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K-장녀가 육아물에 빙의하면-5화 (6/197)

5.

살짝 뒤를 돌아보니, 시종들이 준비한 거대한 천막 아래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황제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꽤 흡족한 얼굴로 박수를 치고 있었다.

난 거기에 응답하듯 공손히 고개를 숙인 후, 옆에 있던 기사를 바라봤다.

“뭐 하나.”

“아…… 옙!”

기사는 허둥지둥 말에서 내려 떨어진 새를 수습했다.

시온은 삐뚤어진 안경을 다시 올리며 멍한 얼굴로 말했다.

“지금 하늘을 날고 있던 새를 맞힌 거야?”

난 별말 하지 않고 여유롭게 웃었다.

“그럼 잠시 후에 보자, 시온.”

그러고 말을 몰아 아무도 가지 않았던 방향으로 향했다.

숲에 들어가자 초여름의 햇빛과 초록색으로 우거진 나무들, 그 사이사이로 새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평화를 깨듯 총소리가 작게 울리기 시작했다.

나 역시 조금 더 깊숙이 들어가며 총을 고쳐 잡았다.

‘다들 열심히 하나 보네.’

보통 황실이 주최하는 가을 사냥 대회는 가장 거대한 짐승을 잡은 자가 승리한다.

하지만 지금같이 황제가 개인적으로 주관하는 여름 사냥 대회는 가장 많은 짐승을 잡는 자가 승리했다.

‘일단 열리는 장소부터 가을 대회랑 비교되지 않으니까.’

이곳은 황궁에 위치한 황족의 숲. 그런 숲에 위험한 짐승을 풀어놓을 리 없었다.

‘토끼나 사슴 같은 고만고만한 동물만 있을 뿐이지.’

그러니 질보다는 양으로 승부를 봐야 하는데…….

난 자세를 잡고 한 수풀을 향해 겨냥했다. 내 행동에 뒤따라오던 기사 중 한 명이 휘파람을 불었다.

휘파람 소리에 수풀이 부스럭거렸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난 거침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탕-!

그러자 움직이던 수풀이 고요해졌다.

아까 새를 주웠던 기사가 다시 말에서 내려 수풀을 살폈다. 그리고 살짝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에도 명중입니다.”

그가 황실에서 지급한 사냥용 상자를 꺼내는 사이, 난 흘깃 뒤를 바라봤다.

나를 따라온 기사는 말에서 내린 이까지 포함해 총 세 명.

‘이제 한 명만 남겨 볼까.’

난 그들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냥감 챙기는 걸 기다리다 시간이 다 가겠군. 경.”

내 부름에 휘파람을 불었던 기사가 고개를 숙였다.

“예, 벨라디 님.”

“앞으로 경도 말에서 내려 같이 짐승을 챙겨라. 내 뒤는 한 명만 따라온다.”

“예!”

그 말에 기사가 절도 있게 말에서 내려 수풀 쪽으로 다가갔다. 용케 들었는지 짐승을 수습하던 기사도 고개를 숙였다.

난 하나 남은 기사와 눈을 마주했다.

“자, 그럼 가 볼까.”

드디어 또렷하게 얼굴을 마주한 첫째의 측근.

“빈센드 경.”

“예.”

제플린의 암청색 눈동자가 고요하게 빛났다.

***

원래 권력자의 뒤처리를 담당하는 이들은 오래 살기 그른 운명이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감시자’들을 통솔하게 된 제플린도 무병장수의 꿈은 버린 지 오래였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꿈이 하나 있었으니.

‘한 번쯤은 내 손으로 천재를 키우고 싶다……!’

예를 들면, 테오도르 앨턴 공작 같은.

그는 제플린이 알고 있는 생명체 중 가장 완벽한 존재였다.

그도 그럴 것이 테오도르는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는 제국의 검이었고, 풍기는 카리스마 또한 따라올 자가 없었다.

그가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느껴지던 그 전율이란!

테오도르는 가장 견고한 원석으로 다듬어진 최강의 보석이 틀림없었다.

자존심 강한 제플린의 아버지가 순순히 앨턴 공작가의 뒤처리를 책임지기로 한 건, 단순히 가문의 업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지만.’

아버지의 자존심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제플린 역시, 테오도르의 카리스마에 반해 그를 섬기기로 했다.

그런 제플린에게 최근 큰 고민이 하나 생겼는데…….

‘멜도르 앨턴…….’

앞으로 테오도르의 뒤를 이어 앨턴 공작가를 이끌 후계자 때문이었다.

비극적이게도 제플린은 테오도르보다 젊었다. 그러니 그는 아마 테오도르보다 멜도르를 섬기는 시간이 더 길 것이다.

그 사실이 제플린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직 어려서 성장 가능성이 남았다고는 하지만, 공작님과 타고난 기량이 다르다.’

앨턴 공작가의 직계답게 멜도르 역시 또래보다 신체 조건이 좋았다. 하지만 제플린의 기준을 만족시키려면 그 정도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기량을 노력으로 메꿀 수 있다고 쳐도…… 그 도련님은 애초에 검술을 싫어하는 눈치였지.’

그런 상태인데 언제 노력으로 다 메꿀까. 이러니 자신이 직접 키우고 싶지도 않았다.

제플린이 키우고 싶은 건, 테오도르의 뺨을 칠 정도의 원석이었다.

누구나 경악할 만한 실력을 가진, 그야말로 세기의 천재!

철이 들 때부터 테오도르를 지켜봤던 제플린의 안목은 이미 하늘을 모르고 높아져 있었다.

앞으로 멜도르가 나이를 먹고 성년식까지 지나면, 제플린이 직접 감시자에 대해 가르쳐야겠지.

그의 자존심과 안목은 이 가혹한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럴 땐 아버지가 너무나 부럽다.’

아버지는 테오도르 같은 천재에게 감시자에 대한 것들을 가르쳤는데.

그런데 자신은……. 자신은…….

제플린이 이렇게 침울해할 때면, 하나뿐인 여동생은 속이 터지는 듯 가슴을 퍽퍽 치고는 했다.

-오빠는 진짜…… 왜 그렇게 까다로워? 그럴 거면 그냥 감시자 그만둬! 콱 내가 관리해 버릴 거니까!

마찬가지로 감시자이자, 앨턴 공작가의 상급 하녀로 위장 중인 여동생은 인재를 갈망하는 제플린을 이해하지 못했다.

여동생의 타박을 들을 때마다 제플린은 답답하기만 했다.

‘왜 모르는 거지? 내 손으로 육성한 천재가 천하를 호령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게…… 그게 그렇게 큰 욕심인가?’

당연히 큰 욕심이었다.

이를 인정하기 싫은 제플린은 급기야 여동생이 자신을 타박하며 했던 말을 진지하게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정말 관리자 자리를 넘길까? 그리고 난 세기의 천재를 찾아 떠나는 거다.’

애초에 제플린은 기사단에 머무는 시간이 한없이 적었다. 테오도르의 명으로 외부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까.

공작가 내부의 감시자들은 원래 여동생이 관리하고 있으니, 외부의 감시자들만 적당히 관리해 주면…….

그러면 여동생도 충분히 수장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좋아. 멜도르 앨턴이 성년식을 치르기 전에 난 수장의 자리를 넘겨주고 공작가를 떠난다.’

여동생이 들으면 기절할 생각을 하던 것이 바로 엊그제.

현재의 제플린은 아주 빠른 속도로 그 다짐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탕-!

귓가에 깔끔한 총성이 울렸다.

곧 그 소리를 낸 장본인이 총을 내리며 물었다.

“현재 내가 몇 마리를 잡았지?”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제플린은 습관처럼 고저 없는 목소리를 내었다.

“새 여섯, 토끼 넷, 사슴 하나입니다.”

“그래? 생각보다 별로 못 잡았네.”

별로 못 잡았다고……?

제플린은 마른 목에 침을 꿀꺽 삼켰다.

작년 사냥 대회에 참가했던 멜도르는 고작 토끼 두 마리가 전부였다.

그에 비해 압도적인 성적을 내고 있음에도 여자는 과시하지 않은 채 말을 몰았다.

제플린은 곧은 자세로 총을 장전하는 여자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주시했다.

벨라디 앨턴, 제국의 하나뿐인 공녀.

그리고 테오도르 앨턴의 딸.

사실 이외에 제플린은 벨라디에 대해 잘 몰랐다.

표면적으로 그는 수많은 앨턴 공작가의 기사 중 한 명이었고, 벨라디는 검 근처로 다가가지도 않았던 귀족 아가씨였으니 당연했다.

그나마 멜도르와는 테오도르가 후계자와 미리 안면을 트라며 준 임무 덕분에 몇 번 만났지만…….

‘벨라디 앨턴과는 조금의 일면식도 없었다.’

오늘도 그런 경우였다.

테오도르는 황제의 사냥 대회마다 제플린이 멜도르를 보좌하기를 원했다.

그게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주인이 시키는데 거부할 수 있을 리가. 제플린은 매번 다른 기사들 사이에 섞여 멜도르의 사냥을 따라나섰다.

그러다 오늘만 멜도르 대신 참가한 벨라디를 따르게 된 것인데.

그래서 더 탐탁지 않았는데…….

‘따님이 저렇게 사냥을 잘한다는 말은 안 했잖습니까, 공작님……!’

벨라디는 교재에 나온 정석의 자세로 총을 발사했다.

철컥, 탕-!

그녀가 쏜 총알은 노리고 있던 사냥감을 단 한 번도 놓치지 않았다. 그 속도는 또 어찌나 빠른지.

제플린은 힐끔 뒤를 돌아봤다. 사냥감을 챙기라는 명을 받은 기사 두 명은 어느새 저 멀리 떨어져 있었다. 모두 벨라디가 너무 날렵하게 사냥을 이어 간 덕분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제플린이 눈치 못 챈 짐승의 기척까지 찾아내 겨냥했다. 그는 평생 생물의 기척을 읽는 훈련을 해 온 사람인데 말이다.

제플린이 알기로 그녀는 기척 감별 훈련은 물론, 특별한 검술 훈련도 받지 않았다. 그런데 본인보다 더 감각이 기민하다고?

그건 제플린의 자존심에 큰 스크래치를 냈다.

‘돌아가면 바로 훈련 강화다……!’

그 다짐과는 별개로, 그의 심장은 거세게 두근거리고 있었다.

평생 인재를 갈망하고, 감시자들을 관리해 온 그의 안목이 본능적으로 벨라디의 뒷모습을 관찰했다.

‘타고난 골격과 우월한 신체 조건, 반동이 심한 총을 쏘고도 흔들림 없는 지구력, 한 시간 째 지친 기색 없이 사냥을 즐기는 체력. 무엇보다…….’

히이이이이잉-!

제플린의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벨라디가 타고 있던 말이 성질을 냈다. 이제 막 5살이 된 말은 공작가에서도 성질 더럽고 힘이 강하기로 유명한 알렉산더였다.

처음 그녀가 알렉산더를 타고 올 때만 해도, 저러다 낙마를 하면 어쩌나 난감했었는데…….

“알렉, 얌전히-.”

벨라디는 그렇게 말하며 한 손으로 말고삐를 단단히 틀어쥐었다. 그러고는 갈기를 거세게 흔들던 알렉산더의 머리를 하늘로 향하게 했다.

거대한 흑마는 그 간단한 동작 하나에 쉽게 제압당했다.

히이이잉-.

“쉬, 착하지.”

상냥한 목소리와는 다르게 고삐를 거머쥔 그녀의 손은 무척이나 위압적이었다.

영리한 알렉산더는 앞발을 땅으로 몇 번 긁더니 패배를 인정한 듯 꼬리를 살랑 흔들었다.

‘무엇보다 얼핏 보면 마물 같은 저 알렉산더를 한 손으로 제압하는 괴력!’

심지어 남은 손은 건장한 성인도 오래 들기 힘든 사냥용 총을 떡하니 쥐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본 제플린은 정말 순수하게 감동했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