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난 손에 묻은 먼지를 탁탁 털며 하녀들을 바라봤다.
“집사에게 말해서 이것 고치렴.”
“예, 예! 알겠습니다.”
하녀 몇이 쪼르르 달려갔고, 난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머니가 멜도르를 불쌍해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놈이 딸로 태어난 나 대신, 가문의 후계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외모를 하나씩 물려받아 검은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내 동생.
원작에서 놈은 츤데레 ‘둘째 오빠’로, 다혈질에 잔정이 많은 캐릭터였다. 그래서 초반에 네시아를 동생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러면서도 은근히 챙겨 주는 모습을 보여줬지.
이런 멜도르는 검술보다 마법에 소질이 있었는데, 이게 어머니가 놈을 안타깝게 여기는 점이었다.
‘앨턴 공작가는 대대로 제국의 북부를 수호하며 검을 숭배하는 가문이니까.’
현 공작이자 내 아버지인 ‘테오도르 앨턴’은 한 세기에 한 번 태어날까 말까 한 검술의 천재였다.
원작에서는 얼굴뿐 아니라 아버지의 재능까지 쏙 빼닮은 첫째가 후계자였으니,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그 첫째가 지금은 나지.’
그 때문에 자연스럽게 아들인 멜도르가 후계자가 되었고, 놈은 마법 대신 검술을 배우게 되었다.
후계자라는 중압감.
적성에 맞지 않는 검술.
이 두 가지는 어린 멜도르에게 큰 스트레스를 주었다. 어머니는 그런 멜도르를 불쌍히 여기며, 항상 아픈 손가락으로 여기셨다.
무뚝뚝한 아버지 역시 어린 아들을 보며 종종 안타까움을 표현하셨다. 앨턴 공작가의 가신들도 전부 멜도르에게만 관심을 쏟았다.
‘그리고 그 사이에 낀 나.’
난 언제나 찬밥 신세로, 가족들 사이에서 짙은 소외감을 느껴야 했다. 전생처럼 어린 시절부터 눈치를 보며 지냈던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멜도르가 나보고 편하게 산다며 화풀이를 해도, 뭐라 반박을 못 했어.’
애초에 멜도르 일이라면 온 식구가 끼고도니까 포기한 부분도 있었다. 그렇게 타고난 성격을 죽인 채, 난 있는 듯 없는 듯 살았다.
내가 빙의되어서 원작과 달라진 것은 두 가지다.
성별, 그리고 자아.
원작의 첫째가 가진 천재적인 검술 실력과 타고난 육체는 그대로라는 것이다.
과거의 나는 이런 내 재능을 짐처럼 여겼다. 후계자인 멜도르가 검술에 소질을 보이지 못하고 괴로워하는데, 내가 이러면 안 되니까.
그래서 일부러 검을 멀리하고 철저히 부모님이 원하는 딸로서 살아왔다.
‘그때는 멋모르고 순응했는데……. 더럽게 억울하네?’
내가 왜 멜도르에게 죄책감을 느껴야 하지?
부모님의 칭찬이 뭐라고 그렇게 목숨을 걸었지?
게다가 멜도르는 원작에서 형한테 껌벅 죽는 놈이었다. 아버지보다도 형을 더 동경하던 놈이었는데, 왜 나한테는 화풀이를 해?
‘내가 누나라서? 후계자가 아니라서?’
뭐가 됐든, 전생의 기억이 돌아온 이상 더는 그 괘씸한 놈을 가만히 둘 수 없었다. 일단 호칭부터 정리할 생각이었다.
옛날부터 그랬지만, 지금은 더더욱 멜도르가 나한테 ‘야, 너’거리는 것이 거슬렸으니까.
‘문제는 아버지인데…….’
어머니가 돌아가셨지만, 아직 아버지가 남아 있었다.
그는 멜도르의 든든한 뒷배였다. 아버지의 애정을 믿으니 멜도르가 저렇게 저택에서 활개를 치는 것이리라.
‘가뜩이나 내가 누렸어야 할 것들을 전부 빼앗긴 마당에……. 멜도르가 기어오르는 꼴은 내가 또 못 보거든.’
“그러려면 아버지를 치워야 해……. 아버지를.”
내 혼잣말에 방문을 열어 주던 하녀 둘이 흠칫했다. 난 그런 하녀들을 지나쳐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뭘 해야 할까.’
현재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원작의 내용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난 의자에 앉아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떠올리며 종이에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를 이 저택에서 내보내려면…….’
그 후 쓸 수 있는 정보와 없는 정보를 분리해, 최고의 효율을 내는 방안을 계획했다. 흰 배경에 큰 스케치들을 그리는 것처럼 작업은 척척 이루어졌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계획을 전부 세우고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밤을 지나서 새로운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창가 너머로 들어오는 새벽녘의 햇빛을 맞이하며 난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일단 그자를 포섭해야 해.’
마침 타이밍이 좋았다. 일정을 살펴보니 며칠 뒤에 황제가 주관하는 사냥 대회가 있을 예정이니까.
그 대회에 반드시 그자도 따라올 것이다.
‘내가 거기에 가야겠어.’
그는 내 도약의 첫 번째 발판이 될 것이다.
난 기대감에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그 시간이 다가오길 기다렸다.
***
원작을 보면, 첫째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는 인물이 있다.
이름은 제플린 빈센드. 그는 첫째의 최측근 기사로 겉으로는 네시아를 귀여워하는 조연에 불과했다.
하지만 뒤편으로는 앨턴 공작가와 아주 긴밀한 관계로 얽혀 있는 존재였다.
‘공작가의 손과 발이 되어 주는 비밀 조직의 관리자니까.’
앨턴 공작가의 내, 외부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사용인들을 지켜보며, 배신자를 색출하는 등 각종 비밀 업무를 수행하는 조직. 원작에서는 이들을 ‘감시자’라고 칭했다.
그리고 제플린은 이 감시자 중 한 명으로서, 그들을 통제하는 수장 격의 역할이었다.
‘이 중요한 사실이 소설 후반부에서야 드러난단 말이야.’
전생의 기억을 자각하지 못했다면, 나 역시 그를 눈여겨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제플린은 자기 정체를 숨기는 것에 익숙한 사내였다.
그래도 큰 걱정은 없었다. 그가 첫째의 최측근이 된 이유를 난 확실히 알고 있으니까.
‘첫째의 기량에 반했다고 했어.’
그는 감시자를 교육하는 역할도 겸했는데, 그 탓인지 재능 있는 자들을 욕심냈다.
그냥 욕심을 낸 게 아니라, 매우 아주 많이.
원래 ‘감시자’들은 가주인 아버지만이 존재를 알아야 했고, 조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첫째의 재능을 알아본 제플린은 하루빨리 그를 따르고 싶어 했다.
‘정확히는 키우고 싶어 했지만.’
첫째가 욕심난 제플린은 그가 성인이 될 때까지 참지 못했고, 아버지에게 사정사정해 때 이르게 그의 최측근이 되었다.
애초에 아버지 역시 후계자인 큰아들을 믿고 있었으니, 별다른 잡음도 없었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난 아들이 아니었고 후계자도 아니었다. 따라서 제플린과 전혀 접점이 없었다.
‘아니, 그 이전에…….’
나는 제대로 된 고등 교육도 받지 못했다. 자동적으로 4년 전 일이 떠올랐다.
그때 당시 내 나이 열둘, 멜도르는 여덟. 원래 우리는 함께 후계자 수업을 들었다.
내가 후계자 수업을 들을 수 있었던 건, 공작가의 일원으로서 배움이 깊으면 좋을 것이라는 아버지의 판단에서였다.
하지만 멜도르의 한마디로 난 수업에서 제외되었다.
-다른 사람이랑 함께 수업을 들으니 집중하기 힘들어요.
그렇게 단숨에 후계자 수업을 듣지 못하게 되었을 때는 정말 분해서 돌아 버리는 줄 알았다.
그날,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부모님의 결정에 반항했다.
-멜도르만 수업을 듣는 건 말도 안 돼요!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있을게요, 그러니 듣게만 해 주세요!
내 호소에 아버지는 고민하는 듯했다.
그때 나선 게 어머니였다.
-멜도르는 아직 어려서 많이 산만하잖니. 우리는 그 애가 최대한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줘야 해. 벨라디는 누나니까, 동생에게 양보할 수 있지?
어머니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달래듯이 속삭였다.
-나중에 엄마가 벨라디를 위한 수업을 따로 만들어 줄게. 응? 엄마 조금만 도와줘, 우리 딸.
어머니가 이렇게까지 말씀하시자, 난 하는 수 없이 후계자 수업을 포기해야 했다.
그렇게 멜도르는 배움을 독식했다.
‘그런 주제에 툭하면 나한테 빈정거렸지. 매일 놀러 다닌다고 말이야.’
참고로 어머니가 약속한 ‘날 위한 수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당시 멜도르의 검술 수업이 시작되면서, 녀석의 응석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하아, 아주 가슴이 꽉 막히는 과거로군.’
결국 난 독학으로 공부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혼자서 각종 이론서를 가지고 끙끙거렸던 때를 회상하자 삐뚤어진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런 지식 습득에는 당연히 한계가 있었다.
‘무조건 제플린을 내 수하로 만들어야 해.’
그러면 그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무력을 흡수할 수 있고, 그가 관리하는 감시자들도 이용할 수 있으니까.
조합도 참 좋잖아?
‘제플린은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고, 나는 교육을 받아야 하고.’
난 그렇게 생각하며 걷는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내가 향하는 곳은 저택 야외에 위치한 사격장이었다.
타앙-!
안으로 들어서기 전부터 누군가 총을 쏘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가까이 다가가니 하인 몇이 사격장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중 몇몇이 눈에 익었다.
‘역시 여기 있을 줄 알았어.’
난 뒤따라오는 하녀들에게 멈추라는 손짓을 했다.
“너희들도 여기서 대기하고 있어.”
“예, 벨라디 님.”
하녀들의 대답을 들으며 혼자 사격장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가문 소유의 엽총을 보관하는 곳이라 보안 마법으로 철저히 보호받았기 때문이다.
안으로 들어가자 다시금 총소리가 들렸다.
타앙-!
“젠장!”
그 뒤로 앳된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살짝 어설픈 자세로 총을 들고 있는 멜도르였다.
놈은 총을 바닥에 패대기치며 분에 찬 듯 소리쳤다.
“이거 불량 아니야?! 왜 조준이 안 되는 거냐고!”
“이런, 멜도르.”
난 멜도르가 내던진 총을 직접 주워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총신은 아무런 흠집 없이 멀쩡했다.
참고로 충격에 의한 오발은 걱정할 필요 없었다. 제국의 모든 총에는 고도의 안전 마법이 집약되어 있으니까.
‘사냥 문화가 발달한 곳이라, 안전성 면에서는 현대의 총보다 뛰어나지.’
난 총신에 박힌 작은 자수정들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가문의 귀한 재산을 험하게 다루면 쓰나.”
내 등장에 놈의 목소리가 더욱 날카로워졌다.
“너 뭐야? 네가 왜 여기에 있어?”
난 멜도르의 말에 답하지 않고 옆에 섰다.
저 멀리 떨어져 있는 표적 판은 멜도르가 쏘았는지 곳곳이 뚫려 있었다.
‘명중은 하나도 없군.’
“뭐, 뭘 봐!”
내 시선을 느꼈는지 멜도르의 얼굴이 붉어졌다. 난 자세를 잡고 총을 표적에 조준했다.
그리고 발사.
타앙-!
총의 반동에도 내 몸은 안정적이었다. 탄환은 매끄럽게 표적 판의 정중앙을 뚫었다.
난 그걸 보며 미소 지었다.
“다행히 불량은 아니네.”
내 말에 멜도르의 얼굴이 더더욱 붉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