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벨라디 앨턴, 무슨 일인지 네가 설명……. 아니다.”
거기까지 말한 아버지가 한숨을 푹 쉬더니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로버.”
“예, 공작님!”
“네가 설명해라. 아주 객관적으로.”
그 말에 로버의 어깨가 바짝 긴장했다.
나는 아버지가 뒤를 돌아본 틈을 타 로버에게 눈짓을 보냈다.
‘후환이 두렵다면 처신 잘해라.’
아버지와 멜도르는 뒤끝이 없는 편이었다. 덕분에 사용인들 사이에서 모시기 편한 주인이라는 소문이 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난 그렇게 편한 주인은 되기 그른 인물이었다.
‘그날 에밀리에게 내 주의 사항에 대해 들었겠지?’
무언의 경고를 알아들었는지, 로버의 목울대가 크게 울렁였다.
“제가 본 것 그대로 설명하겠습니다, 공작님.”
로버가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답했다.
“벨라디 님께서 방치되었던 저택 단장을 시작하셨고, 이 온실의 소파와 테이블도 계절에 맞춰 바꾸려고 하셨습니다.”
그래도 나름 집사라고, 아버지와 내 시선에도 그 목소리만큼은 진중했다.
“그래서 한참 가구를 옮기던 중, 소공작님께서 온실에 들어오셨습니다. 소공작님은 가구를 옮기는 저희를 보고 오해를,”
“건방지잖아요!”
중간에 멜도르의 코 먹은 소리가 끼어들었다.
“본인이 뭐라고 어머니의 온실에 손을 대요! 어머니의 초대도 대부분 거절했으면서 무슨 명분으로 이곳을!”
나도 그날 전에는 되도록 어머니의 초대에 응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온실만 봐도 가슴이 쓰려 왔는데, 어떻게 태평한 얼굴로 차를 마실 수 있을까.
덕분에 초대를 모조리 거절했고, 어머니와 멜도르는 이런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두 사람에게 그 사건은 별것 아니었기 때문이다.
항상 그래 왔던 것처럼, 결국 그날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괴로워하는 건 상처받은 나밖에 없었다.
‘그런데 미쳤다고 어머니가 널 편애하는 모습을 구경하러 가겠니.’
그 꼴을 볼 시간에 사격이나 더 하고 말지.
멜도르의 말에 아버지의 눈이 얼어붙은 사파이어로 향했다.
“그럼 저 사파이어는 무슨 일이냐.”
“그, 그건…….”
멜도르가 아무 말도 못 하자, 로버가 대신 나섰다.
“소공작님과 벨라디 님 사이에 약간의 다툼이 있었고, 소공작님께서 마법을 사용하시다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그냥 쟤를 겁주려고 했던 것뿐이에요! 그런데 저게 갑자기 마법의 방향을 바꾸는 바람에! 평소에는 잘만 피했으면서!”
멜도르의 반박에 나도 준비해 두었던 변명을 꺼내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반사적으로 마력을 사용했어요. 의도치 않았지만 제 마력으로 멜도르가 쏜 마법의 방향이 틀어졌고요.”
“반사적은 무슨! 일부러 그런 거 누가 모를 것 같아?!”
버럭 소리친 멜도르가 금방 기죽은 강아지처럼 꼬리를 내렸다. 아버지가 형형한 눈빛으로 우리를 내려다봤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구석에 있는 사용인들을 보지도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로버, 시종들을 데리고 나가라.”
“예, 옙! 자, 빨리들 일어나게!”
아버지의 축객령에 로버와 사용인들이 헐레벌떡 온실을 벗어났다.
멜드르와 내가 싸웠을 때부터 구석에 숨어서 숨도 잘 못 쉬고 있던데, 아마 저 축객령이 무척 반가웠을 것이다.
그들이 우르르 나가고, 얼추 상황을 파악한 아버지가 멜도르를 바라봤다.
“감정에 휘둘려 마법을 쓰지 말라고 했을 텐데, 멜도르 앨턴.”
“……죄송합니다.”
“한 번만 더 내 귀에 네가 마음대로 마법을 썼다는 말이 들리면 수업에서 마법을 빼겠다.”
“아, 아버지!”
“네게 소질이 있기에 후계자 수업 외에 마법 수업까지 배우는 걸 허락했지만, 이렇게 사사로이 쓸 거면 가치가 없다.”
“잘못했습니다…….”
멜도르가 훌쩍였다.
처음에는 강하게 말하던 아버지도 마음이 약해지셨는지 경고를 멈추셨다. 그리고는 서툰 손길로 멜도르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다른 수업이 버거워서 마법으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한다. 하지만 넌 앨턴가의 후계자야. 조금만 더 힘내 다오.”
아버지치고 다정한 말에 멜도르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아들이 기특한지 아버지는 놈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고는 날 바라봤다.
멜도르를 바라보는 것보다 조금 더 냉정한 시선이었다.
“벨라디 앨턴.”
“예, 아버지.”
“이곳이 막 어미를 잃은 네 동생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지는 않겠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마음대로 손을 대서 동생과 불화를 일으켜? 저택을 관리할 수 있는 권한을 아직 네게 넘기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아버지는 골치 아프다는 듯 인상을 찡그리며 나를 탓했다.
먼저 위험한 마법을 사용한 건 멜도르였다. 하지만 놈의 잘못은 어느새 스르륵 넘어갔고, 나만 과하게 타박을 받는 상황이 왔다.
하지만 난 그저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이런 상황이 익숙하기도 했고, 생각해 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저택 단장을 하며 제가 욕심을 낸 듯싶습니다. 시정하겠습니다, 아버지.”
내가 반성의 모습을 보이자 아버지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괜한 사고 치지 말고 얌전히 지내도록.”
“네.”
그렇게 말하며 힐끔 옆을 보니 멜도르가 쌤통이라는 듯 비죽비죽 웃고 있었다.
‘얄미운 새끼.’
짜증이 치솟았지만, 버틸 수 있었다.
내게는 이 뒤에 계획이 있으니까.
아버지는 몇 번 더 경고한 후, 우리를 온실에서 내보냈다. 난 온실에서 빠져나와 저택 단장이 한창인 1층으로 향했다.
멜도르가 뒤에서 이죽거렸다.
“제발 아버지 말 새겨들어. 다시는 어머니 물건에 손대지 말고.”
“딸이 어머니 물건에 손을 댈 수도 있지. 네가 뭔 상관이야?”
“네가 어머니랑 가까우면 얼마나 가까웠다고!”
난 멜도르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볼일이 끝났으니 더 이상 놈을 상대할 필요 없었다. 일은 벌어졌으니,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될 뿐.
난 여유로운 마음으로 저택 단장을 진행했다.
***
그날 밤.
잠들지 않고 방에서 기다리니,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벨라디 님. 공작님이 부르십니다.”
“왔군.”
난 흐트러진 실내복을 정리한 후, 하녀에게 문을 열라 눈짓했다.
하녀가 재빠르게 문을 열었고, 그 앞에는 로버가 서 있었다.
“가자.”
난 로버를 지나쳐 아버지의 집무실로 향했다.
로버가 뒤따라오며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그 후에 공작님께서 사건을 더 자세히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잘 보고해 놓았고요.”
“아버지가 네 말을 믿는 눈치니?”
“그럼요. 저 외에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시종들한테도 비슷한 내용을 들었을 겁니다. 제가 미리 단속시켰거든요.”
만족스러운 대답에 난 입꼬리를 올리며 로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잘했어, 로버.”
“감사합니다, 벨라디 님.”
로버는 가슴에 손을 얹고 고개를 숙였다.
‘내가 별말 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처리했군.’
로버도 아마 어느 정도 눈치챘을 것이다. 이 저택에서 가장 뒤끝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오늘 일이 끝나면 로버도 확실히 잡아 놔야지.’
난 그렇게 생각하며 여유 있게 발걸음을 옮겼다.
멜도르와 다툼이 있을 때 시종들을 온실 밖으로 내보내지 않은 건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
‘그들이 지금처럼 증인이 되어서 내 편을 들어 줘야 하거든.’
부부는 닮는다고, 아버지는 평소 냉정한 분이지만 멜도르와 관련된 일에서는 성급한 면모를 보이셨다.
덕분에 어릴 적부터 우리 남매가 싸울 때면 일단 나를 혼내는 편이었다.
‘그러다 나중에서야 진상을 파악한 후, 나를 따로 부르셨지.’
그리고 내게 원하는 보상을 말하라며 아버지 나름대로 나를 달랬다.
난 그게 참 좋으면서도 싫었다.
아버지가 날 달래 주면 ‘그래도 내게 신경은 쓰시는구나!’ 싶고, 하지만 다툼이 있을 때마다 누나라는 이유로 먼저 날 탓하는 건 너무 억울하고.
‘하지만 이제는 아무렇지 않아.’
아버지의 냉정한 시선?
사냥 대회 때도 그랬지만, 그따위 시선은 내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오히려 지금만 버티면 받을 보상 생각에 후후 웃음이 나왔다.
새어 나오는 미소를 갈무리하며 아버지의 집무실 앞에 섰다.
똑똑.
문을 두드리자,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난 로버가 열어 준 문 안으로 들어갔다. 아버지는 그날처럼 책상에 가득 쌓인 서류들을 체크하고 있었다.
“부르셨어요, 아버지.”
그쪽으로 다가가며 말하자 아버지는 서류에서 눈을 뗀 후, 나를 바라봤다.
“그래, 온실에서의 상황은 자세히 들었다.”
아버지는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으며 미간을 문질렀다.
“네가 저택 단장을 조금 서두른 면이 없지 않지만, 나도 과하게 널 탓한 것 같다.”
“이해해요, 아버지. 제가 누나로서 멜도르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한 건 사실이니까요.”
웩, 멜도르의 입장을 이해하다니. 내가 그러면 앞으로 벨라디 앨턴이 아니라 헛똑똑이 앨턴이다.
하지만 입으로는 무슨 말을 못 할까. 난 반성한다는 얼굴로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었다.
“괜히 저 때문에 어머니의 온실이 망가진 기분이에요. 멜도르의 마법으로 땅이 전부 얼어붙었으니……. 그곳은 다시 온실로 사용하지 못하겠죠.”
“……어쩔 수 없지.”
아버지가 착잡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난 이때를 노려 그를 바라봤다.
“아버지, 어머니의 온실을 제가 책임지고 싶어요.”
“책임이라고?”
“네. 결국 제 행동을 멜도르가 오해해서 일어난 일이니까요. 이제 온실로는 사용하지 못하겠지만……. 더 유용한 공간으로 만들면 그 아이도 이해할 거예요.”
예를 들면, 나만의 보석 창고라든가?
당연히 그 과정에 멜도르의 이해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내 번지르르한 말에 아버지의 붉은 눈이 잠시 일렁였다.
‘온실에 얽힌 어머니와의 추억이라도 떠올리나 보지?’
참 다행이었다. 난 상처밖에 없어서 하나도 아쉽지 않으니까.
일전의 알렉산더 때처럼 침묵이 길어졌다. 하지만 그리 걱정되지 않았다. 애초에 날 달래려고 부른 것이니, 내 부탁을 거절하지 않으실 거다.
이윽고, 예상대로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온실 정리는 너에게 맡기마. 네가 벌여 놓은 저택 단장도 책임지고 마무리 짓거라.”
난 침착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예, 아버지. 감사합니다.”
‘좋아, 어머니 온실도 이제 내 거야!’
이렇게 빠르게 별관을 손에 넣다니, 이 영광을 멜도르에게 돌리고 싶다.
아버지는 다시 서류로 시선을 내리셨다.
“그만 나가 봐.”
“네, 아버지……. 너무 오랫동안 집무실에 계시지 말고 얼른 주무세요.”
내 말에 서류에 사인을 하던 아버지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