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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장녀가 육아물에 빙의하면-16화 (17/197)

16.

“하지만.”

내 말에 로버가 잠시 멈춰 섰다. 그러더니 고개를 돌려 날 바라봤다.

난 그런 로버에게 당당하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너에게 선택지 중 하나를 알려 줄 수는 있지.”

“예?”

“내 사람이 되는 건 어때?”

순간 로버의 눈이 어벙하게 깜박였다.

“벨라디 님의…… 사람이요?”

그의 되물음에 난 부연 설명 없이 로버를 바라보기만 했다.

잠시의 침묵 후, 내 말을 알아들은 로버가 그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집사는 집안 세력 중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중립을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넌 지금 중립을 지키고 있어?”

“당연합니다!”

여기까지 말한 로버가 잠깐 눈을 이리저리 굴리더니 소심하게 덧붙였다.

“아마도요.”

“집사는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말한 게 찰스인가?”

“맞습니다.”

“그렇게 찰스 말을 잘 듣는 주제에, 어떻게 그늘에서 벗어나려는 거야?”

“그건…….”

로버가 머뭇거리자 난 여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어렵게 생각할 거 없어, 로버.”

그가 내 말에 귀 기울이는 것이 느껴졌다.

난 오늘 몫의 서류를 정리하며 말을 이었다.

“지금 넌 가주의 명령을 최우선으로 여기지? 아버지가 이 저택의 주인이니까.”

“그, 그렇지요.”

“내 사람이 된다는 건, 그 순위만 살짝 바뀌는 것뿐이야. 아버지의 명령보다는 내 말을 먼저 따르는 거지.”

“하지만…….”

“애초에 저택에 무심한 아버지야. 너 아버지한테 별다른 지시를 받은 적 있니?”

내 말에 로버는 살짝 미간을 찡그리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래. 그러니 네가 내 사람이 되었다는 걸 알아챌 사람은 아무도 없어. 알았다고 해도 그게 무슨 문제가 되는 거지? 저택의 집사가 내부 관리를 책임지는 내 명령을 우선시하는 게?”

내 말을 가만히 듣던 로버는 납득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난 그런 로버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천천히 생각해 봐. 할 말 없으면 이제 나가 보고.”

“아…… 예! 오늘 정말 감사드립니다!”

로버는 원래의 텐션을 어느 정도 되찾은 채 집무실을 나섰다.

‘눈물이 많은 만큼 회복도 빠르네.’

그렇게 짧은 감상평을 남기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린 후 안으로 들어왔다.

“벨라디 님.”

“오늘 제 연기 어떠셨습니까, 벨라디 님?”

스티아와 윌리엄이었다.

난 윌리엄을 향해 씨익 미소 지었다.

“네가 여기 온 건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겠지?”

“들켜도 상관없을 겁니다. 애초에 이렇게.”

윌리엄이 본인의 얼굴을 툭 쳤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스르륵 변하기 시작했다.

“변장을 하고 왔으니.”

곧 얼굴과 목소리, 체형이 전혀 다른 낯선 이가 윌리엄의 자리에 서 있었다.

그 모습에 스티아가 혀를 찼다.

“내 마법 가지고 놀지 마.”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두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상대의 얼굴이 다시 스르륵 바뀌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 이런 일은 정말 오랜만이라 조금 흥분했습니다!”

즐거운 듯 웃고 있는 제플린이었다.

난 그런 제플린을 보며 같이 웃어 주었다.

“두 사람 다 오늘 수고했어. 특히 제플린, 네 연기는 흠잡을 곳이 없더군.”

“감사합니다, 벨라디 님. 연기는 감시자의 필수 덕목입니다.”

“스티아 네 마법도 훌륭하고.”

“감사합니다, 벨라디 님.”

그렇다.

오늘 로버의 기분을 쥐락펴락하며 가지고 놀던 윌리엄의 정체는 바로, 마법으로 얼굴을 바꾼 제플린이었다.

난 새삼스러운 눈으로 남매를 바라봤다.

변신 마법 자체는 어렵지 않지만, 자연스러운 유지는 매우 까다로웠다. 게다가 저택 곳곳에는 변신 같은 특정 마법을 감지하는 보안 마법이 깔려 있었다.

‘물론 내가 임의로 2층 보안만 흐리게 만들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걸 뚫고 오랫동안 위화감 없는 변신 마법을 유지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닐 텐데.

거기에 제플린의 의외의 연기 실력까지 맞물리니 시너지 효과가 대단했다.

‘저 능력이면 어디서든 첩자 노릇을 해내겠어.’

이번에는 로버를 속이는 것에 그쳤지만, 다음에는 좀 더 큰 판에 활용해야지.

난 그렇게 생각하며 두 사람을 향해 입을 열었다.

“진짜 윌리엄은 어떻게 됐다고?”

“16년 전, 공작님의 명으로 처리됐습니다.”

“정확히는 배신자를 처벌한 것이지만요.”

스티아의 마지막 말에 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실 처음에는 진짜 윌리엄을 찾을 생각이었다. 고작 로버를 회유하는 데 스티아와 제플린을 이용하기에는 아까우니까.

그러다 난 제플린에게 새로운 사실을 듣게 되었다.

‘윌리엄이 사실 스파이였다…….’

그걸 안 아버지는 감시자들을 이용해 가차 없이 그를 처리했다.

나를 막 출산한 어머니에게는 ‘윌리엄은 아내가 아파서 일을 그만두었다.’라고 핑계를 대고 말이다.

‘원작에서는 이런 사건이 없었는데.’

워낙 과거 이야기라서 나오지 않은 걸까?

난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왜 우리 가문을 배신했는지 밝혀지지 않았다고?”

내 물음에 스티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누구의 사주를 받았는지, 배신한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끝까지 입을 다물었습니다.”

“그래?”

“사건을 더 자세히 조사할까요?”

“……됐어.”

의문스러운 사건이었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지금은 내 코가 석 자니까.’

그때 제플린이 뿌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축하드립니다. 이제 저택의 총집사도 벨라디 님의 수중에 들어왔군요.”

“오빠,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닌데 너무 섣부르게 판단하는 거 아니야?”

“아까 집무실을 나오면서 로버가 지은 표정 못 봤나, 스티아.”

두 사람의 말에 나도 끼어들었다.

“어땠는데?”

“넋은 나가 있었습니다만, 눈빛은 빛나고 있었습니다. 마치 생각지 못한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말입니다.”

제플린은 그렇게 답하며 고개를 저었다.

“전부터 느꼈지만, 로버 웨하슨은 꽤나 다루기 쉬운 작자입니다.”

“잘됐네.”

난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의자 등받이에 기대앉았다.

‘자, 에밀리는 원래 내 수중에 있었고, 로버도 잘 구워삶았고.’

저택 관리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으니…….

“슬슬 본격적인 훈련을 시작해 볼까.”

내 말에 제플린이 눈을 부릅뜨고는 상기된 얼굴로 날 바라봤다.

“준비는 전부 끝났습니다. 언제든지 편하실 때를 말씀해 주십시오.”

그렇게 말하는 제플린이야말로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눈을 반짝였다. 이렇게 보니, 제플린이나 로버나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였다.

“하아-, 오빠.”

나와 같은 걸 느꼈는지, 스티아가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

“훈련은 어떠십니까, 벨라디 님?”

훈련이 끝난 후 나무 그늘에 앉아 쉬고 있는데, 제플린이 물병을 들고 다가왔다. 난 그에게서 물을 받아 들며 말했다.

“할 만해.”

“할 만하다고요?”

제플린이 내 옆에 다소곳이 앉으며 되물었다.

“숙련된 감시자들보다 훈련량이 훨씬 많으십니다.”

“제플린, 원래 이 정도는 거뜬하게 하고도 남아야 천재 소리를 듣는 거야.”

내 농담 같은 진담에 제플린이 씨익 웃었다.

“벨라디 님은 그냥 천재가 아닙니다. 천재들 중에서도 천재이시죠.”

당연한 소리를. 난 이 소설의 여주 오빠(?) 포지션이니까.

자고로 소설 속 여자 주인공 가문 사람들은 적어도 한 분야에서 특출난 천재여야 하는 법이다.

“만약 앨턴 공작가의 기사들이 벨라디 님의 성장 속도를 봤다면, 사기가 크게 저하됐을 겁니다.”

“그래? 지금 내 실력은 어느 정도인데?”

내 물음에 제플린은 진지한 얼굴로 대답해 주었다.

“웬만한 감시자들은 이미 추월하셨습니다. 공작가의 신입 기사들은 물론, 어지간한 기사들 역시 상대가 되지 않으실 겁니다.”

처음에는 진중하게 대답했던 제플린이지만, 말을 할수록 점점 목소리가 고조되기 시작했다.

“고작 반년 만에 이 정도라니, 공작님도 이렇지는 않았을 겁니다. 전 하루에도 수십 번씩 벨라디 님의 자랑을 하고 싶은 걸 참고 있습니다. 멜도르님이 후계자라고 그분만 신경 쓰는 머저리들. 진짜는 바로 여기에 있는데. 이 제플린 빈센드 옆에……!”

제플린의 입에서는 어느새 나를 찬양하는 말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난 물을 한 모금 더 마시며 그의 말을 가만히 들어 주었다.

‘쟤는 무뚝뚝한 얼굴로 은근 주접이 심하다니까.’

제플린의 말을 흘려들으며 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반년 전, 로버는 그 일이 있고 바로 다음 날 나를 찾아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 동작은 기사들이 으레 하는 충성의 맹세와 비슷했다.

-앞으로 전 평생 벨라디 님을 따르겠습니다! 어렸을 적 꿈이었던 기사처럼, 지금이야말로 단 한 분의 주군만 모실 거예요!

어디서 본 건 있어 가지고.

하여튼 그 무렵부터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덧 두 개의 계절이 지나갔고, 벌써 겨울이 다가오고 있으니까.

그동안 난 저택의 내부 살림과 제플린에게 받는 훈련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었다.

어느 정도냐면, 너무 바빠서 반년 사이 아버지와 멜도르의 얼굴을 본 횟수가 손에 꼽힐 정도?

‘마주칠 때마다 좋은 이야기는 오가지 않았지만.’

그래도 사용인들을 내 손아귀에 쥐는 건 완전히 클리어했다. 그들은 이제 아버지와 멜도르보다 내 눈치를 더 살폈고, 내 의향을 더 따르게 되었다.

하긴 당연한 일이었다.

‘본인들 월급을 직접 관리하는 사람이 나니까.’

원래 밥 주는 사람…… 아니, 돈 주는 사람을 따라야 사회에서 살아남는 법.

어머니나 어버지, 멜도르는 무덤덤한 면이 있어서 모시기 편했겠지만, 난 꽤 까다로운 주인이었다.

게다가 그들의 직속상관인 로버와 에밀리가 내 사람인데, 어떻게 내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있을까.

물론 그만큼의 당근 역시 마련해 줬다. 그건 바로 꼬박꼬박 지급하는 특별 수당이었다.

‘결국은 다 먹고살자고 하는 거 아니겠어?’

반년 전, 처음 저택 단장을 할 때부터 지금까지. 난 그들에게 종종 특별 수당을 약속했고, 그것들을 모두 챙겨 주었다.

덕분에 날 향한 사용인들의 충성심은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었다.

‘역시 돈 많이 주는 직장이 최고인 거야.’

잠시 지난날들을 훑는데, 한참 찬양을 이어가던 제플린이 무언가 생각난 듯 주제를 바꿨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 약속이 있으시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래, 맞아.”

난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에 묻은 풀을 탁탁 털어 냈다.

“제플린, 내 실력이 정말 어지간한 기사 못지않다 이거지?”

“예, 당연합니다!”

“좋아, 이제 슬슬 너도 하고 싶고, 나도 하고 싶었던 걸 해 볼까.”

“……그런 게 있습니까?”

제플린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난 그늘을 벗어나 햇빛 쪽으로 향하며 씨익 웃었다.

“내 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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