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K-장녀가 육아물에 빙의하면-6화 (7/197)

6.

‘아아, 저분이 후계자였다면…….’

그랬다면 자신이 이렇게 머리 아프게 고민할 일도 없었을 텐데.

테오도르의 소년 시절 얼굴을 오려 붙인 듯한 이목구비는 제플린에게 없던 향수도 불러일으켰다.

‘만약 검을 쓰신다면, 그 방법도 공작님과 비슷하려나?’

제플린은 자연스럽게 벨라디가 검을 잡은 모습을 떠올렸다.

‘공작님은 첫 공격으로 무조건 오른쪽 찌르기를 하신다. 물론 압도적인 실력 차이 앞에서 습관은 무의미하지만……. 벨라디 님도 그러신다면 혹시 모르니 그 점을 보완하고.’

이래저래 상상을 시작하니 끝이 없었다. 어느새 제플린은 가상의 벨라디에게 열정적으로 검술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러다 머릿속에서 그녀의 붉은 눈과 시선이 교차됐을 때.

‘음……?’

어쩐지 그 시선이 너무 강렬하게 느껴진다고 생각한 순간, 제플린의 귓가에 총소리가 생생히 울려 퍼졌다.

탕-!

그제야 그는 현실로 돌아왔다.

“어때, 빈센드 경.”

상상이 아니라, 벨라디는 실제로 제플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입가에 걸린 당당한 미소에 제플린은 살짝 자신의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제플린 빈센드, 정신 차려라. 이런 쓸데없는 상상 하지 말고……!’

“……예?”

대답이 한 템포 늦었다. 다행히 벨라디는 거기에 신경 쓰지 않는 듯, 턱짓으로 왼쪽을 가리켰다.

그 동작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나무 아래에 붉은 털이 번지르르한 여우가 축 늘어져 있었다.

저 ‘붉은 여우’는 황제가 이번 사냥 대회를 위해 특별히 단 두 마리만 풀어놓은 것이었다. 벨라디는 그중 하나를 본인이 잡았다는 뜻으로 자신을 부른 것이리라.

그녀의 의도를 어림짐작한 제플린은 딱딱한 동작으로 박수를 쳤다.

“훌륭하십니다, 벨라디 님.”

이번에는 생색 좀 내고 싶은 건가?

그 생각으로 의례적인 칭찬을 한 것이었는데, 벨라디의 한쪽 눈썹이 까딱였다.

저건 무언가 거슬릴 때, 테오도르가 자주 보여 주는 습관이었다. 그 모습에 제플린은 또 한 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저런 것까지 닮았다니, 과연!’

거기까지 생각하던 제플린이 잠시 멈칫했다.

‘그렇다면…… 내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건가?’

제플린은 잠시 박수를 중단하고 방금 전의 상황을 되새겼다.

벨라디에게 검을 가르치는 상상을 하다가 눈이 마주쳤고, 총소리가 들린 후 정신을 차리니 여우가 잡혀 있었다.

순간 제플린의 뇌리에 가설이 하나 스쳐 갔다.

‘설마…….’

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보지 않으시고 붉은 여우를 잡으신 겁니까?”

붉은 여우는 평범한 여우와 달랐다.

마물의 피가 흐르고 있어 평범한 짐승들보다 속도가 월등히 빨랐고, 거기에 경계심이 무척 많아 사냥이 힘들었다.

황제가 괜히 숲에 이 여우를 풀어놓은 것이 아니다.

‘대회에 참가한 귀족들이 다른 짐승을 몰살하지 않도록, 난이도를 조절하려는 의도였을 터.’

붉은 여우는 당연히 다른 짐승들보다 점수가 높았다. 따라서 우승의 영광을 얻고 싶다면, 이 여우를 최우선으로 잡아야 했다.

특히 다른 여우보다 피부와 털이 예민했기 때문에 가죽을 덜 상하게 잡을수록 점수가 수직 상승하는데…….

제플린은 이 사실을 상기하며 죽은 여우를 바라봤다. 축 늘어진 여우의 털은 단 하나도 손상되지 않았다. 벨라디가 정확히 눈을 맞혔기 때문이다.

‘분명 나와 눈이 마주친 후에 총소리가 들렸다. 벨라디 님은 여우를 보고 있지 않았어.’

그런데도 저렇게 깔끔히 잡았다고? 저게 사람의 솜씨가 맞는 건가?

제플린은 살짝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기 위해 말고삐를 꽉 쥐었다.

그때 벨라디의 입이 다시 열렸다.

“그래서 어때, 빈센드 경.”

“무엇을 말입니까?”

“내 사냥 실력. 경은 계속 내 뒤를 따라왔잖아.”

그 말에 제플린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완벽합니다.”

제플린은 벨라디에 대한 평가를 완전히 수정했다.

‘주인인 테오도르 앨턴 공작의 첫째 딸.’

이 정도에서 각종 미사여구가 추가된 것이다.

테오도르의 우월한 유전자를 고스란히 물려받았다든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반사 신경을 지니고 있다든지.

‘무엇보다…… 저분은 내가 꿈꿔 왔던 그 천재일지도 모른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녀는 제국의 하나뿐인 공녀다. 자신이 상대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먼 인물이었다.

게다가 주인의 아들을 가르치기 싫어서 도망갈 궁리만 하고 있는데…….

‘갑자기 딸을 가르치고 싶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들뜨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제플린은 무뚝뚝한 목소리로, 그래도 진심을 담아 말했다.

“정말 공작님만큼 뛰어난 솜씨를 가지고 계십니다.”

“평범한 기사가 아니라…… 감시자들의 수장으로서도 인정할 정도인가?”

그 말을 듣는 순간, 제플린은 티 나지 않게 훅 숨을 들이켰다.

‘방금 내가 뭘 들은 거지?’

벨라디의 입에서 절대 나올 리 없다고 생각한 단어가 튀어나왔다.

애써 가라앉혔던 감정이 펄떡 뛰었다. 제플린은 동요하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 표정을 더욱 굳히고 벨라디를 바라봤다.

그런 제플린의 속마음을 꿰뚫은 듯, 그녀의 붉은색 눈동자가 아치 모양으로 휘었다.

제플린은 자신을 바라보는 벨라디의 눈이 사냥을 할 때와 비슷하다고 느꼈다. 마른 목에 침조차 넘어가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침착하게 시치미를 뗐다.

벨라디가 ‘감시자’는 물론이고, 자신이 수장인 건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맥없이 인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제플린의 말에 벨라디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흐음……. 그래?”

벨라디는 제플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자신을 주시하는 눈초리에 제플린의 손끝이 저릿거렸다.

이제껏 벨라디가 테오도르를 빼닮았다고 생각했지만, 이 순간만큼은 둘의 차이가 뚜렷이 느껴졌다.

‘공작님의 위압감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테오도르는 상대방을 압박할 때 절대 웃지 않았다.

그가 작정하고 분위기를 잡으면 주변이 얼어붙을 정도로 차갑고 냉혹한 한기가 느껴졌다.

그러나 지금 벨라디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이건 사람의 목을 점점 조이는 부류야.’

빨리 도망가지 않으면, 그녀의 기류에 깔려 뭉개질 것 같다는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제플린의 이마를 타고 땀 한 줄기가 주룩 흘렀다.

사람들은 앨턴 공작가의 직계를 보고 이렇게 말하고는 했다.

‘눈빛만으로 숨통을 옥죄는 괴물들.’

그건 결코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들 아니면 누가 저렇게 아무 말 없이 사람의 긴장을 최고조로 만들겠는가.

그리고 제플린은 그런 괴물들을 사랑했다.

‘……안 돼, 견뎌야 한다!’

하마터면 벨라디의 카리스마에 넘어가 사실을 실토할 뻔했다. 제플린은 서둘러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필사적으로 벨라디의 시선을 견딘 지 얼마나 지났을까.

곧 저 멀리서 뿔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사냥 시간이 다 끝났다는 알림이었다.

그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벨라디는 버거웠던 위압감을 치웠다.

“내 여우를 넣어야 할 상자는 도대체 언제 오는 거지?”

“……아.”

제플린은 애써 목소리를 쥐어짜며 말했다.

“제가 찾아오겠습니다.”

“그래, 난 먼저 돌아가 있지.”

‘살았다.’

제플린이 깊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앨턴 직계들의 카리스마를 사랑하지만, 그래도 전면에서 버티는 것은 언제나 힘겨웠다.

제플린이 식은땀을 닦으며 말머리를 돌리려는데, 저음의 목소리가 그의 움직임을 붙잡았다.

“빈센드 경.”

“예.”

이번에는 늦지 않게 대답이 나왔다. 그걸 들은 벨라디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앨턴가의 직계를 가르쳐 볼 생각 없나?”

벨라디의 입에서 또다시 심장을 쿵 내려앉힐 소리가 나오고야 말았다.

제플린은 자신이 말에 타고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다리가 풀린 걸 벨라디에게 들켰을 테니까.

“무슨 말씀 하시는지, 우매한 전 모르겠습니다. 그럼 천막에서 뵙겠습니다.”

벨라디가 더한 폭탄을 던지기 전에 제플린은 꾸벅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났다.

서둘러 말을 몰며 그는 숨을 몰아쉬었다.

‘말도 안 된다. 내가 어떻게……!’

테오도르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가주도 후계자도 아니면서 감시자의 존재를 아는 이 곁에 있어 좋을 것도 없었다. 애초에 자신이 그녀에게 뭘 가르친단 말인가.

그렇지만 벨라디의 제안은 눌어붙은 듯 제플린의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앨턴가의 직계를 가르쳐 볼 생각 없나?

제플린은 이날 이후, 한동안 본능과 이성 사이에서 깊게 고뇌해야만 했다.

***

“생각보다 잘 견디네.”

난 도망가는 제플린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미련 없이 알렉산더를 몰았다.

‘역시 감시자들의 수장이라 이건가.’

어지간한 인물은 내 시선 하나에 숨도 잘 못 쉴 텐데, 제플린은 포커페이스를 나름 유지했다. 긴장한 티는 났지만 말이다.

‘일단 떡밥은 던져 놨고.’

이제 적절한 때에 회수만 하면 되겠군.

그렇게 생각하며 황제의 천막으로 향하니, 아버지를 제외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내가 말에서 내리자,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이 다가왔다. 그들은 말이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건초가 마련된 장소로 옮기려 했다.

낯선 이가 가까이 오자 알렉산더가 성질을 부렸다.

히이이이잉-!

그러자 시종들이 쩔쩔매며 슬쩍 내 눈치를 봤다.

“알렉.”

푸흥-!

좋게 말하니 알렉산더는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놈이 갈기를 휘갈기며 앞발로 거세게 땅을 긁었다.

곧 달릴 것 같은 행동에 난 알렉산더의 고삐를 확 쥐고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얌전히 있어.”

내 목소리에 놈이 멈칫거렸다.

잠시 날 바라보던 알렉산더는 이내 푸르릉 소리를 내며 흥분을 멈췄다. 그러고는 순순히 시종들의 손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누구 말 아니랄까 봐. 하는 짓이 주인이랑 똑같군.’

난 말의 주인인 멜도르를 잠시 떠올렸다.

알렉산더는 어머니가 멜도르의 10번째 생일 선물로 사 주신 말이었다.

그때 놈은 온 저택을 싸돌아다니며, 어머니의 선물을 자랑했었다.

‘……생일 선물로 말을 받고 싶다고 말한 건 나였는데 말이야.’

참고로 그 해 내 생일 선물은 화려한 보석이 달린 연회용 드레스였다.

원하는 선물은 아니었지만, 어머니가 주셨다는 생각에 겉으로나마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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