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위, 윌리엄 공?”
“하하하!”
내 앞에 서 있던 덩치 큰 노인은 저를 부르는 소리에 호탕하게 웃으며 로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로버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솥뚜껑만 한 손으로 로버의 등을 퍽퍽 쳤다.
“젊은이가 왜 이렇게 굳어 있어! 내가 반갑지도 않아?!”
“윽! 진짜 윌리엄 공이십니까? 어떻게 벨라디 님의 집무실에 윌리엄 공이?”
“벨라디 님의 초대로 잠시 들렀지!”
“그게 가능한 거였습니까?!”
그 멍청한 얼굴을 보며 난 읽고 있던 서류를 내렸다. 그리고 두 사람에게 손짓했다.
“문 앞에서 그러지 말고 둘 다 이리로 와.”
내 말에 로버가 쪼르르 책상으로 다가왔다.
윌리엄은 그 모습을 보며 다시금 허허 웃었다.
“여전히 다람쥐처럼 폴폴거리는구나!”
“윌리엄 공! 저도 벌써 서른이 넘었습니다, 다람쥐라니요!”
“내 눈에는 여전히 어린애 같은걸?”
확실히 윌리엄의 체구 덕분에 로버가 작아 보이기는 했다.
둘의 재회를 바라보던 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부르지도 않았는데 찾아온 용건은?”
내 말에 로버가 놓았던 긴장의 끈을 다시 붙잡았다.
“이번 사격장 공사에 대해서 할 말이 있습니다.”
“아, 그거.”
난 일전에 끄적였던 사재 사용 내역서를 휙 로버에게 넘겼다. 얼떨결에 그걸 받아 든 로버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맙소사! 사격장에 연못까지 팔 계획이십니까?!”
“내 사재를 쓰겠다는데, 문제 있나?”
“있고도 남습니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금액을 한꺼번에 쓰시겠다니, 공작가의 살림을 다 망가트리시려고!”
그때, 로버의 외침을 끊고 윌리엄이 큰 소리로 웃었다.
“하하하! 로버, 지레 겁부터 먹는 건 여전하구나!”
“뭐, 뭐라고요?”
“이번에 벨라디 님이 책정한 사재와 공사 비용들은 나도 봤네. 공작가에 타격을 입히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던걸?”
윌리엄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그동안 벨라디 님의 사재로 책정되는 금액이 너무 적었어. 어느 누가 그 금액을 공녀의 사재라고 생각하겠나. 그와 반대로 멜도르님의 사재는 과하게 많았지.”
그러며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이걸 책정한 게 찰스였다고? 쯧쯧, 녀석의 죄가 커.”
그 말에 로버가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아버지는 공작 부인께서 원하시는 대로 책정한 것뿐입니다! 윌리엄 공께서는 아무것도 모르시면서!”
“이런, 섭섭한걸? 나도 한때 이 수도 저택의 집사였던 몸 아닌가. 저택 사정이야 내 눈에 훤하지.”
저 말대로 원래는 윌리엄이 이 수도 저택의 총집사였다. 그러다 내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을 그만두었지만.
‘아내의 요양 때문이랬나.’
하여튼 어머니는 그 빈자리를 메꾸기 위해 북부 성의 집사였던 찰스를 데리고 왔다.
원래 수도의 집사가 북부 성의 집사보다 직책이 높았다. 따라서 찰스는 윌리엄의 부재로 얼떨결에 승진을 하게 된 셈이었다.
이런 입장이니, 로버에게 윌리엄은 썩 반가운 상대가 아닐 것이다.
‘확실히 완전히 윌리엄의 페이스에 말려들기도 했고.’
로버는 윌리엄과 실랑이를 이어 갔지만, 계속 밀리기만 했다.
그걸 관찰하던 난 종이 한 장을 흔들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이것 역시 자네 덕분에 읽기 편해졌어. 수고했네, 윌리엄.”
“별말씀을요, 벨라디 님.”
난 로버가 종이의 내용을 볼 수 있도록 각도를 미세하게 조정했다.
곧 로버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설마 그거 제가 보고한 서류입니까?”
그가 기다렸던 질문을 꺼내자 윌리엄은 내게 사인을 보낸 후, 입을 열었다.
“아, 말이 나와서 말인데. 로버, 잠깐 나 좀 보세.”
그러고는 약속대로 로버를 집무실 모퉁이에 마련된 소파로 데려가 앉혔다. 그곳에는 내가 미리 준비해 놓은 서류들이 올려져 있었다.
“이번에 자네 보고서 중 이상한 부분이 있는데. 여기 북부의 가신 목록 중 이자 말일세. 왜 이렇게 작성했나?”
“예?”
로버는 얼떨결에 본인의 보고서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윌리엄이 가리킨 부분을 보며 떠듬떠듬 말을 이었다.
“아, 이건 재작년 아버지의 보고서를 토대로 적은 것인데.”
“쯧쯧, 로버. 잘 알아보지도 않고 찰스의 보고서만 참고한 건가? 이 남작은 작년에 노환으로 사망했네. 지금은 그 아들이 작위를 이었어.”
윌리엄이 그렇게 말하며 로버가 저지른 실수 몇 개를 더 지적했다. 그러자 로버의 얼굴이 빨개지기 시작했다.
난 그 광경을 재미있게 구경하며 윌리엄을 향해 입을 열었다.
“윌리엄, 다시 우리 가문을 위해 일해 볼 생각 없나?”
“하하하, 로버가 싫어할 텐데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괜찮고말고. 로버는 저택의 미래를 걱정하며 내 사재까지 간섭하는 인재니까.”
뼈가 담긴 내 말에 로버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러니 지금처럼 본인보다 경험 많은 집사가 간섭하는 것도 좋아할 거야.”
“아, 아닙니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로버가 인상을 찡그리며 벌떡 일어났다.
“지금 이 저택의 총집사는 저고, 전 제 권한에 누가 관여하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로버가 그 말을 꺼내자마자 난 책상을 두 번 쳤다.
툭툭-.
약속한 신호에, 윌리엄은 내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곧장 집무실을 나갔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로버가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앗, 윌리엄 공?”
“로버, 이리로 와.”
내 말에 로버가 멈칫하더니, 머뭇거리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사이 집무실의 문이 굳게 닫혔다.
둘만 남은 상황에 로버는 바짝 긴장한 모습이 되었다.
난 한쪽 눈썹을 까딱이며 그에게 물었다.
“너한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나?”
내 말에 로버가 잔뜩 자세를 굳히며 입을 열었다.
“그, 그게…….”
“주인의 사재에 간섭하고, 본인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서 이렇게 불쑥 찾아오는데?”
내 말에 로버가 고개를 숙였다.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전 단지 벨라디 님이 절 무시하고 공사를 진행하려는 게 부당하다고 생각해서…….”
여기까지 말한 그는 슬쩍 내 눈치를 살폈다. 난 그에게 계속 말해 보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나름 용기를 얻었는지 로버가 와다다 말을 덧붙였다.
“제 아버지께서는 ‘집사’에 대해, 대체할 수 없는 귀한 인력이라 하셨습니다. 따라서 그에 맞는 대우를 받아야 하고, 부당한 일은 참을 필요 없다고 강조하셨고요!”
거기까지 듣고 난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하!”
내가 큰 소리로 웃자 로버의 몸이 크게 움찔거렸다.
“아, 재밌네. 고고하기가 하늘을 찌르겠어.”
내 말에 로버의 얼굴이 다시금 붉어졌다.
난 그런 그를 가만히 주시했다.
“그래, 넌 귀한 인력이니 부당한 일은 참을 필요가 없다 치고. 그럼 너보다 더 우수한 이가 나타난 지금은 어떻게 할 거지?”
“…….”
“더 뛰어난 이가 있는데, 굳이 널 곁에 둘 이유가 있나?”
난 남아 있는 ‘사재 사용 내역서’를 로버의 눈앞에서 천천히 찢었다.
“날 도와준답시고 이따위 시건방진 월권이나 저지르고.”
갈기갈기 찢기는 종이처럼 로버의 얼굴 역시 새하얗게 변해 갔다.
“그러니 널 해고하고 윌리엄을 고용해도 아무런 불만 없겠지?”
이 신분제 사회에 따로 고용 계약서나 노동 관련 법이 있을 리 만무했다.
물론 귀족과 귀족 간의 고용 관계에 도의적인 책임은 존재하지만…….
‘내가 마음만 먹으면 진짜 로버를 해고할 수 있다는 거지.’
아, 물론 그러려면 상당히 귀찮은 단계를 거쳐야 했다. 일단 아버지의 허락을 받는 것부터 난관이니까.
‘하지만 이 정도의 허세는 부려 줘야 물고기를 낚는 거 아니겠어?’
애초에 심리적 압박감을 받고 있을 로버가 여기까지 생각할 리 없었다. 그 증거로 로버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잠깐.’
가만히 보니, 로버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난 남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쟤도 눈물 참 많아.’
마음에 차지는 않지만, 그는 앞으로 내가 재활용해야 할 인물이었다.
그러니 이쯤에서 로버를 혼내는 건 멈추기로 했다.
“이런 걸 부당하다고 하는 거다, 로버.”
내 말에 로버는 푹 숙였던 고개를 번쩍 들고 나를 바라봤다.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는 듯, 그의 눈이 동그랗게 떠져 있었다.
“그동안 네가 내뱉은 말들은 오만일 뿐이고.”
“크흡.”
로버는 기어코 흐르는 눈물을 주머니의 손수건으로 닦았다.
새삼 로버도 정말 곱게 자란 도련님이구나 싶었다.
‘부당하다는 것의 진짜 의미도 모른 채 살아왔다는 게 그 증거겠지.’
난 조용히 혀를 차며 로버를 바라봤다.
“찰스가 너한테 한 말이 그것뿐이야? 집사는 대우받아야 한다고?”
내 물음에 로버는 골똘히 고민하는 듯했다.
“아……!”
그러더니 뭔가를 생각해 내고는 촉촉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언제나 앨턴 공작가에 충성을 다해야 한다고…….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그럼 그 ‘충성’의 의미도 내가 알려 줘야 하나?”
“아, 아닙니다.”
로버가 코 먹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저었다.
난 며칠 전 그가 제출했던 서류를 살펴보며 말했다.
“이 서류들은 날짜 외에는 찰스가 작성했던 것과 큰 차이가 없더군.”
“죄송합니다, 벨라디 님.”
“잘못한 건 아니야. 어차피 같은 저택에서 같은 주인을 모시는데, 하는 일이 크게 변할 리 없지. 자잘한 실수는 주의하면 될 일이고.”
내 말에 로버는 눈에 띄게 안도했다.
난 살펴보던 서류를 내리며 그와 눈을 마주했다.
“다만, 네 아버지의 아류작이 될 거면 그와 똑같이 행동해. 지금처럼 어쭙잖게 흉내만 내지 말고.”
난 일부러 로버를 자극하는 단어를 사용했다.
아버지의 아류작.
그는 총집사가 된 후로, 항상 찰스와 비교를 받아 왔다. 이걸로 큰 스트레스를 받을 거란 건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지.
예상대로 그의 두 손이 주먹을 꽈악 쥐었다. 난 모르는 척 말을 이었다.
“한 번 더 기회를 줄 테니 잘해 봐. 윌리엄은 내 부탁으로 잠시 들른 것이니 입단속 잘하고.”
“예, 벨라디 님.”
“이만 나가도 좋아.”
“예, 정말 감사합니다.”
그렇게 문으로 향하던 로버가 잠시 멈칫하더니, 뒤돌아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벨라디 님, 전 언제나 아버지의 등만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총집사의 자리에 오르면, 아버지를 따라잡을 수 있을 줄 알았어요.”
여기까지 말한 로버가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막상 이 위치에 서고 나서도 아버지의 등은 여전히 멀리 있습니다. 그게 항상 절 조급하게 만들어요. 이번에도 그런 조급함에 경솔한 행동을 했던 것 같습니다. 진심으로 사죄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로버가 허리를 깊게 숙였다.
난 그의 정수리를 보며 물었다.
“그 말을 하려고 다시 돌아온 거야?”
내 물음에 로버가 휙 상체를 올렸다. 그리고 간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현명한 벨라디 님, 저에게 아류작 외의 다른 선택지가 있을까요?”
‘옳지.’
다루기 쉬운 로버. 계획대로 알아서 움직여 주는구나.
난 만족스러운 웃음을 감추며 무심하게 말했다.
“그런 건 스스로 찾아야지.”
내 말투에 로버가 허탈하게 웃었다.
“그렇겠죠……. 실례했습니다.”
로버는 꾸벅 인사를 하고는 다시 문으로 향했다.
그가 문고리를 잡고 돌리려는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