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앗, 레이디에게 먼저 손수건을 깔아 줘야 하는데.”
시온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날 바라봤다. 난 훈련복 주머니에 있던 손수건을 꺼내 시온의 손수건 위에 올려 주었다.
“넌 딱딱한 곳에 못 앉잖아. 푹신하게 앉으세요, 신사님.”
“헤헤헤. 감사합니다, 레이디.”
해맑게 웃은 시온은 쓰러져 있는 모스틴의 훈련복을 뒤적여 손수건을 하나 더 펼치더니, 총 3장의 손수건 위에 엉덩이를 올렸다.
그걸 본 모스틴이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찼다.
“저 귀하게 자란 도련님 좀 봐.”
그 말에 시온도 콧방귀를 뀌었다.
“누가 보면 모스틴 넌 귀하게 안 자란 줄 알겠어.”
“……하긴, 우리 중에서 강하게 자란 건 벨라디밖에 없지.”
“강하게 자란 게 아니라, 알아서 자란 거야.”
난 그렇게 말하며 반쯤 풀린 머리를 다시 묶었다.
그때 시온이 쓰고 있던 안경을 조용히 치켜올렸다.
“그런데 있잖아, 벨라디.”
“응?”
“혹시 실례가 될까 봐 그동안 물어보지 못했는데…….”
시온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쩌다가 마음을 바꾼 거야? 계속 검을 피했었잖아.”
그 말에 누워 있던 모스틴도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게? 네가 검을 배운다는 게 너무 기뻐서 깜박하고 있었는데, 원래는 동생 앞을 막기 싫다고 그러지 않았어?”
둘의 물음에 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깨달았거든.”
“뭘?”
난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한쪽 눈썹을 까딱했다. 그리고 언제나 처참한 방식으로 깨달았던, 하지만 전생을 자각하기 전까지는 애써 외면했던 사실을 친구들에게 토로했다.
“내가 멜도르 앞을 가로막는 게 아니라, 멜도르가 내 앞을 가로막고 있다는 걸.”
본인이 누리는 것들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철없는 동생. 이런 동생을 치워 버리자고 다짐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려 버렸다.
난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웃었다. 그러자 시온과 모스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멋있다, 벨라디.”
“역시 멋진 친구로 벨라디를 고르길 잘했어.”
두 사람의 속삭임을 들으며 난 다시금 결심했다.
‘더 이상 그 누구도 내 발목을 붙잡을 수 없어.’
난 둘에게 그 외의 포부도 함께 밝혔다. 앞으로 가족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저택 내에서 영향력을 단번에 올리고 싶다고.
두 사람은 내 말을 경청하며, 자신들이 도와줄 수 있는 건 최대한 도와주겠다 선언했다.
“필요한 건 언제든지 말만 해!”
“뭐든 최대한 협력할게.”
시온의 마지막 말에 난 씨익 미소 지었다.
“안 그래도 시온 네 도움이 필요했는데. 너 후계자 수업 때 배우는 과목들 잘 알지?”
“고등 교육? 그럼!”
“좋아. 내가 간단하게는 배우고 있지만, 아무래도 심도 있는 수업은 하지 못했거든. 그걸 네가 보충해 줬으면 해.”
지난 반년간 제플린에게 대략적인 것들은 모조리 배워 왔다. 그리고 그가 가르칠 것이 떨어지자, 난 시온이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시온은 공부 머리가 좋았고, 뛰어난 마법사라 지식이 깊었다. 그러니 충분히 나에게 질 높은 수업을 가르쳐 줄 수 있을 것이다.
내 말에 시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한테 맡겨!”
지혜의 상징이라는 아글라 공작가의 금안이 초롱초롱 빛났다.
난 습관처럼 시온의 보라색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시온의 얼굴이 서서히 붉게 물들어 갔다.
그때 모스틴이 조금은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너 누구한테 검술을 배우는 거야? 역시 너희 가문 기사 단장인 브룩스 경?”
“그런데 브룩스 경은 멜도르를 가르치잖아. 둘이 같이 배우는 거야?”
“앨턴 공작님이 그걸 허락하셨으려나?”
두 사람의 의문에 난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검을 배우는 건 아버지도 모르셔. 애초에 나한테 관심 없으신 분이고. 내 스승은 그냥 적당한 기사 한 명을 포섭했어.”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가문의 비밀인 감시자들에 대해 말해 줄 수는 없었다. 워낙 우리 가문에 알려지지 않은 실력자가 많은지라, 둘은 큰 의문을 품지 않은 듯했다.
“공작님도 너무하시네. 멜도르한테는 그렇게 신경 쓰면서.”
“넌 그 기사한테 만족해? 뭣하면 우리 스승님 소개시켜 줄까?”
난 모스틴의 제안에 고개를 저었다.
“그자로 충분해. 게다가 이제는 나만의 기술도 연마하고 싶어졌으니.”
“와, 벌써 그 정도 경지인 거야?”
“이왕 이렇게 된 거 벨라디 네가 제국 최강의 기사가 되자. 그래서 앨턴 공작님이 널 알아보지 못한 걸 땅을 치고 후회하게 만드는 거야.”
“어? 그거 재밌겠다! 그 위압감 덩어리인 앨턴 공작님이 후회하는 꼴이라!”
“진짜 그런 상황이 온다면 반드시 사진으로 찍어서 우리 가문 대대로 물려줄 거야.”
우리는 이렇게 시시덕거리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어렸을 적, 짓궂은 장난을 꾸밀 때처럼.
그때 멀리 떨어진 대련실 입구에서 우당탕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동시에 고개를 돌리니, 닫혀 있던 입구가 열려 있고 누군가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그걸 본 모스틴이 벌떡 일어나 입구로 달려갔다.
“류스펠!”
그러고 서둘러 넘어진 아이를 일으켰다. 모스틴과 똑같은 금발에 초록색 눈을 가진 아이는 멍한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모스틴의 어린 동생, 류스펠 프레도였다.
“류스펠, 지금 대련실로 오면 안 된다고 했잖아. 어디 다친 곳은 없어?”
모스틴은 다정한 손길로 아이의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 주었다. 류스펠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내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모스틴은 그런 아이를 품 안에 안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이왕 온 거 시온 형이랑 벨라디 누나한테 인사해.”
“안녕, 류스펠.”
“오랜만이네?”
류스펠을 보며 웃어 주니 아이의 뺨이 발그레하게 익었다.
수줍음 많은 류스펠은 그제야 내게서 눈을 떼고 모스틴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어린 동생의 행동에 모스틴의 얼굴이 헤- 풀어졌다.
“우리 류스펠은 언제 누나랑 형아한테 제대로 인사할까?”
“혀엉…….”
류스펠이 모스틴의 옷자락을 잡고 입을 벙긋거렸다. 그 행동에 모스틴은 냉큼 고개를 숙여 자신의 귀를 내어주었다.
류스펠은 모스틴의 귀에 대고 뭐라고 속삭였다. 그렇게 한 보람 없이 아이의 우물거리는 말은 우리 귀에 너무 잘 들렸지만.
“벨라디 누나 사인이 갖고 싶어.”
“사인? 그건 갑자기 왜?”
“……멋있어서.”
“아하, 너 누나랑 형이 대련하는 거 다 봤구나?”
류스펠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스틴은 곤란한 듯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우리 막내한테는 멋진 모습만 보여 주고 싶었는데, 다 틀렸네. 오늘 대련한 거 다른 사람들한테는 비밀이야?”
그러면서 힐끔 나를 보니, 난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울 것 없지.”
내 말에 류스펠이 활짝 웃으며 좋아했다. 그러자 시온이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내 사인은 필요 없어? 형은 마법을 쓸 수 있는데.”
“필요 없어.”
아이의 단호한 말에 시온이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게 재미있는지 류스펠이 꺄르르 웃었다. 모스틴은 그런 동생이 귀여운지 연신 볼에 뽀뽀를 해 주었다.
형제의 우애 좋은 모습을 보며 난 피식 웃었다.
‘모스틴이 살아 있어서 다행이야.’
아니었다면, 이맘때의 류스펠은 암울하고 외로운 시절을 보냈겠지.
난 자연스럽게 원작을 떠올렸다.
원작의 주요 인물 류스펠 프레도.
이 아이가 훗날, 네시아와 사랑에 빠지게 될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이었다.
***
류스펠이 외롭고 우울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건 가족의 부재 때문이었다.
프레도 공작 부인은 애초에 몸이 약한 사람이었고, 무리해서 류스펠을 낳은 직후 쓰러졌다.
그때 당시 10살이었던 모스틴은 쾌활한 성격과 밝은 웃음으로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부인을 위로했다.
집안의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했던 모스틴. 하지만 그해 있었던 ‘켄뉴브 학교 폭발 테러 사건’이 모스틴의 목숨을 거둬 가고 말았다.
그 충격으로 프레도 공작 부인의 상태는 크게 악화되었다. 부인은 결국 그 해를 넘기지 못한 채 모스틴을 따라갔고, 프레도 공작 또한 아들과 아내를 잃은 충격으로 심한 우울증을 앓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막내아들인 류스펠을 거의 방치하다시피 키웠다. 프레도 가문의 사용인들 역시 류스펠이 태어나자마자 악재가 겹쳤다면서 그를 꺼렸고, 그 때문에 류스펠은 무척 외로운 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러다 14살에 네시아를 만나서 구원받았지.’
물론 이 소설은 육아물이라 남자 주인공의 존재감이 크지 않았다. 그래도 류스펠은 후반부에서 나름 활약했던 걸로 기억한다.
‘내가 결말까지 읽지 않아서 그 활약을 다 보지는 못했지만.’
이 소설은 일상 힐링물이었지만, 후반부로 가면서 어떤 사건이 시작되려고 했다.
문제는 내가 그 부분부터 모른다는 것인데…….
‘그래도 그건 네시아가 어느 정도 성장한 후니까, 지금부터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네시아와 류스펠은 나이가 비슷하니, 아마 지금 6, 7살? 남은 시간은 넉넉했다.
아, 그래서 지금 류스펠은 어떤 생활을 보내느냐.
“우리 막내 진짜 귀엽지 않냐? 내 동생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난 쟤만큼 귀여운 애를 만난 적이 없어.”
“그래그래.”
“어제는 나한테 형이 제일 좋다고 했다? 아버지가 조금 섭섭해했지만 내가 좋다는데 어쩌겠어!”
“그래그래.”
“그리고,”
“거기서 더 말하면 우리 집 녀석 여기다 버리고 간다?”
우리 집 녀석은 당연히 멜도르였다.
살벌한 경고에 그제야 모스틴이 주접을 멈췄다.
그 모습을 보자 시온이 킥킥 웃으며 작은 마법들을 계속 펼쳤다.
“짜잔, 이 불꽃은 전혀 뜨겁지 않아.”
“…….”
“그, 그럼 이건 어때? 반짝이 가루~.”
그걸 보는 류스펠은 영 시큰둥했지만 말이다.
이 일상적인 순간이 무척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원작과 다르게 모스틴은 켄뉴브 사건에서 무사히 돌아왔지.’
덕분에 프레도 공작 부인의 상태가 악화되는 일도 없었다.
공작 부인은 그 후로 4년간 더 투병 생활을 하시다 돌아가셨다. 4년은 프레도 공작이 마음의 준비를 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고, 그는 차분하게 아내의 장례를 맞이했다.
그 후, 공작은 부인의 몫까지 아들들을 보호하고 케어했다. 따라서 현재의 류스펠은 방치가 아닌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는 중이었다.
“모스틴 넌 나한테 정말 고마워해야 해.”
“뭐야, 또 켄뉴브 사건 이야기야?”
“생명의 은인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지?”
“죄송합니다, 벨라디 님. 벨라디 님이 지난 세월, 그걸 빌미로 저를 너무 많이 부려 먹어서 본능적으로 그만.”
“걱정하지 마, 모스틴. 내가 죽기 전까지 열심히 생색낼 거니까.”
내 말에 모스틴이 과장되게 슬픈 표정을 지었다.
“흑흑, 류스펠. 벨라디 누나가 형 괴롭혀.”
그 우스운 표정에 류스펠이 꺄르륵 웃었다.
아이의 종소리 같은 웃음소리가 대련실 안에 맑게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