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K-장녀가 육아물에 빙의하면-8화 (9/197)

8.

원작에 이런 에피소드가 있었다.

여자 주인공 네시아가 첫째 오빠의 성년식 선물을 사려는 이야기가.

그때 아이가 새 검을 사려고 하자, 멜도르가 툭 하고 정보를 내뱉었다.

-새 검을 사 주겠다고? 아서라, 그 검은 형이 16살 때 사냥 대회에서 2등을 차지하고 받은 보검이야. 무려 황제 폐하께 말이야.

가을 사냥 대회는 3년에 한 번씩 열리기 때문에 올해는 열리지 않는다. 그러니 원작의 멜도르가 말한 대회는 황제의 여름 사냥 대회였을 것이다.

난 그걸 기억해 내는 즉시, 올해에는 멜도르 대신 내가 참가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제플린에게 얼굴도장도 찍고, 겸사겸사 이 검도 차지하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 마당 쓸고 동전 줍고.

얼마나 효율적이야?

난 만족스럽게 웃으며 검을 케이스에 넣은 후, 시종들에게서 받아 들었다.

시종들은 성인 남성 두 명이서 겨우 드는 걸 내가 가뿐히 받아 들자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케이스를 고이 든 채 황제에게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이런 귀한 검을 상으로 주시다니, 폐하의 넓은 아량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내 행동에 황제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공작들에게로 향했다.

“사냥 대회는 이것으로 마치겠다. 오늘 저녁 만찬은 무척 즐겁겠군.”

그 말에 황실의 시종들이 부지런히 돌아갈 채비를 했다. 몇몇은 맡아 두었던 말들을 이쪽으로 데리고 왔다.

난 알렉산더의 고삐를 잡으며 일부러 조금 떨어져 있던 제플린을 불렀다.

“빈센드 경.”

내 부름에 뒤편에서 대기하고 있던 제플린이 날랜 걸음으로 다가왔다.

난 들고 있던 케이스를 그에게 넘겼다. 제플린은 예상 이상으로 묵직한 케이스의 무게에 조금 놀란 눈치였으나, 별 어려움 없이 받아 들었다.

“이건 경이 책임지고 들고 와.”

“예, 벨라디 님.”

타이밍 좋게 시온이 물었다.

“벨라디, 이 검 정말 받아도 괜찮겠어? 너…….”

시온의 시선에는 꽤 많은 것들이 함축되어 있었다.

난 그에 응답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서 하사하신 검을 못 받을 이유는 없지.”

그리고는 제플린을 보며 말했다.

“검 자체도 마음에 들고.”

내 말에 제플린의 어깨가 살짝 움찔거렸다.

난 씨익 웃으며 제플린을 보낸 후, 알렉산더 위에 올라탔다. 그러자 이미 말에 타고 있던 모스틴이 서둘러 다가왔다.

“벨라디! 정말 저 검 네 마음에 들어? 그럼 나 기대해도 되는 거지?”

“네가 호들갑 떤다면 말리지는 않을게.”

내가 부정하지 않자 모스틴은 신이 난 듯 싱글벙글 웃었다. 그러며 검지로 내 팔을 콕콕 찔렀다.

“일단 네가 검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좋은 신호 아니냐? 아~, 2등은 차지하지 못했지만 기분 좋다!”

“그러게. 벨라디 나도 기대할래!”

시온 역시 말에 올라타며 헤헤 웃었다.

두 사람의 반응에 조금 씁쓸하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둘이 날 설득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

알다시피 난 검에 대한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다.

이걸 나와 가장 친한 두 사람이 모를 리가 있나. 시온과 모스틴은 내가 검을 멀리하는 걸 그 누구보다 안타까워했다.

특히 검을 배우고 있는 모스틴은 내게 끈질기게 권유하고는 했다.

-벨라디, 넌 검만 잡으면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기사가 될 거야!

그럴 때마다 난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럼 더 안 되겠네. 누나가 돼서 동생에게 열등감 느끼게 하면 안 되니까.

-으아아! 누가 좀 설득해 줘, 저 헛똑똑이를!

자연스럽게 모스틴의 분통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러자 나란히 말을 몰던 모스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웃어?”

옆에 있던 시온은 굳이 물어보지 않고 배시시 웃었다.

“나도 웃을래. 오늘은 즐거웠으니까.”

“그건 그렇지. 그럼 나도 웃으련다. 하하하!”

난 맑은 얼굴로 웃고 있는 시온을 바라봤다.

그 당시, 모스틴과 같이 있던 시온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내 손을 붙잡았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벨라디, 동생을 위해 네가 그렇게까지 참을 필요 없어.

그때 저 말이 참 가슴을 쓰리게 만들었는데…….

가족에게 사랑받고 싶어서 행했던 내 노력들이 다 부질없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맞는 말이라 더 그랬지.’

그 후로도 둘은 어머니가 쓰러지기 직전까지 검을 배우자고 날 회유했다.

이랬던 두 사람이니, 내가 황제의 검을 받은 것이 꽤나 기쁠 것이다.

‘저 두 사람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라도, 빠른 시일 내에 제플린을 내 사람으로 만들어야겠어.’

오늘 뿌린 떡밥을 회수할 시기를 가늠하며, 난 씨익 미소 지었다.

***

사냥 대회가 끝나고 다음 날.

난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그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아버지, 절 부르셨다고 들었어요.”

아버지는 거대한 원목 책상에서 업무를 보고 계셨다.

난 늘 그랬던 것처럼 그 앞으로 다가가 아버지가 입을 여실 때까지 대기했다. 마치 상사의 명령을 기다리는 것처럼.

아버지와 딸이라고 하기에는 퍽 삭막한 광경이겠지만, 나도 그도 이 위치가 익숙했다.

곧 마지막 서류를 체크한 아버지가 고개를 들어 날 바라봤다.

“어제는 수고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폐하께 받은 보상은 어떻게 할 생각이지?”

“선조께서 바친 걸 다시 하사받은 것이니, 가보로서 소중히 보관할 생각이에요.”

소중히 보관은 하면서, 직접 사용할 예정이지만.

애초에 정령검은 세상에서 가장 튼튼한 검 중 하나였다. 이런 검을 가보로서 모셔만 둔다니, 그건 무기 낭비였다.

“그래, 잘 생각했다.”

이런 내 속을 모를 아버지는 여상한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검을 멜도르에게 넘기라는 말은 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난 혹시라도 그따위 망발을 들을 경우를 대비해 세워 두었던 계획을 철회했다.

‘아버지는 내게 무심할지언정, 동생에게 무조건 양보하라는 부류는 아니었지.’

어머니와는 다르게 말이야.

다만 아버지는 어머니를 너무 아끼고 사랑하는 나머지, 그녀의 말에 잘 휩쓸리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니 결국 날 괴롭게 했던 건 아버지도 마찬가지라는 뜻이었다.

‘그래도 지금은 그 어머니가 없으니까.’

그러니까…… 조금 더 수월하게 아버지를 이용할 수는 있겠지.

난 속내를 감추며 싱긋 미소 지었다.

내 웃음에 아버지는 잠시 날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개인적으로 네게 상을 주려는데, 원하는 것이 있나?”

‘저렇게 말할 줄 알았어.’

아버지는 내게 무심했지만, 성과를 내면 저렇게 원하는 것을 물어보고는 했다. 그동안 성과를 낼 기회를 전부 멜도르에게 몰아서 주었을 뿐이지.

이것까지 전부 계산 안에 있었던 터라, 난 머뭇거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상은 괜찮아요, 아버지. 정령검만으로도 충분한걸요. 다만…… 알렉산더를 제가 길들이고 싶어요.”

내 말에 그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드레스나 보석이 아니라…… 알렉산더를? 그건 네 동생의 것이다.”

“알렉산더를 달라는 것이 아니에요. 다만 어머니가 멜도르를 위해 직접 고른 말인데, 저렇게 마구간에만 메여 있는 게 너무 안타까워서요. 아버지도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나요?”

미리 준비했던 것인 만큼, 내 입에서는 문장들이 술술 잘도 나왔다.

“멜도르에게 알렉산더는 아직 벅차니 좀 더 길들여야 할 텐데, 그걸 타인에게 맡기는 건 모양새가 나지 않고……. 하지만 전 멜도르의 누나잖아요.”

아버지는 가만히 내 말을 듣고 있었다.

아버지 성격상, 거슬렸다면 가차 없이 끊었을 텐데 그러지 않는 걸 보면 나름 내 말을 흥미 있게 듣고 있는 모양이었다.

“제가 맡으면 체면도 살고, 멜도르도 더 쉽게 알렉산더를 탈 수 있을 거예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버지가 입을 여셨다.

“혼자서 알렉산더를 길들일 수 있겠나.”

‘좋아.’

예상했던 질문에 난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살짝 고개를 저었다.

“저 혼자 완벽하게 훈련시키기는 힘들 것 같고…….”

힘들기는 무슨. 알렉산더를 길들이는 건 나 혼자서도 거뜬했다.

하지만 이 기회를 날려 버려서는 안 되지.

“숙련된 기사의 보조가 조금 필요할 것 같아요.”

“흐음……. 염두에 둔 기사는?”

수월하게 흘러가는 대화에 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제플린 빈센드 경이 좋겠어요.”

그 말에 책상을 툭툭 치고 있던 아버지의 손이 딱 멈추었다.

“제플린…… 빈센드?”

“예, 아버지.”

“……굳이 그자를 고른 이유는 뭐지?”

“아시다시피, 전 가문의 기사들과 안면이 없어요. 그나마 빈센드 경이 사냥 대회 때 저를 성실히 보좌해 주어서, 그자는 믿을 만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널 보좌했던 기사는 빈센드 경 말고도 두 명이 더 있었을 텐데.”

“어제 보아하니, 그들은 알렉산더를 꽤나 버거워해서요.”

아버지는 여기까지 듣고 깊은 생각에 잠긴 듯싶었다. 멈췄던 그의 손가락이 다시 툭툭 책상을 쳤다.

평소보다 길어지는 침묵에 난 가만히 아버지의 판단을 기다렸다.

‘내가 하필 빈센드 경을 골랐으니 당황스럽겠지.’

하지만 그렇게 나쁜 제안은 아닐 것이다.

원작을 살펴보면 제플린은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해를 기점으로, 저택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장례 후, 뒤숭숭해진 저택의 경계를 바로잡기 위해 아버지가 감시자들의 수장인 제플린을 불러들였으니까.

그렇게 제플린은 저택에 머무르게 되었고, 이 시기에 더더욱 후계자인 첫째에게 매력을 느낀 것이다.

‘이런 상황이니, 나를 도와 말을 길들이는 임무 정도는 줘도 괜찮다고 판단할 거야.’

말을 길들이는 건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임무도 아니었다. 그동안은 멜도르가 혼자 할 수 있다고 오기를 부려서, 알렉산더를 가만히 놔둔 것뿐이지.

곧 아버지의 무거운 입이 천천히 움직였다.

“좋다.”

내 계산이 맞다고 증명하듯, 아버지에게서 허락이 떨어졌다.

“빈센드 경을 네게 붙여 줄 테니, 알렉산더를 잘 길들여 보도록.”

계획대로 움직이는 상황에 묘한 쾌감이 느껴졌다.

“걱정 마세요, 아버지. 알렉산더를 아주 충성스럽고 순한 말로 바꾸어 놓을 테니.”

더불어 제플린까지 말이에요.

물론, 길들인 둘을 멜도르에게 넘길 생각 따위 추호도 없지만 말이다.

아버지에게 단 한 치의 진심도 말하지 않은 채, 난 가지런히 입꼬리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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