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그건 내가 알아서 한다.”
아버지는 날 보지도 않은 채 무뚝뚝한 목소리로 답하셨다.
그의 손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련하시겠어요.’
난 고개를 숙인 후, 아버지의 집무실을 나섰다.
내가 나오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로버가 궁금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이야기는 잘 끝나셨나요?”
나는 슬쩍 집무실 안쪽의 기색을 살피곤 표현을 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아버지께서 항상 내 입장도 생각해 주시니, 감사한 일이지.”
분명 아까 전에 칭찬했는데, 바로 이미지를 깎아 먹네. 눈치 없게 집무실 앞에서 저런 걸 물어보다니…….
‘하긴, 그러니 나 같은 사람의 표적이 되지.’
난 상냥한 목소리로 로버에게 말했다.
“로버 너는 계속 이곳에서 대기니?”
“아, 예! 그래도 방까지 에스코트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 혼자 가도 되니까. 그럼 수고하렴.”
“알겠습니다, 벨라디 님, 컥!”
난 로버의 발등을 콱 밟아 준 뒤 내 방으로 향했다.
‘저택 단장을 허락하셨으니, 내부 관리를 온전히 나한테 맡긴 거나 다름없어.’
이건 사용인들의 월급이나 고용도 내게 달렸다는 뜻이다.
‘이 권한을 아낌없이 사용해서 로버를 포함한 모두를 손아귀에 쥐어야지.’
신기한 기분이었다. 이렇게까지 내가 계획한 대로 일이 진행되다니.
‘항상 멜도르에게 밀려 존재감도 욕심도 버려야 했는데…….’
알렉산더, 정령검, 제플린, 어머니의 온실. 그리고 저택의 내부 살림까지.
이제는 내 것이다. 내가 차지했다.
나도 모르게 뿌듯한 마음이 차올랐다.
난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으로 향했다. 하녀도 없이 찾아온 거라, 복도에는 내 발소리만 울려 퍼졌다.
뚜벅뚜벅.
고요한 복도를 은은한 등과 달빛이 밝히고 있었다. 유유히 걷고 있는데, 문득 창문 밖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의 집무실이 위치한 5층은 전망이 좋아서 앨턴 공작가의 드넓은 정원이 무척 잘 보였다. 내 방에서 보는 것과 꽤 다른 높이에 들뜨던 마음이 푸시식 식어 갔다.
‘정신 차려. 여기서 만족하면 안 돼.’
앨턴 공작가의 직계가 생활하는 건물은 중앙에 있는 이 본관이다. 우리 가족은 한 명당 한 층을 전부 개인 공간으로 사용했다.
1층은 손님들을 맞이하는 공용 공간이라 제외.
집안 서열대로 제일 꼭대기인 5층은 아버지, 4층은 어머니, 3층은 멜도르가 사용했다.
그리고 제일 낮은 2층이 내가 생활하는 공간이었다.
전에는 이 사실에 크게 불만을 품지 않으려 노력했다. 공작인 아버지, 마법사인 어머니, 후계자인 멜도르가 나보다 위에 있는 건 당연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더 이상 누군가 내 위에서 생활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난 여전히 낮은 위치에 있었다.
‘잊지 마. 여기서 벗어나려면 내게 주어진 것 이상을 욕심내야 한다는 걸.’
예를 들면, 온실을 넘어서 주인을 잃은 4층까지 손에 넣는 것?
아니면 그대로 5층을 차지해도 괜찮고.
그걸 생각하니 아직 갈 길이 멀었다.
‘그래도 큰 걱정은 없어.’
난 그 과정마저 즐길 자신이 있으니까.
아치형 창문에 비치는 내 얼굴이 자신만만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
벨라디가 나간 집무실.
테오도르는 도통 서류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는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고 푹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하군.’
잠시 의자 등받이에 기댄 테오도르는 집무실 책상 위에 있는 사진을 바라봤다. 몇 년 전, 아내 도헤미아의 권유로 찍은 가족사진이었다.
소파에 앉은 도헤미아와 그녀의 품에 안겨 있는 멜도르.
그 옆에 서 있는 벨라디와 자신.
테오도르는 아름다운 미소를 띠고 있는 아내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당신이 없으니 아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그의 입에서 한탄과 같은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아이들과 자신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해 주었던 것이 아내였는데, 그런 그녀가 이제는 없다.
테오도르는 그게 참 막막했다.
“그래도 멜도르와는 종종 함께 시간을 보냈는데…….”
사진 속 도헤미아에게 말을 걸듯 읊조리던 테오도르는 어린 벨라디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본인과 똑 닮은 아이는 얌전히 웃고 있었다.
요즈음 테오도르는 계속해서 벨라디가 마음에 걸렸다.
정확히는 아내의 장례 후부터다. 그 후부터 자신의 딸은 이전과 사뭇 달라져 있었다.
항상 자신을 볼 때마다 반짝이던 눈이 이제는 빛이 꺼진 듯 깜깜하기만 했다. 아이의 미소 역시도 과거와는 느낌이 달랐다.
이상하게도 그걸 깨닫자, 잊고 있었던 과거의 행보들이 문득문득 떠올랐다.
‘내가 벨라디에게만 너무 가혹했나.’
테오도르는 앨턴 공작으로서 매우 바쁜 남자였고, 양육에 관심을 가질 틈이 없었다.
그나마 멜도르는 후계자였기에 나름 신경이 쓰였지만, 벨라디는 언제나 그의 눈 밖에 있던 아이였다.
그 결과, 테오도르는 자신의 자식임에도 불구하고 벨라디가 어색하면서 서먹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필요 이상으로 엄격히 대했다.’
아이에게 부러 냉정하고 모진 말들만 해 댔고, 다툼이라도 있으면 매번 벨라디부터 다그쳤다.
테오도르는 순수하게 궁금해졌다.
자신이 왜 그랬을까.
그 아이가 첫째라서?
자신을 닮아서 기대하는 바가 많았으니까?
테오도르의 생각은 연쇄 작용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사실 그는 벨라디가 검술에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 아이에게 검을 가르칠까 깊게 고민했지만, 아내의 반대에 부딪혔다.
-벨라디가 검이라니요? 그러다가 그 아이에게 흉터라도 생기면…… 그래서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하면 어떻게 해요? 여자는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 안 돼요.
벨라디는 이 앨턴가의 장녀였고, 그런 그녀를 무시할 수 있는 자는 많지 않았다. 애초에 과거처럼 남편이 아내를 무시하고 막 대할 수 있는 시대도 아니었다.
다만 도헤미아는 북부의 빈민층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고, 그 후에는 눈의 정령과 함께 숲에서 지냈다.
정보가 완전히 차단된 세계에서 자란 아내는 조금씩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을 전혀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때 당시, 본인도 도헤미아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있다지만, 후계자도 아닌 벨라디에게 굳이 위험한 것을 가르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테오도르는 벨라디의 재능을 알고도 검을 가르치지 않았다. 아니, 한술 더 떠 그 아이가 그토록 좋아하던 후계자 수업에서도 제외해 버렸다.
-멜도르는 후계자이고 더 어리니까 집중할 시기를 놓치면 안 돼요. 하지만 벨라디는 원래부터 혼자서 잘했고, 워낙 어른스러운 아이니까 우리를 이해해 줄 거예요. 애초에 후계자 수업이니 벨라디는 받을 필요 없잖아요.
도헤미아는 이렇게 말했고, 그는 이번에도 아내의 말에 납득했다. 그래서 아이가 처음으로 싫다고 소리쳤는데도 그걸 무시했다.
벨라디는 그 후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지 않았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테오도르는 이런 딸을 볼 때마다 가끔 속이 먹먹해졌다. 그리고 이 정체 모를 먹먹함이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집에서조차 피곤해지고 싶지 않았으니까.’
어쩌면 그래서 더욱 아이에게 눈을 돌리고 바깥일에 집중해 왔을지도 모른다.
‘……그래, 이런 주제에 새삼.’
이미 지나간 과거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애초에 그동안 아이들은 전부 아내가 키워 왔다. 그런데 갑자기 자신이 아이들에게 참견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 않은가.
벨라디가 조금 이상하다고 해도, 딱히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고.
‘어차피 그 애 정도면 다 컸으니.’
테오도르도 딱 벨라디 나이 때부터 모든 일을 혼자 결정했고, 그 과정에서 책임을 배웠다.
아내의 말에 따르면, 벨라디는 어렸을 때부터 뭐든지 혼자 잘하는 아이였다. 그러니 이번에도 어련히 알아서 잘 성장할 것이다.
‘지금 느껴지는 위화감도 다 과정이니까 그런 것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방금 벨라디가 내뱉은 말이 계속 테오도르의 귓가에 되감겼다.
-너무 오랫동안 집무실에 계시지 말고 얼른 주무세요.
변했다고 느낀 딸이지만, 그래도 자신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게 테오도르의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조금 더 다정하게 대답할 걸 그랬나…….”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테오도르는 이내 사념을 그만두었다.
새삼스레 딸아이와 다정한 가족 놀이를 할 정도로 자신은 여유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제국의 북부를 책임지고 있으니까.
테오도르는 놓았던 펜을 들고 다시 서류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
아버지에게 저택 관리를 일임받은 즉시, 난 내 서재를 간이 집무실로 꾸몄다.
그동안 어머니는 찰스와 에밀리에게 관리를 맡겼던 터라, 4층에는 제대로 된 집무실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쉽네, 단번에 4층으로 진입할 좋은 기회였는데.’
뭐, 기회가 이번만 있는 건 아니니까.
난 에밀리가 보고한 서류들을 검토하며 저택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살폈다. 다행히 어렵지 않아, 흐름을 파악하는 데 큰 문제는 없었다.
잠시 집중하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로버입니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로버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품 안에는 내가 요청한 서류가 한가득이었다.
“그동안 제가 임의로 처리한 서류들입니다.”
난 보고 있던 종이들을 치운 후, 로버가 내민 것을 읽어 보았다. 내 생각보다 보고서는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덜렁거릴 줄 알았는데, 꼼꼼한 면도 있었군.’
아무 말 없이 서류를 보자, 로버가 헛기침을 하더니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크흠, 제가 총집사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서류 작성만큼은 아버지께 호되게 배웠습니다.”
“그런 것 같네. 잘했어.”
내 칭찬에 로버는 본인이 자랑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에게서 시선을 떼 다시 서류를 넘기던 난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종이 한 장을 빼내 유심히 바라봤다.
“사재 사용 내역서?”
“아, 그거!”
로버가 방긋 웃었다.
“제가 벨라디 님을 위해 특별히 만들었습니다!”
“이게 뭔데?”
내 질문에 그는 해맑은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벨라디 님이 너무 어린 나이에 내부 관리를 맡으신 것 같아서요. 저택 예산에 관해서 아직 감각이 없으시니, 제가 도와드려고 합니다!”
“……그래?”
“예! 이제는 스스로 본인의 사재를 책정하시잖아요? 앞으로 사재를 사용하실 때, 들고 계신 ‘사재 사용 내역서’를 적어서 저에게 주시면 됩니다!”
그 말에 난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