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사실 알렉산더는 원작에서 첫째의 애마였다.
「공작 부인이 몸소 점찍어 두었던 좋은 품종의 말을 사랑하는 첫째 아들의 생일날 선물했다.」
…라는 대목이 있었으니까.
그걸 생각하자 절로 기분이 더러워졌다.
‘정작 멜도르는 단 한 번도 혼자 힘으로 알렉산더를 타 본 적이 없는데.’
언제나 아버지의 도움으로 겨우 위에 올라탔을 뿐.
애초에 은근 몸치인 멜도르와 성깔 있는 알렉산더는 합이 좋지 않았다.
때문에 원래 첫째를 태우며 마음껏 벌판을 달렸어야 할 알렉산더는 몇 년째 마구간에 갇혀 있는 신세였다.
그 꼴이 안쓰러워서 이번만 내가 데리고 나온 것이고.
‘멜도르가 별 발악을 다 쳤지만…… 아버지가 허락했는데 뭐 어쩌겠어.’
아마 아버지도 저 말을 그냥 가둬 두기에는 아까웠던 모양이지.
난 구석에서 건초를 씹으며 시종들의 빗질을 받는 말을 바라봤다.
‘아까 보니 충분히 내가 길들일 수 있을 것 같던데, 저것도 되찾을까.’
제플린을 포섭하는 김에 말도 데리고 오면 되잖아?
난 그렇게 생각하며 천막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가운데에 있는 황제에게 고개를 숙였다.
“폐하. 앨턴가의 딸, 벨라디 앨턴. 폐하의 은혜로 무사히 사냥을 끝내고 돌아왔습니다.”
“그래, 짐도 아까 보았다. 네 사격 실력이 무척 뛰어났지.”
“감사합니다.”
내 대답을 들은 황제는 인자하게 웃은 후 공작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애초에 그는 가주가 아니면 상대를 잘 안 했다.
‘오히려 저 정도면 상당히 길게 답해 준 거지.’
사냥을 시작할 때 내 사격이 황제의 눈에 인상 깊게 남은 모양이었다.
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시온과 모스틴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시온이 입을 열었다.
“벨라디. 너 혼자야? 기사들은?”
“사냥감들을 정리하느라 아직 숲 안에 있어.”
“아직도 숲 안에 있다고?”
그러자 옆에 있던 모스틴이 씨익 웃었다.
“오~, 사냥감 좀 잡은 모양인데~.”
“아마 너보다 많이 잡았을걸?”
“섭섭한 소리 하지 마. 이 몸은 무려 작년 사냥 대회에서 2등을 한 실력자라고!”
“1등은 누군데?”
“……너네 아버지.”
마침 타이밍 좋게 숲 저편에서 아버지와 기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버지는 능숙하게 시종들에게 말을 맡긴 후,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가 황제에게 고개를 숙였다.
“다녀왔습니다, 폐하.”
“허허. 그래, 앨턴 공작. 이번 대회에서도 우승할 자신 있는가?”
“언제나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아버지의 뒤쪽으로 기사들이 상자를 들고 서 있었다. 그들이 들고 있는 상자는 두 개였다.
그걸 보며 흡족하게 웃은 황제가 조금 더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마지막 참가자까지 왔으니, 이제 결과를 확인하겠다! 모두 잡은 사냥감을 바닥에 깔아라!”
그 말에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이 받아 두었던 상자를 열어 각자의 이름이 표시된 자리에 놓았다. 아버지의 기사들도 시종에게 상자를 건넨 후, 뒤로 물러났다.
시종들이 신속하게 사냥감을 꺼내는 동안 구경하던 이들이 한마디씩 내뱉었다.
“모스틴, 이 괘씸한 녀석. 이번에도 이 아비보다 많이 잡은 거냐?”
“아버지도 참, 저 사냥 잘하는 거 아시면서.”
“시온, 너도 많이 노력했구나.”
“감사해요, 아버지.”
화목한 두 부자는 약속이라도 한 듯 한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버지의 자리였다.
어느새 마무리된 다른 이들과 비교되게, 아버지의 자리에는 끝없이 짐승들이 정리되고 있었다. 그러다 다들 감탄을 토했다.
“붉은 여우…….”
“역시 앨턴 공작이 잡은 모양입니다.”
황제는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도 1등은 앨턴 공작의 몫인가 보군.”
“과찬이십니다.”
그때 옆에 있던 시온이 속삭였다.
“벨라디, 네 기사들은 왜 이렇게 안 와?”
그러자 모스틴도 거들었다.
“그러게. 이러다 수상까지 끝나겠어.”
“곧 올 거야.”
난 그렇게 말하며 숲 한쪽을 바라봤다. 시온과 모스틴에게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지만,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잠시 후, 제플린이 기사 두 명을 데리고 숲에서 튀어나왔다. 그는 신속하게 말에서 내린 후, 시종들에게 상자를 내밀었다.
그리고 기사 둘과 함께 내 앞에 무릎 꿇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벨라디 님!”
“됐어. 폐하 앞에서 호들갑 떨지 말고 돌아가 봐.”
난 여상하게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제플린과 나머지 기사들은 재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이렇게 늦을 줄 알았어.’
애초에 멜도르의 사냥을 돕던 기사들이었다.
놈의 형편없는 실력을 생각하며 상자 하나만 준비했다가, 공간이 부족하니 낭패를 봤겠지.
아마 잡은 사냥감을 다 담느라 꽤 고생했을 것이다.
‘오히려…….’
시종들이 서둘러 내 상자에서 짐승들을 꺼냈다.
난 그걸 보다가 시선을 들어 황제를, 정확히는 그 옆에 있던 아버지를 바라봤다.
아버지의 붉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자, 난 입꼬리를 반듯하게 올리며 웃었다.
‘오히려 마지막이라 자연스럽게 주목을 받았으니, 나쁘지 않아.’
내 미소에 아버지가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그때 옆에서 모스틴이 주먹으로 툭 내 팔을 쳤다.
“야, 벨라디……. 너 뭐야? 사냥은 오늘이 처음이라며.”
그는 내가 잡은 사냥감들을 보며 입을 헤- 벌리고 있었다.
난 친절하게 벌어진 턱을 올려 주며 말했다.
“원래 이 정도는 해 줘야 천재 소리를 듣는 거야.”
내 농담 같은 진담에 모스틴이 잠시 멈칫했다. 그러더니 곤란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것도 정도가 있지. 이렇게 사냥까지 잘해 버릴 줄은 몰랐는데.”
모스틴이 충분히 당황할 만했다. 뒤늦게 나열되는 내 사냥감은 시온과 아글라 공작, 그리고 모스틴과 프레도 공작을 넘어서 계속 이어지고 있었으니까.
마치 아버지처럼.
곧 예정되었던 환호성까지 터졌다.
“우와, 벨라디!”
시온이 박수를 짝짝 치며 좋아했다.
“너도 붉은 여우를 잡았구나?”
“와 씨! 내가 그렇게 찾으려고 해도 못 찾았던 거! 네가 잡은 거였어?!”
그 옆에 있던 공작 둘도 의외라는 듯 날 바라봤다.
“벨라디, 사냥 솜씨가 보통이 아니구나.”
“왜 그동안 딸을 데리고 오지 않았나, 테오도르.”
“……글쎄.”
아버지와 내 사냥감이 바닥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새 넷, 토끼 여섯, 사슴 셋.
새 여섯, 토끼 다섯, 사슴 하나. 그리고 각자 붉은 여우가 하나씩.
다른 부자들에 비해 우리 부녀의 성적이 월등히 높았다.
황제는 이걸 보며 큰 소리로 웃었다.
“하하하하하! 그 아비에 그 딸이로구나! 얼굴만 아니라 재능도 그대로 물려받았어!”
“아버지에 비하면 아직 부족합니다, 폐하.”
“겸손해 말거라. 짐이 풀어놓은 붉은 여우도 다 잡혔으니 아주 뿌듯한 대회로군.”
“그러게 말입니다, 폐하.”
“오늘처럼 앨턴가의 부녀랑 같이 사냥을 나가면 큰일 나겠습니다. 허허허.”
공작들의 너스레에 황제는 더더욱 호탕하게 웃으며 아버지와 내 사냥감을 유심히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짐승의 크기와 개수를 봐선 공작의 승리지만, 붉은 여우 가죽의 상태는 딸이 앞섰구나.”
아버지가 잡은 짐승들은 대부분 이마 정중앙에 총 자국이 있었다.
하지만 내 짐승들은 하나같이 전부 한쪽 눈이 없었다.
‘개수로는 아버지를 이길 수 없을 테니까.’
그러니 황제의 말처럼 가죽의 손상도를 최소화해 점수를 딸 생각이었다. 겸사겸사 내 사격 실력도 확실히 어필하고 말이다.
아버지가 흘깃 날 바라봤지만, 난 그 시선을 적당히 흘려 넘겼다.
‘우승은 아버지가 하시겠지.’
내 예상이 끝나기가 무섭게 황제가 입을 열었다.
“짐이 판단한 결과, 승점은 앨턴 공작이 더 높다. 그러니 이번 대회의 우승은 테오도르 앨턴이다!”
황제는 그렇게 말하며 아버지의 어깨를 툭툭 쳤다.
“수고했네, 공작. 보상으로 짐의 보물 창고를 열 테니, 원하는 것을 가지고 가면 된다.”
“감사합니다, 폐하.”
모두 짝짝짝 박수를 쳤다.
나 역시 박수를 치며 환하게 웃었다.
‘이제 곧…….’
내 계획대로 황제는 나에게도 다가왔다.
“사냥 대회에 나오는 건 처음이라고 했는데 2등을 차지하다니. 앞으로가 기대되는구나.”
“영광입니다, 폐하.”
“2등을 차지한 이를 위해 짐이 작은 보상을 준비했지. 가지고 오거라.”
황제의 말에 대기하고 있던 시종 두 명이 긴 케이스를 들고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케이스의 뚜껑을 열었다.
“와-.”
“저건…….”
모스틴과 시온이 작게 감탄했다. 공작들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안에 든 것을 바라봤다. 이번만큼은 아버지 역시 조금 놀란 눈치였다.
“2등에게 내리는 상은 마갈라 제국의 정령검이다.”
황제의 목소리가 위엄 있게 울렸다.
“지금 한번 뽑아 보아도 좋다.”
그런 말을 들으면 사양할 내가 아니었다.
난 두 손으로 케이스에서 검을 꺼냈다. 상당한 무게감이 손아귀에서 느껴졌다.
스릉-.
검집을 살짝 열어 보니 칼날이 매우 짙은 검은색이었다.
햇빛을 받고 있어도 빛나지 않아 무딘 것처럼 보였지만, 이 검이 얼마나 예리한지 난 알고 있었다.
손잡이 가운데에 떡하니 박혀 있는 검은색 돌도 쓰다듬었다. ‘정령검’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이 돌은 마갈라 제국에서만 희귀하게 발견된다는 정령석이었다.
내가 검을 쓰다듬자, 황제가 입을 열었다.
“검을 쓰지 않는 아가씨에게 어울리지 않는 상일지도 모르겠구나.”
“아닙니다, 폐하. 제가 받았던 그 어떤 것보다 마음에 듭니다.”
“허허, 그래? 약 200년 전, 7대 앨턴 공작이 황가에 바쳤던 보물을 다시 앨턴 공작가의 후손이 가져가는군. 참으로 보기 좋다.”
“너무나 큰 영광입니다.”
내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황제가 후후 웃었다. 나 역시 마주 웃으며 검을 꽉 쥐었다.
‘이 검까지 다른 사람한테 빼앗길 수는 없지.’
황제의 말처럼 내 조상인 7대 앨턴 공작은 북쪽에 있는 마갈라 제국과의 전쟁 도중, 그들이 숨겨 놓았던 이 정령검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걸 그대로 황제에게 바쳤다.
‘사실 이런 히스토리까지는 내 알 바 아니고.’
내가 이 검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길 수 없는 이유.
그건 바로, 알렉산더와 마찬가지로 이 검 역시 첫째의 것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