, 난 매일 놀고 있는 거로 보였겠지.’

그래서 나한테 함부로 대하고 막말을 했던 것이다.

놈은 영악하게도 어머니와 아버지 앞에서는 내게 함부로 말하지 않았다.

투덜거리거나 무시하기는 했지만, 물건을 던지거나 마법을 쓰는 등의 과격한 행위는 나름 조절을 한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도움을 청하는 내게 항상 이렇게 말씀하셨다.

-멜도르가 많이 힘든가 봐. 벨라디는 누나니까 동생의 투정 정도는 받아 줄 수 있지?

그때는 어쩔 수 없이 수긍했지만, 이제 그럴 생각은 절대 없었다.

사실 멜도르도 전보다 나이를 먹었으니, 대화를 하다 보면 서로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나답지 않은 헛된 희망이었어.’

녀석은 차분히 대화를 나누기도 전에 내 화를 돋우었다. 그럴 때마다 몇 번이나 주먹에 힘이 들어갔지만, 필사적으로 참았다.

멜도르를 물리적으로 건드렸다가 녀석이 아버지에게 이르기라도 하면, 저택 관리의 권한을 잃을 수도 있으니까.

그만큼 아직까지도 내 입지는 바람 앞의 촛불이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계속 날 무시했던 놈과 대화는 무슨.’

멜도르의 만행을 아버지께 말하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원점과 똑같았다.

내 말을 들은 아버지는 일단 날 먼저 탓할 가능성이 컸다. 그 후 멜도르에게 간단히 경고하겠지.

하지만 특별한 제재는 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멜도르는 내게 보복성 화풀이를 할 테고, 더 이상 참지 못한 난 녀석을 쥐어 잡을 것이고.

멜도르가 그걸 아버지께 일러바치면, 아까와 똑같은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이 딜레마를 유추하며 난 간단한 결론을 내렸다.

‘결국 내가 제일 두려운 건 멜도르와 아버지의 관계야.’

한 저택에서 사는 한, 멜도르는 너무 쉽게 아버지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그러면 결코 내가 원하는 그림을 그릴 수 없다.

‘그래서 지금까지 기다려 왔어.’

어머니의 생신이 다가온다.

그때가 바로 원작의 시작이었다.

‘곧 아버지를 수도에서 내보낼 수 있을 거야.’

끈끈한 부자 사이에 생긴 물리적 거리.

멜도르가 아버지라는 방어막 없이 혼자 남겨진다는 건, 내 손아귀에 툭 떨어지는 것과 다름없었다.

“난 그때가 참 기다려져, 멜도르.”

그래, 얼마 남지 않았다.

그 순간을 생각하니 후후후 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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