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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장녀가 육아물에 빙의하면-11화 (12/197)

11.

그때를 생각하며 난 멍하니 중얼거렸다.

“어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좋았을걸…….”

그랬다면 그녀가 내게 준 상처들을 어떻게 해서든 되돌려 줬을 텐데.

‘……아닌가?’

정말 어머니가 살아 있다면, 난 그녀를 순수하게 증오할 수 있었을까?

어머니를 향한 배신감과 비참함은 전생을 자각한 지금도 잊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와 대등하게, 어쩌면 그 이상으로 난 그녀를 사랑했다.

애써 잊고 있던 어머니에 대한 복잡한 감정이 들끓었다. 난 심호흡을 하며 서둘러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래……. 역시 돌아가신 게 나아. 앞으로 내 감정을 어지럽히는 존재는 필요 없으니까.’

어쨌든, 내게 상처뿐인 이 온실을 곱게 놔둘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물리적으로라도 전부 갈아엎어야 직성이 풀리거든.’

난 온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이곳을 완전히 들어내고 거대한 보석 창고를 만들 구상을 하자, 곧 침착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왕 갈아엎을 거, 내 것으로 만들면 더욱 좋고.’

그때,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로버가 입을 열었다.

“벨라디 님, 가지고 온 가구를 온실에 배치할까요?”

“……지금은 그래야겠지.”

어머니의 온실을 차지할 때는 아직 멀었으니까, 이 계획은 일단 보류.

난 온실 곳곳에 놓여 있던 벨벳 소재의 소파들을 가리켰다.

“이제 더워지는데 온실에 벨벳이라니. 전부 새로운 것들로 바꿔.”

“예, 벨라디 님! 자, 움직여!”

로버의 지시에 뒤에 있던 시종들이 새로 주문한 소파와 그에 맞는 테이블을 옮겼다.

한창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데.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앳되고 우렁찬 외침이 온실에 쨍하고 울렸다.

뒤를 보자, 어느새 외출을 마치고 돌아온 멜도르가 눈에 불을 켜고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를 무시하는 건 이제 그만두었는지, 놈은 무척 흥분한 상태로 내게 소리쳤다.

“너 미쳤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손을 대!”

“쓸데없이 소리 지르지 마. 계절이 바뀌었으니 그것에 맞게 소파를 바꾸려는 것뿐이니까.”

“하, 그럼 지금 저택의 저 소동들도 다 네가 꾸민 짓이란 거지? 네가 진짜 돌았구나?!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지금 이딴 걸 할 때야!”

멜도르는 버럭 악을 쓰며 옆에 있는 라탄 소파를 발로 찼다. 그 기세에 로버와 사용인들이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걸 본 멜도르가 소리쳤다.

“로버! 넌 지금 누구 옆에 있는 거야! 쟤가 저러면 네가 말렸어야지!”

“소, 소공작님. 그것이…….”

난 로버의 앞에 서며 멜도르의 시선을 차단했다.

“계절에 맞춰 저택을 단장하는 건 가문의 당연한 행사야. 넌 신경 쓸 필요 없으니 할 일이나 해.”

“내가 어떻게 신경을 안 써! 이 가문은 내 가문이야! 가문의 구성원이 철없는 망아지처럼 날뛰면 내가 바로 잡아야지!”

그 말에 내 심기가 상당히 불편해졌다.

“철없는 망아지?”

“그래! 앨턴 공작가의 후계자로서 네 버릇 없는 행동, 도저히 눈 뜨고 못 봐 주겠다!”

멜도르는 자신의 화를 참지 못하고 내게 삿대질을 해 댔다.

“어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이렇게 나서지도 못했을 게! 돌아가셨으니 네 세상인 것 같아?! 네가 그러고도 자식이냐? 어머니 보기가 부끄럽지도 않냐고!”

도를 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나도 모르게 손이 먼저 뻗어 나갔다.

휙-!

뻗어 나간 내 손이 멜도르의 얼굴을 움켜잡기 직전이었다.

‘아직 멜도르를 상처 입혀서는 안 돼……!’

가까스로 이성이 돌아왔고, 난 놈의 코앞에서 겨우 손을 멈췄다.

저택 관리는 당연한 수순으로 장녀인 내가 맡게 되겠지만, 아직 완벽하게 권한을 넘겨받은 건 아니었다. 이 와중에 문제를 일으켜서 아버지에게 눈도장 찍힐 수는 없었다.

‘저딴 말을 듣고도 아무런 반응을 할 수 없다니.’

난 들끓는 분노를 애써 식히며 멜도르의 푸른 눈동자를 뚫어지게 노려봤다.

내 형형한 눈빛에 멜도르가 살짝 몸을 떨었다.

“으윽! 날 위협할 셈이야?!”

멜도르는 잠시라도 본인이 움츠렸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

놈은 내 손을 팍 쳐 내며, 입으로 무언가를 웅얼거렸다. 곧 멜도르의 손 주위로 푸른 마력이 미미하게 움직였다.

그걸 보는 즉시, 나는 멜도르가 무엇을 하려는지 눈치챘다.

‘마법!’

이 새끼가 또 나한테 마법을 쓸 속셈인가?

난 삐뚤어진 웃음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본인이 처음으로 내게 마법을 쏘았던 때를 재현하고 싶은가 본데…….

‘어차피 나한테 통하지도 않을 거, 괜히 마력만 낭비하기는.’

그때 당시에는 나도 당황해서 무식하게 손으로 막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난 비웃음을 걸치며 놈의 행동을 지켜봤다. 네가 행하는 마법 따위 언제든지 피할 수 있으니, 어디 한번 해 보라는 뜻이었다.

“이익!”

내 눈빛을 읽은 멜도르는 이를 악물더니 이제는 두 손으로 마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예상보다 훨씬 크게 부풀어 오르는 마력의 크기를 보며 난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저 마력의 흐름은…….’

어머니의 주특기인 얼음 마법으로 보이는데.

저 마법은 평소 멜도르가 화풀이로 날렸던 마법보다 강도가 강했다. 저걸 맞으면 아마 일주일은 꼬박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약이 올랐다지만, 저걸 나한테 쏘려고 하다니.’

쟤는 누구를 닮아서 저렇게 못돼 처먹었을까. 마법이 시전되기 전 멜도르를 막아야겠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순간, 머리가 팽팽하게 돌아갔다.

‘잠깐, 이걸 이용하면 어머니의 온실을 손쉽게 가질 수 있겠는데?’

그때 멜도르가 완성된 얼음 마법을 쏘았다.

푸른색 빛줄기가 빠른 속도로 내게 날아왔다.

“좋아, 멜도르.”

네가 그렇게 그때를 재현하고 싶어 하니, 한 번쯤은 어울려 주지.

난 평소처럼 멜도르의 마법을 피하지 않았다. 대신 재빠르게 내 마력을 손에 휘감아 다가오는 빛줄기를 내리쳤다.

마치 초여름의 그 온실처럼.

피슝-!

마법의 방향이 깔끔하게 틀어졌다.

빛줄기는 내가 의도한 대로 온실 한가운데의 크리스털 기둥으로 향했고, 보존 마법이 걸려 있는 사파이어에 멋지게 명중했다.

실시간으로 그걸 목격한 멜도르가 소리쳤다.

“아, 안 돼!”

멜도르의 비명과 함께 사파이어가 꽁꽁 얼어붙어 갔다.

애초에 멜도르가 사용한 마법 자체도 약한 편이 아니었다. 거기에 방향을 틀면서 내가 마력까지 더했으니, 얼음 마법은 더 강한 효과를 발휘했다.

보존 마법이 걸려 있던 사파이어가 얼어붙자 그 영향을 받는 온실의 꽃들도 빠른 속도로 얼기 시작했다.

“꼬, 꽃들이!”

“헉! 땅도 얼고 있습니다!”

숨을 죽이고 우리를 보고 있던 사용인들과 로버가 기겁했다. 그들의 말대로 온실은 꽃뿐만 아니라 땅까지 전부 꽝꽝 얼고 있었다.

그걸 바라보던 멜도르가 머리를 쥐어 잡으며 악을 질렀다.

“으아아아악! 왜 피하지 않았어! 너 충분히 피할 수 있었잖아!”

“흐음. 나도 너무 깜짝 놀란 나머지……. 네 공격을 그만 튕겨 버렸네?”

마법 실력이 늘어난 건 멜도르뿐만이 아니었다. 나도 과거보다 더 능숙하게 마력을 조절할 수 있으니까.

그러니 멜도르의 공격을 조작하는 건 쉬운 일이었다.

‘그동안은 귀찮은 일이 생길까 봐 봐줬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 없지.’

난 단 하나의 상처도 생기지 않은 손을 쥐었다 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니까 누가 그렇게 강한 마법을 쓰랬니?”

“아아악! 어머니의 소중한 온실을 네가 망친 거야!”

멜도르가 눈을 뒤집으며 내게 달려들었다. 난 그걸 가볍게 피하며 얼어붙은 꽃을 툭 건드렸다. 그러자 꽃이 가루가 되어 파스스 흩어졌다.

“망친 건 내가 아니라 너야. 그나저나 이제 이 온실은 못 쓰겠다. 그렇지?”

흥분한 멜도르는 내 말이 들리지도 않는지, 주먹을 휘두르느라 바빴다. 난 묘한 통쾌함을 느끼며 그걸 요리조리 피했고.

잠시 그러고 있는 사이, 벼락같은 외침이 온실 안에 내리쳤다.

“멜도르 앨턴!”

멜도르의 움직임이 딱 하고 멈췄다. 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돌려 온실 입구를 바라봤다.

입구에는 굳은 얼굴의 아버지가 서 있었다.

“아, 아버지…….”

멜도르는 즉시 자세를 풀고 바로 섰다.

나 역시 헝클어진 치마를 툭툭 털며 아버지를 바라봤다.

“오셨어요, 아버지.”

“……도대체 이게 무슨 꼴이지?”

아버지는 저벅저벅 온실 안으로 들어오며 사방을 둘러봤다.

완전히 얼어붙은 사파이어와 크리스털 기둥.

얼음 가루가 되어서 흩어지는 꽃들.

한쪽 구석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사용인들과 내팽개쳐진 소파들까지.

아버지는 묵묵히 그것들을 보더니 우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말해라. 이게 무슨 꼴이지? 온실은 왜 이렇게 된 거냐?”

그 말에 난 입을 열어 상황을 설명하려 했다.

그 순간이었다.

“흐어어어어엉-!”

갑작스러운 울음소리에 난 멈칫하고 녀석을 바라봤다.

멜도르가 너무나 서러운 얼굴로 펑펑 울고 있었다.

“얘, 얘가! 어머니의 온실을 마음대로 손보려고 해서! 그래서 막으려고 한 것 뿐인데에!”

그 울먹임에 난 새삼 놈의 나이를 실감했다.

‘12살……. 아직 어리다 이거지.’

멜도르의 눈물에 아버지의 붉은 눈동자가 내 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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