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K-장녀가 육아물에 빙의하면-10화 (11/197)

10.

“죄, 죄송합니다. 벨라디 님. 계절은 변했는데 새 가구는 없어서! 일단 제 요량껏 바꾼 것인데……!”

“됐어, 탓하려는 거 아니니까. 어머니가 아프셨으니 새 가구를 구매할 시간도 여유도 없었지.”

이곳은 새 계절을 맞으면 집안의 안주인이 나서서 그에 맞게 저택을 꾸미는 게 당연한 사회였다.

고위 귀족일수록 한번 사용했던 물건은 처분하고 전부 새롭게 구매하는 것이 미덕이었고.

‘단장이라고 해 봤자 커튼이나 카펫, 패브릭 장식 같은 것들을 바꾸는 정도지만.’

참고로 어머니는 저택 단장을 썩 귀찮아하시는 분이셨기에, 우리 저택은 매번 비슷비슷한 분위기로 꾸며졌다.

그래도 전에는 계절에 따라 어울리는 색감으로 맞춰졌는데…….

‘멜도르가 검은색이 좋다고 한 이후로는 사시사철 인테리어가 어두운색이었지.’

게다가 작년에는 어머니가 쓰러지셨으니, 저택을 단장하는 건 생각도 못 할 일이었다. 덕분에 벌써 초여름이지만 이 집은 아직 칙칙한 상태였다.

난 어두운 갈색 계열의 응접실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가뜩이나 축 처진 저택인데 내부까지 이러면 답이 없어.’

이번 기회에 저택 인테리어를 손보는 게 좋을 듯싶었다. 아주 화사하고, 다가올 여름에 맞춰서 산뜻하게.

‘사용인들이 우울해할 틈도 없이 아주 대대적으로 바꾸자.’

난 카탈로그의 신상품 중 눈에 띄는 라인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여기부터, 여기까지. 모조리 주문해. 저택을 완전히 뒤바꿀 거니까, 수량 맞춰서 빠짐없이 전부 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로버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공작님과 소공작님의 허가도 없이 마음대로 가구를 주문하실 수는, 컥!”

“그럼요, 벨라디 님!”

오랫동안 내 옆에서 일해 왔던 에밀리가 로버의 발등을 뒤꿈치로 콱 찍어 버렸다. 그러고는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빠르게 주문을 넣으면 며칠 내로 받으실 수 있을 거예요.”

“그래. 그리고 로버.”

발등이 아픈지 살짝 인상을 찡그리던 로버가 어벙한 표정을 지었다.

“예, 예?”

난 로버를 응시하며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내 시선에 아직은 젊은 축에 속하는 로버가 움찔거리며 고개를 떨궜다.

“네 아버지인 찰스에게 못 배웠나? 내 앞에서 큰소리를 내면 어떻게 되는지.”

“그, 그게…….”

재작년, 이 저택의 총집사였던 찰스는 병환으로 은퇴했다.

이후 후임자를 누구로 할지 말이 많았는데, 찰스의 간곡한 부탁으로 어머니는 그의 아들이자 보조 집사였던 로버를 선택했다.

로버는 원래 멜도르와 아버지를 보조했었기에, 나보다 그들의 눈치를 더 많이 봤다.

나도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고 지금까진 그가 내게 다소 건방을 떨어도 용인해 주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렇게 둘 생각 따위 추호도 없었다.

“이 저택의 총집사로 일하려면 정도껏 눈치를 키워야지. 저택의 안주인인 어머니가 돌아가셨어. 그럼 새롭게 저택을 책임질 이는 누가 될까?”

“그건…….”

“아버지? 바깥 업무로 바쁘신 분이 내부를 어떻게 신경 쓰시겠어. 그럼 멜도르? 검술 수업만으로도 정신없는 그 애가 뭘 할 수 있다고.”

내가 피식피식 웃으며 말할수록, 로버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 갔다.

“말해.”

난 웃음기를 거두고 위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 이 저택을 관리하게 될 이는 누구지?”

“…벨라디 님이십니다.”

“그럼 내가 저택 단장을 위해 가구를 주문하겠다는데, 누구 허락을 받아야 하나?”

“아, 아닙니다! 제가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가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야 난 꽉 쥐고 있던 분위기를 풀었다.

그리고 에밀리가 들고 있던 카탈로그 북을 받아 책장을 넘기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알았으면 로버 넌 인력들을 준비해 놔. 최대한 많이.”

“옙!”

“에밀리 너도 하녀들에게 말해 놓고.”

“예, 벨라디 님.”

“피곤하니까 둘 다 나가도 좋아.”

내 말에 둘은 공손히 인사하고 응접실을 나섰다.

응접실 문이 닫히는 틈으로 훌쩍이는 로버와 그의 등을 토닥이는 에밀리의 모습이 보였다.

“순간 벨라디 님이 공작님보다 더 무서웠어요.”

“괜찮아요, 로버. 앞으로 조심하면 벨라디 님도 별말씀 안 하실 거예요.”

그렇게 응접실 문이 완전히 닫히자 난 소파에 몸을 푹 기대었다.

“사용인들을 수중에 넣어야 한다라…….”

사용인들은 하녀장과 집사 두 명이서 통솔한다. 그러니 사용인들을 손에 넣으려면 먼저 그 둘을 다룰 줄 알아야 했다.

나와 함께한 시간이 길었던 에밀리는 이미 내 사람이나 마찬가지이고…….

‘남은 건 로버인가.’

그는 원작에서 비중 있게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 제플린과는 달리 별다른 정보는 없었지만…….

뭐, 큰 문제는 없었다.

‘로버 같은 이들의 마음을 얻는 건 쉬운 일이니까.’

난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저택의 사용인들은 아주 빠른 시일 내에 내 입맛대로 움직이게 될 것이라는 걸.

***

며칠 후, 저택 앞으로 내가 주문한 가구들이 도착했다.

“저 소파는 4층 응접실로.”

“예, 벨라디 님!”

“이 테이블보는 식당으로.”

“네, 벨라디 님!”

“3층 복도 커튼은 어디 있지?”

“여, 여기 있습니다!”

“좋아, 모두 빠릿빠릿하게 움직여!”

“옙!”

난 엄청난 물량의 상자들 사이를 거침없이 유영하며 옮길 가구들과 위치를 읊었다. 내 말에 수많은 사용인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물건들을 날랐다.

덕분에 어머니의 부재로 처질 시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그럴 틈도 주지 않을 것이고.

“삼 일 안에 일을 끝내면 특별 수당을 주겠다!”

“예, 벨라디 님!”

특별 수당이라는 말에 사용인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도착한 화물의 포장을 뜯은 후 선정된 위치에 옮기는 손길도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아주 혼이 쏙 빠질 정도로 바쁜 현장 속, 모두 전적으로 내 말에 의지한 채 움직이는 것을 보며 난 묘한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아, 사냥 대회에서도 느꼈지만……. 난 이런 게 체질인가 봐.’

내가 계획대로 명령을 내리면, 사람들은 그걸 시행하기 위해 척척 움직인다. 난 이 광경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빙의를 자각하기 전에는 이렇게 대대적으로 사용인들에게 명령을 내린 적이 없었다. 항상 가족들의 눈치를 보며 침묵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가, 지금 이 순간이 더 재밌게 느껴졌다.

‘이래서 다들 권력을 탐하는 건가.’

가주인 아버지는 매일 이런 기분에 휩싸인 채 살겠지?

마침 지금 저택에는 아버지와 멜도르가 외출로 집을 비우고 없었다.

원래 사자가 없으면 여우가 왕이라고, 난 아버지가 없는 저택 안을 마음껏 활개 쳤다.

‘여우 자리도 이런데, 사자는 얼마나 즐거울까.’

그렇게 생각하며, 이번에는 저택의 별관을 정리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별관 안에는 어머니가 살아생전 가장 아끼셨던 거대한 유리 온실이 존재했다. 이곳은 꽃을 사랑했던 어머니를 위해 아버지가 세상천지의 모든 꽃을 모아 놓은 곳이었다.

특히 신경을 쓰신 건 온실 한가운데에 있는 크리스털 기둥과 거기에 장식된 마법 사파이어였다.

이 사파이어에는 보존 마법이 담겨 있기 때문에, 사시사철 탐스럽게 피어 있는 꽃을 볼 수 있었다.

‘왜 로판 속 어머니들은 죄다 꽃을 좋아하는 건지.’

난 꽃보다는 보석이 훨씬 좋던데 말이야. 특히 기둥에 박힌 저 사파이어 같은.

내가 어머니였다면 이깟 유리 온실이 아니라 별관 전체를 나만의 보석 창고로 만들었을 것이다.

‘……흠? 괜찮은 생각인데?’

이 온실은 어머니가 초대한 이들만 들어올 수 있었다. 그렇기에 나보다는 멜도르가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이곳에서 보냈다.

그걸 생각하면 속이 뒤틀렸다.

‘어머니와 멜도르가 함께 보낸 추억의 공간이라…….’

사실 이곳은 내게 상처를 안겨 준 장소이기도 했다.

아직도 그때가 생생하게 떠오른다.

딱 지금처럼 신록이 무성한 초여름.

그날은 어머니의 초대로 멜도르와 함께 온실에서 티타임을 보내고 있었다.

항상 그랬듯이 어머니가 잠시 자리를 비우자마자 멜도르는 내게 시비를 걸어 왔다.

-넌 손이 참 깨끗해서 좋겠다?

멜도르의 말처럼 험한 훈련을 받지 않은 내 손은 깨끗했고, 항상 구르는 놈의 손에는 자잘한 상처와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이 깨끗한 손이 내게는 어떤 의미였는지, 멜도르는 아마 평생 모르겠지.’

평소라면 녀석의 시비를 적당히 응수했겠지만, 그날따라 나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놈이 무슨 말을 하든 그냥 무시했는데, 그게 또 멜도르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네가 뭔데 내 말을 무시해?! 이래도 가만히 있나 보자!

화가 난 멜도르는 내게 공격 마법을 사용했다. 강한 건 아니었지만, 놈이 화풀이 수단으로 마법을 사용한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다행스럽게 나 역시 기본적인 마력은 사용할 줄 알았기에, 본능적으로 그 마법을 튕겨 냈다. 여파로 멜도르도 나도 약간의 부상을 입게 되었다.

놈은 귀 윗부분에 약간의 생채기가.

난 오른팔에 마력에 의한 타박상을.

‘멜도르 본인도 마법을 사용해 놓고는 크게 놀란 눈치였지.’

다행히 우리가 상처를 입은 것 외에는 온실에 큰 피해가 없었다.

어머니의 온실을 지켰다는 생각에 안도감을 느끼며, 난 멜도르를 흘겨봤다. 녀석도 잘못을 아는지 딱 굳어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때 우리를 향해 달려오는 사람이 있었다.

-멜도르!

사색이 된 어머니는 들고 있던 꽃들을 내던진 채, 멜도르의 두 뺨을 부여잡았다.

-세상에, 여기에 피가 나잖아! 멜도르! 더 다친 곳은 없는 거지?!

-그, 그게…….

멜도르는 잠시 머뭇거리며 날 바라보기만 했다.

난 한숨을 쉬며 어머니를 향해 입을 열었다.

-멜도르가 제게 마법을 사용했고, 그걸 막으려다 일이 조금 커졌어요.

-벨라디!

내 말에 어머니는 멜도르를 꼭 껴안고는 버럭 소리쳤다.

-넌 누나가 돼서 동생을 다치게 하면 되겠니?!

-먼저 공격한 건 멜도르였어요. 전 마법을 막다 보니,

-이제 막 마법을 배우는 애가 얼마나 위험한 마법을 사용했다고 그래!

이후 어머니가 내뱉은 말들은 그다지 떠올리고 싶지 않다. 주로 ‘어떤 상황에서든 동생을 챙겨야 한다.’ 같은 말들이었으니까.

나를 희생해서라도 말이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다르게 내게 애정을 주기는 했다. 하지만 그녀는 우선순위가 너무 확실한 사람이었다.

‘그 순위에서 난 언제나 멜도르를 이기지 못했어.’

그녀가 화를 내는 경우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멜도르가 조금이라도 아프거나 다칠 때.

그럴 때면, 어머니는 순위에서 ‘나’라는 존재를 완전히 지워 내고는 했다.

‘그 순간만큼 서러운 적이 없었지.’

그날 어머니는 멜도르의 다친 귀를 치료하며 나를 온실에서 내쫓았다.

닫히는 온실 문 너머로, 어머니에게 안긴 채 나를 빤히 바라보던 멜도르의 눈이 선명했다.

이 일 이후, 놈은 내게 마법을 사용하는 데 주저함이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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