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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장녀가 육아물에 빙의하면-9화 (10/197)

9.

그로부터 며칠 후, 나는 알렉산더의 마구간 앞에서 제플린을 다시 만났다.

제플린은 내가 던졌던 떡밥에 밤잠도 못 이뤘는지, 세상 피곤한 안색이었다.

“벨라디 님을 뵙습니다.”

“그래, 빈센드 경. 오랜만이야.”

난 그렇게 말하며 가뿐히 알렉산더 위에 올라탔다.

“그럼 한번 달려 볼까?”

달리자는 말은 예상 못 했는지, 제플린의 대답이 조금 늦었다.

“예.”

마구간지기가 제플린에게 말 한 마리를 내어줬다.

그가 말에 오르자 난 고삐를 단단히 쥐며 명령했다.

“문을 열어.”

“예, 벨라디 님!”

마구간지기가 울타리로 막아 놓은 문을 열었다. 그러자 마구간 옆으로 펼쳐진 넓은 평원을 향해 알렉산더가 질주하기 시작했다.

히이이이이잉-!

알렉산더는 기분이 좋은 듯 힘차게 울었다. 난 흥분한 말을 굳이 말리지 않고 능숙하게 평원 저 멀리로 달렸다.

이런 내 뒤를 제플린이 부지런히 따라왔다.

‘일단 마구간에서 멀어져야 해.’

마구간 옆에 있는 드넓은 평원은 우리 저택의 자랑거리 중 하나였다. 사람 많은 수도 내에서 승마를 마음 편히 할 수 있는 곳은 상당히 드물었으니까.

알렉산더가 힘차게 달리니 곧 평원의 한가운데로 진입했다. 저 너머로 저택의 지붕이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지자, 난 고삐를 이용해 말을 진정시켰다.

내 신호에 알렉산더의 속도가 줄어들었다.

푸르릉-.

곧 말이 완전히 멈추었다. 그리고 뒤를 바라보니, 따라오던 제플린도 말의 속력을 줄인 후 내 뒤에 섰다.

난 평원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어때, 이곳은 직계의 허락이 아니면 아무도 들어올 수 없지. 이렇게 공간도 넓으니, 검을 연습하기에는 제격이지 않나?”

그러자 제플린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는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온 눈가를 주무른 후, 입을 열었다.

“말씀의 의도를 잘…….”

“이번에도 모르겠다고?”

머뭇거림을 뚫으며 묻자, 제플린의 어깨가 주춤했다.

난 고개를 기울이며 그를 주시했다.

“고민할 시간을 많이 줬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부족한가?”

“……벨라디 님.”

“좋아. 고뇌를 줄이기 위해 경이 궁금해할 만한 이야기를 먼저 답해 주지. 우선 감시자들에 대해.”

내 말에 제플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난 그 반응을 살피며 싱긋 웃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할 거야. 사실 어려울 것도 없었어. 우리 가문만 한 권력자에게 첩보 조직은 필수일 테니까.”

제플린이 내 목소리에 집중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럼 감시자라는 조직명과 네가 수장인 건 어떻게 알아냈느냐…….”

그의 목울대가 크게 울렁였다.

“너희가 암호로 주고받는 쪽지, 그걸 내가 해독했다고 하면 궁금증이 풀리려나?”

그 말을 꺼내는 순간, 큰 충격을 받은 듯 제플린이 숨을 헉 하고 들이켰다.

“그……!”

반사적으로 대꾸하려던 그는 서둘러 입을 다물고 동요를 숨겼다.

습관처럼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려는 제플린을 보며, 난 피식 웃었다.

“암호가 적힌 쪽지는 어떻게 찾았냐고? 암호도 해독한 마당에 그걸 못 찾았을 리가.”

내 말에 제플린이 손으로 자신의 눈가를 주물렀다.

“하아…….”

그의 한숨과 함께 초여름의 더운 바람이 평원을 스치고 지나갔다.

쏴아아-.

풀들이 스치는 소리 사이로 제플린의 입꼬리가 씰룩 올라갔다.

“제가 졌습니다.”

제플린은 이때까지 보여 줬던 딱딱한 포커페이스를 조금 허물었다. 그러고는 처음으로 미소를 띠며 날 바라봤다.

“암호는 어떻게 해독하신 겁니까?”

“규칙을 찾아서 풀었지. 다른 방법도 있나?”

그러자 제플린이 큰 소리로 웃으며 감탄했다.

“하하하하하! 역시 내 안목은 틀리지 않았어. 정말 대단합니다, 벨라디 님!”

참고로 내가 정말 감시자들의 쪽지를 발견하고 암호를 해독한 것은 아니었다.

쪽지를 발견했더라도 최고의 전문가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낸 암호를 척척 풀어낼 수는 없었다.

‘모두 원작에서 읽은 것들이니까.’

하지만 기어코 이 정보를 기억해 낸 건 누구?

바로 나다.

그러니 감시자들의 쪽지와 암호 해독법을 알아낸 것도 결국 내 능력이나 마찬가지였다.

난 한창 감탄을 토하는 제플린에게 다시 물었다.

“그래서 내 제안에 대한 대답은?”

내 물음에 제플린이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는 살짝 상기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제가 벨라디 님을 가르친다니, 앨턴 공작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함께할 시간을 만들어 냈잖아.”

난 천천히 고개를 기울이며 제플린의 암청색 눈을 주시했다.

“경을 내 사람으로 만들려고.”

단순히 ‘스승’을 원하는 거면, 이렇게 제플린을 기다릴 필요 없었다. 그냥 비밀리에 뛰어난 기사를 포섭하면 그만이지.

그러나 난 제플린의 맹목적인 충성이 탐이 났다.

‘그리고 더 이상 탐이 나는 건 참지 않겠다고 다짐했지.’

어머니를 완전히 땅에 묻은 그날, 내 전생을 기억해 낸 순간에.

이런 날 바라보는 제플린의 눈은 어느새 열정으로 불타고 있었다.

내게 정체를 인정한 그는 지고 있던 짐을 좀 던 느낌이었다.

“굳이 절 고른 이유는 그럼…….”

그런 그에게 난 솔직한 내 흑심을 말해 주기로 했다.

“맞아. 난 경은 물론이고 ‘감시자’들도 손에 넣고 싶거든.”

“절 회유하셨다고 해도, 다른 이들까지 손에 넣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감시자의 주인은 앨턴 공작가의 가주밖에 없습니다.”

“빈센드 경.”

내 물음에 제플린이 입을 다물고 날 바라봤다.

난 아직도 사족을 붙이는 제플린에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 아니다 한 가지만 말하도록 해.”

“……예.”

“앨턴가의 직계를 가르치고 싶은가?”

내 말에 제플린이 부드럽게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자신을 한없이 낮추었다.

“예, 벨라디 님……! 제 꿈을 이룰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플린의 한마디 한마디에 숨길 수 없는 감격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스승으로서, 그리고 수하로서. 벨라디 님이 천하를 호령하는 그날까지 충성을 다해 보필하겠습니다!”

“당연한 소리를.”

난 여유롭게 웃으며 손을 뻗었다. 그러자 벌떡 일어난 제플린이 내 손등을 살포시 잡고 이마에 가져다 대었다.

복종의 표시였다.

“내가 가는 길이 지옥이라고 해도, 믿고 따라오도록 해.”

“명심하겠습니다, 벨라디 님.”

원작에서 그는 첫째가 믿을 수 있는 가장 유능하고 든든한 부하였다.

난 정말 뒤늦게야 그런 자를 손에 넣은 것이다.

‘이제 시작이야.’

더 이상 존재감 없고 소외받는 삶은 진절머리 나게 싫었다.

‘어떻게 해서든 이 집에서 내 영향력을 올리겠어.’

원작의 첫째처럼 그 누구도 나를 무시하지 못할 위치에 올라설 것이다.

난 제플린의 복종을 기꺼이 받으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

그날, 알렉산더를 가볍게 훈련하며 제플린과 추후 일정을 맞추었다.

내가 검술을 연마하길 원하자, 제플린은 즉석에서 훈련 스케줄을 세우기 시작했다.

“전 한눈에 벨라디 님의 잠재력을 파악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은 전에 없을 만큼 반짝이고 있었다.

훈련 장소는 이 평원으로 결정.

아버지는 바쁘고 멜도르는 승마를 싫어하니, 이곳만큼 비밀리에 검을 연습하기 좋은 공간이 없었다. 게다가 복장 역시 알렉산더를 훈련한다는 명목으로 편한 옷을 입을 수 있으니까.

목검이나 기타 연습 도구는 제플린이 준비하기로 하고 얼추 이야기를 나누자, 해가 지고 하늘이 어둑해질 시간이 다가왔다.

난 그에게 다시 연락하겠다고 말한 후 저택으로 돌아왔다. 현관에 들어서자, 집사가 나를 맞이했다.

“오셨습니까, 벨라디 님.”

“그래, 아버지는?”

“국무 회의로 황궁에 입궁하신 후, 아직 돌아오시지 않았습니다.”

“흐음, 멜도르는 뭐 하고?”

“소공작님은 방금 막 저녁 식사를 마치셨고 방에서 휴식을 취하고 계십니다.”

내가 알렉산더를 훈련하는 것으로 결정되자, 멜로르는 거세게 난리를 피우다 아버지에게 혼이 났다. 그 이후 내게 일절 말도 걸지 않는 상태였다.

‘그러면 오히려 나야 좋지.’

집사와 이야기를 나누며 복도를 걷는데, 눈에 거슬리는 것이 있었다. 바로 저택 내에서 일하고 있는 사용인들의 ‘표정’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우울하고 무기력한 얼굴이었다. 비단 사람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저택 자체에서 풍기는 분위기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가 살아 있을 적에는 나름 활기차고 밝았던 저택이 지금은 침울하기가 그지없었다.

‘이것도 원작에서 묘사된 그대로네.’

네시아가 오기 전까지 이 저택은 계속 이 상태인 걸까?

그럼 정말 최악이었다.

‘이런 집에 있으면 없던 우울증도 응애 하고 태어나겠어.’

난 아까 전 제플린이 한 말을 상기했다.

-벨라디 님, 저택 내에서 영향력을 높이시려면 가장 먼저 일하는 사용인들을 수중에 넣으셔야 합니다.

‘그 말이 맞아.’

“필요하신 게 있으십니까?”

곰곰이 생각에 잠긴 내 안색을 살피며 집사가 물었다.

난 내가 주로 생활하는 2층으로 올라가며 말했다.

“당장 하녀장과 함께 2층 응접실로 오도록 해.”

“알겠습니다.”

“올 때 신상 가구 카탈로그도 챙겨 와.”

“예? 카탈로그는 갑자기 왜 챙기시는지…….”

난 집사의 물음에 답을 하지 않고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내 시선에 집사, 로버가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벨라디 님.”

쟤는 항상 저렇게 내 말에 토를 달더라. 나는 불쾌함을 느꼈다.

‘원래 집사였던 찰스는 그러지 않았는데.’

난 고개를 저으며 내 방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응접실로 향하니, 하녀장과 집사가 단정히 선 채 날 기다리고 있었다. 하녀장 에밀리가 날 보자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벨라디 님.”

“그래. 카탈로그는?”

난 소파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여기, 최근 백화점에서 보낸 것을 가지고 왔습니다.”

에밀리가 두툼한 카탈로그 북을 내밀었다. 그 안에는 이번 시즌에 새롭게 나온 가구, 커튼, 카펫, 장신구 등의 사진이 빼곡히 담겨 있었다.

난 그걸 뒤적이며 말했다.

“지금 저택을 꾸미고 있는 가구들은 작년에 썼던 것들이지?”

내 물음에 에밀리가 몸을 크게 움찔하더니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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