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우와…….”
“마, 말도 안 돼…….”
둘의 감탄과 경악을 뒤로한 채, 난 앞을 바라봤다.
어느새 지고 있는 노을빛이 우리가 있는 잔해 속을 가득 채웠다. 난 그 빛을 맞으며 성큼성큼 밖으로 향했다.
때맞춰 우리를 보호해 주던 보호막도 사라졌고, 전혀 다른 방향에서 잔해를 치우던 사용인들과 눈이 마주쳤다.
“시, 실종되었던 공녀님과 공자님들을 발견했습니다!”
“어떻게 저곳에서 자발적으로 나오신 거지?!”
“일단 의원을 불러!”
분주히 움직이던 사용인들, 특히 각 가문의 사람들이 우리 셋에게 달려왔다.
그중 가장 흥분한 것은 역시 부모님들이었다.
“모스틴! 괜찮은 것이냐!”
“시온, 내 아들!”
프레도 공작과 아글라 공작 부부가 서둘러 자신의 아이들을 껴안았다. 아글라 공작 부인은 펑펑 울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 아버지가 굳은 얼굴로 다가왔다.
“다친 곳은?”
“없어요, 아버지. 보호막이 있어서.”
“그래, 그럼 됐다.”
아버지와 내 대화는 이걸로 끝이었다.
난 힐끔 옆을 바라봤다. 모스틴과 시온은 자신의 부모에게 푹 안긴 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순간 다시 울컥하고 부러움이 치밀어 올랐지만, 난 능숙하게 그걸 눌러 담았다. 멜도르가 태어난 후부터 이런 감정을 억제하는 건 익숙했기 때문이다.
일그러질 뻔한 표정을 관리하는데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소란스러워지기 전에 저택으로 돌아간다. 몸 상태는 저택 의원에게 맡기도록 해라.”
“네.”
그렇게 아버지를 따라가려는데, 맑은 목소리가 날 불렀다.
“벨라디.”
그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아글라 공작 부인의 품에서 벗어난 시온이 날 보고 있었다.
“다시 한번 인사할게. 덕분에 무사히 빠져나왔어. 고맙다.”
“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야.”
“……그리고 너 진짜 멋있었어.”
그렇게 말한 시온의 얼굴은 지고 있는 노을로 무척 붉어져 있었다. 옆에 있던 모스틴도 끼어들었다.
“맞아! 진짜 대단했어!”
모스틴은 해맑게 웃으며 불쑥 내게 손을 내밀었다.
“우리 앞으로 친하게 지내지 않을래?!”
“나랑 친구가 되고 싶다는 거야?”
“어!”
그 말에 난 힐끔 아버지를 바라봤다. 아버지는 잠시 그들을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난 그 즉시 모스틴의 손을 마주 잡았다.
“내가 그렇게 재미있는 친구는 못 될 텐데.”
내 말에 모스틴이 씨익 웃었다.
“재미있는 친구는 시온이 있으니까, 슬슬 멋진 친구를 사귀고 싶었어!”
그러자 옆에 있던 시온도 한마디 거들었다.
“좋아, 이제 우리 셋은 친구니까 매일 만나야 해! 어때, 벨라디?”
“흠, 생각해 볼게.”
내 말에 모스틴과 시온이 웃었다. 나 역시 처음 사귄 친구라는 존재에 흥분했던 것 같다.
짓눌렀던 질투 비슷한 감정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피식 웃음이 나왔으니까.
***
그렇게 지는 노을 아래, 친구가 된 우리 셋의 인연은 진득하니 이어지고 있었다.
“녀석들 참 귀여웠지.”
어린 모스틴과 시온을 회상하자 후후 웃음이 나왔다.
그때 당시에는 둘 다 나보다 키도 작았는데…….
‘지금은 나랑 비슷해졌지만.’
그나마 이것도 내가 아버지를 닮아 또래 여자애들보다 키가 월등히 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여튼 모스틴과 시온은 내가 이 세상에서 그나마 정을 붙인 소중한 친구들이었다.
‘신기한 인연이야. 원래 원작에서 둘은 직접 등장하지 않고 이름만 언급되는 인물에 불과했는데.’
사실 모스틴은 이 ‘켄뉴브 학교 폭발 테러 사건’으로 사망한다.
시온은 가지고 있던 마력으로 겨우 보호막을 유지했지만, 다리 하나를 절단할 정도로 크게 다쳤다는 묘사가 있었다.
이런 둘이 나를 만나 아무런 상처 없이 잘 지내고 있으니, 나도 모르는 사이 원작을 비튼 것이 된 셈이었다.
‘전부 다이아와 어머니의 보호막 덕분이었어.’
보호막에 감싸였던 순간이 어머니의 사랑을 가장 실감할 수 있었던 때였는데…….
참고로 그 다이아몬드 목걸이는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멜도르에게 넘어갔다. 나보다는 가문의 후계자가 더 철저하게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걸 앞장서서 진행한 사람이…….
‘어머니……!’
그걸 떠올리자 급격히 기분이 더러워졌다.
원작에서 보니, 어머니도 딸이라는 이유로 어마어마한 차별을 받으면서 자라셨다. 특히 가난한 평민 집안이라 그 강도가 더 심했다.
그런데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었을까?
‘……하아, 지금 이런 생각 해 봤자 다 부질없지.’
어머니를 비롯한 외가 쪽은 이미 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이제 와 죽은 사람을 탓해 봤자 달라지는 건 없었다.
때마침 마차는 프레도 공작가에 도착했다. 난 찝찝한 마음을 정리하며 입고 있던 코트의 먼지를 턴 후 밖으로 나왔다.
그 순간 내 앞으로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오셨습니까, 아가씨.”
화사한 금발에 갈색 눈동자를 가진 소년, 모스틴이 씨익 웃고 있었다.
난 익숙하게 그 손을 잡으며 저택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온은?”
내 물음에 모스틴이 빙그레 웃었다.
“이미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 기분이 좋아 보이네?”
“그럼 안 좋겠냐?”
모스틴은 그렇게 되묻더니 이제는 걸으면서 룰루랄라 콧노래까지 부르기 시작했다.
“오늘 드디어 너랑 대련을 하게 됐는데~!”
그 익살맞은 몸놀림에 손을 잡고 있던 내 팔까지 흔들렸다. 난 피식 웃으며 모스틴의 장단에 맞춰 줬다.
“그게 그렇게 기대돼?”
“당연하지! 네가 검을 배운다고 했을 때부터 난 계속 기다렸다구!”
모스틴의 말대로였다.
난 제플린과 로버를 내 사람으로 만든 후, 바로 이 둘에게 사실을 실토했다.
-가문 사람들에게는 비밀로 하고 검을 배우기로 했어.
그때 둘의 반응은 이러했다.
-정말이야?
-그럼.
-거짓말 아니고?
-물론이지.
-우, 우와아아아아아! 시온!
-모스틴!
그러면서 무슨 금메달이라도 딴 듯 서로를 꽉 껴안더라.
-됐어! 드디어 우리의 임무를 달성했어!
-그러게! 하마터면 세기의 천재를 허무하게 잃어버리는 줄 알았어어!
들어 보니 두 사람은 나를 설득하는 것에 은근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내가 검을 배운다고 하자 더더욱 기쁜 모양이었다.
서로를 부둥켜안고 기쁨을 나누던 둘은 이제 내 손을 잡고 강강술래를 돌았다. 익숙하게 두 사람의 장단에 맞춰 주는데, 모스틴이 발놀림을 멈추고 날 바라봤다.
-그럼 나랑 대련하자.
-대련?
-그래! 나 한 번쯤은 너랑 대련하고 싶어!
그때 모스틴의 그 초롱초롱한 눈빛이란…….
‘만약 놈의 뒤에 꼬리가 있었다면 프로펠러처럼 흔들렸을 거야.’
여튼, 모스틴의 제안을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난 이렇게 말했다.
-이제 막 검술을 시작했으니 조금만 기다려. 때가 되면 먼저 대련을 신청할게.
모스틴은 착하게도 내 말을 잘 지켜 줬다.
그렇게 반년이 지난 지금, 난 드디어 모스틴에게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모스틴은 여덟 살 때부터 검을 배워 왔다지?’
어디 모스틴의 실력이 얼마나 훌륭한지 보자고. 물론 내가 질 생각은 단 한 톨도 없었다.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모스틴은 신이 나서 대련실로 날 이끌었다.
대련실에는 시온 외에 아무도 없었다. 내가 검을 배우는 건 아직 비밀이기에, 모스틴이 사람을 전부 내보낸 모양이었다.
“벨라디!”
시온은 읽고 있던 책을 의자에 올려놓은 후, 이쪽으로 달려왔다.
“안녕, 시온.”
“오늘 정말 모스틴이랑 대련을 할 거야? 아무래도 난 좀 걱정돼.”
시온은 조금 불안한 얼굴로 나와 모스틴을 번갈아 봤다.
“아무리 벨라디가 천재라고 해도 8년 동안 검을 배운 모스틴이랑 대련이라니…….”
“이런 순진한 시온!”
모스틴은 그런 시온의 목에 팔을 걸며 고개를 저었다.
“넌 아직도 벨라디를 몰라? 저거 저거, 다 나한테 이길 계산 끝내고 대련을 신청한 거잖아.”
“……그건 그렇겠지만.”
“둘 다 날 너무 잘 파악하는데?”
난 그렇게 말하며 입고 있던 코트를 벗었다. 그러자 긴 겨울 코트 내에 감춰 두었던 훈련복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럼 모스틴, 너는 질 줄 알면서도 나와의 대련을 피하지 않는 거고?”
“난 이기든 지든 즐거우면 상관없거든~!”
애초에 모스틴도 훈련복 차림이라 귀찮은 준비는 필요 없었다.
난 대련실 한쪽에 마련된 목검을 집으며 웃었다.
“그래? 난 이겨야만 즐겁던데.”
목검은 진짜 검과 같은 무게를 위해 가운데에 철심이 박혀 있었다. 그걸 한 손으로 가볍게 휘두르며 난 고개를 돌렸다.
“덤벼, 모스틴 프레도.”
내 말에 모스틴 또한 씨익 웃었다.
“이 순간만 기다렸다, 벨라디 앨턴.”
이런 우리를 보며 마법사 시온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하아, 육체파들의 사고는 도저히 못 따라가겠어.”
***
모스틴의 명예를 위해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그냥 이거 하나만 기억해 두면 된다.
모스틴 프레도, 벨라디 앨턴에게 처참히 패배하다.
“허억, 허억, 허억.”
대련실 바닥에 대자로 뻗어 거친 숨을 몰아쉬던 모스틴이 힘겹게 팔을 뻗었다.
“무, 무울…….”
그러자 기다리고 있던 시온이 후다닥 그쪽으로 달려갔다.
“여기. 모스틴!”
“살겠드아…….”
“수건.”
내 말에 이번에는 이쪽으로 달려온 시온이 목에 걸고 있던 수건을 내밀었다.
“여기. 벨라디!”
대련실에는 하인들이 없었기에, 시온이 뽈뽈뽈 돌아다니며 우리의 시중을 들어 줬다.
“고마워.”
난 유유히 선 채로 흐르는 땀을 닦았다.
모스틴은 이런 나를 보며 감탄을 내뱉었다.
“와, 벨라디 앨턴. 너 진짜…… 강해도 너무 강한 거 아니야?”
“너도 나쁘지 않았어.”
“아니이, 힘의 차이를 메꾸려고 기술이 있는 건데. 너무 강해서 기술이 안 통하는 게 말이 돼?”
모스틴의 한탄에 시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안 되지.”
“그런 말도 안 되는 걸 행해야 천재 소리를 듣는 거야.”
난 제플린에게 했던 진담을 내뱉으며 후후 웃었다. 처음으로 제플린 외의 다른 사람과 한 대련은 즐거웠다.
‘너무 즐거워서 하마터면 일격에 모스틴을 이길 뻔했네.’
내가 나름 힘 조절을 해서 승부를 연장했다는 걸, 모스틴은 아는지 모르겠다.
“벨라디이, 나도 수거언.”
그 말에 난 늘어진 모스틴의 옆에 털썩 앉으며 수건을 놈의 얼굴 위에 올려 주었다.
모스틴은 그대로 얼굴에 수건을 뭉개며 벅벅 땀을 닦았다. 시온은 가지고 온 본인의 손수건을 대련장 바닥에 곱게 깔았다. 그리고 그 위에 앉다 말고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