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는 일평생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내 자아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왜 앨턴 공작가의 첫째가 아들이 아닌 딸이 되었지?’
모든 것이 소설과 똑같은데, 왜 내 성별만 바뀐 거냐고.
거울을 보며 고민하다 문득, 어머니가 말해 주셨던 내 태몽이 떠올랐다.
-엄마가 깊은 숲속을 산책하고 있었는데, 길목에 귀여운 아기 짐승이 떨고 있었어. 짙은 검은색 털에 붉은 눈이 너무나 예뻤단다.
떨고 있는 게 가엽고 마음이 쓰여서 품에 안으려 했는데, 뒤에서 피투성이의 검은 맹수가 나타난 거야.
그 맹수는 다짜고짜 아기 짐승의 목덜미를 물고는 내 품으로 돌진했지 뭐니? 엄마는 깜짝 놀라서 둘을 같이 껴안고 말았어. 이 태몽 때문에 엄마와 아빠는 벨라디가 쌍둥이인 줄 알았단다.
자, 여기서 과연 떨고 있던 귀여운 아기 짐승이 나였을까, 아니면 피투성이의 검은 맹수가 나였을까?
‘당연히 검은 맹수가 나겠지!’
이전 삶에서 난 교통사고로 사망했고, 피를 많이 흘렸었다. 그럼 누가 봐도 피를 흘리고 있던 검은 맹수가 나잖아.
‘이거 아기 짐승이 원작의 첫째 오빠인 모양인데.’
내가 그 아기 짐승의 목덜미를 물고 어머니 품에 같이 뛰어들어서 이렇게 태어난 건가? 나랑 그 첫째 오빠랑 뒤섞인 거야?
나는 거울 속, 어머니의 흔적은 단 하나도 없는 내 얼굴을 노려보았다.
사실 이런 태몽 하나로 이해하기에는 부족한 것이 많았다. 하지만 어떻게 되었든 간에 난 ‘벨라디 엘턴’으로서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가야 했다.
그러니 더 고민해 봤자 머리만 아플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도 장녀로 태어난 건 마음에 들지 않지만.’
빙의 전에도 난 첫째 딸이었다. 그것도 동생만 예뻐하던 가난한 집안의 장녀.
이 뒤로는 안 들어도 뻔한 스토리다.
장녀로서 희생을 강요하던 부모님.
-딸만 한 자식 없다.
-역시 우리 딸이 최고다.
이런 말뿐인 칭찬이 뿌듯해서 양보만 하던 나.
부모님의 입버릇은 집에 돈이 없다는 것이었기에, 난 항상 눈치를 보며 살았다.
고등학생 때는 최소한의 차비만 받아도 잔소리를 들었고, 대학생 때는 지원이 전부 끊겨 아르바이트 삼매경이었다.
그에 비해 동생은 집이 가난한 걸 전혀 모른 채 자랐다. 놈은 항상 자연스럽게 부모님께 용돈을 받았고, 마음대로 놀러 나가며 여유로운 생활을 즐겼다.
‘점점 지쳐 갔던 나와는 다르게 말이야.’
그렇게 아등바등 대학을 다녔고, 졸업이 다가왔다. 부모님은 취업하면 자신들이 월급을 관리해 주겠다며 나를 꼬셨다.
하지만 운이 좋은 걸까, 나쁜 걸까.
난 졸업 후 바로 취직하는 데 실패했고, 그대로 취준생이 되었다.
그때 가족들의 반응은…….
-어휴, 넌 그동안 놀았니? 남들 다 하는 취직을 왜 못 해, 이 반푼아!
-취업 준비? 그런 거는 너 알아서 해라. 늙은 부모한테 기댈 생각 말고.
-그러면 그렇지 뭐. 누나는 역시 철이 없어.
그때 느꼈던 회의감이란!
난 첫째라는 책임감과 의무감에 언제나 짓눌린 인생을 살아왔다. 그래도 가족들은 이런 내 희생을 알아주는 줄 알았다.
부모님이 나를 가엽게 여기는 줄 알았고, 동생 역시 내게 고마워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족 중 누구도 나를 생각해 주지 않았어.’
난 너무 뒤늦게서야 현실을 자각했다. 가족들에게 내 양보와 희생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는 것을.
그 뒤로 난 집을 뛰쳐나왔고, 그들과 연을 끊었다. 가족들은 나를 보고 냉정하고 이기적인 년이라고 욕했다.
하지만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난 굳게 결심했다.
희생 따위는 이제 개나 주라고!
앞으로 나만 알고, 나만 생각하고, 나만 잘 살 거라고!
‘그리고 얼마 안 가 교통사고로 죽어 버렸지만.’
기구하다, 내 인생. 정말 사이다 하나 없이 팍팍한 고구마만 가득했구나.
죽어 가는 와중에 내 머릿속을 채웠던 건 하나였다.
-제발! 다음 생에는 화목한 부잣집의 외동으로 태어나서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렇게 빌었는데, 왜 또 첫째로 태어난 거지?”
그것도 원래 살던 현대 세계가 아니라 읽던 로판 속 장녀라니.
게다가 평범한 빙의도 아니고 뭔가 꼬인 빙의라고?
‘일단 진정하자, 벨라디 앨턴.’
잠시 심호흡을 한 후, 욕실에서 간단히 씻은 난 하녀들을 불렀다.
“눈이 부었으니 찜질 팩 좀 가지고 와.”
“예, 벨라디 님.”
“마사지도 할 거니까 준비하고.”
하녀들이 고개를 푹 숙인 후, 신속하게 팩을 가지고 왔다. 그걸 눈 위에 올린 채 잠시 소파에 누워 있으니 하녀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마사지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래. 어머니 장례로 온몸이 찌뿌둥하네.”
“예, 벨라디 님. 평소보다 꼼꼼히 하겠습니다.”
난 환복 후, 방에 따로 마련된 마사지실로 향했다. 곧 내가 좋아하는 향유 냄새가 느껴졌다. 하녀들은 분주한 손길로 내 몸을 정성껏 마사지해 주었다.
전생에서는 가질 수 없었던 호사로운 한때. 난 이 순간을 즐기며 죽기 전 마지막 소원을 떠올렸다.
화목한, 부잣집, 외동.
‘그중 가장 중요한 부잣집 자식으로 빙의했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기억을 자각하자마자 다 때려 부쉈을 거다.
난 피로가 풀리는 걸 느끼며 조금 더 구체적으로 원작 소설의 내용을 떠올렸다.
일단 원작 여주인 ‘네시아’. 그녀는 11살 나이에 앨턴 공작가의 막내딸로 입양된다.
사람들은 차가운 앨턴 공작이 네시아를 입양한 이유가 죽은 공작 부인과 매우 닮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뭐, 어떤 의미로는 네시아도 어머니의 자식인 셈이지.’
하여튼 햇살 같은 네시아는 앨턴 공작 부인의 죽음 이후, 계속 음울했던 공작가를 단번에 바꿔 놓는다. 공작가의 남자들은 사랑스러운 네시아의 매력에 퐁당퐁당 빠져 갔다.
이런 해맑은 네시아에게도 아픈 과거가 있었지만…….
‘아빠와 오빠들, 그리고 남자 주인공을 만나며 점점 성장하지.’
그렇다.
이 소설은 엄청난 악역도 심각한 사건도 복잡한 인간관계도 없는, 귀염 뽀작한 여자 주인공의 일상 힐링 성장 소설인 것이다.
‘난 이런 소설의 첫째 오빠 포지션에 빙의해 버린 거고.’
그럼 이제 누가 묵묵하고 굳건하게 여동생을 지지해 주고 아껴 줘?
……설마 나?
‘말도 안 되는 소리.’
당당히 선언하겠는데.
앞으로 동생에게 양보하고 배려한다? 첫째로서 책임감을 가진다?
그딴 건 내 인생에 절대, 네버, 다시는 없을 예정이었다.
‘내 밥그릇은 내가 지켜야 해. 가족? 동생? 그런 거 다 필요 없어.’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그 누가 말했던가.
전생의 기억을 잊었던 난 전과 똑같은 삶을 살고 있었다.
누나로서 언제나 동생에게 양보하고, 부모님 말씀 잘 듣는, 그런 착하고 책임감 강한 장녀로서의 삶 말이다.
‘그나마 풍족한 집안이라 전처럼 돈 때문에 눈치 볼 일은 없었지만…….’
이곳은 가부장제가 꽤 남아 있는 곳. 우리 부모님도 이에 크게 어긋나는 분들이 아니셨다.
특히 어머니는 대놓고 아들을 예뻐하고 안타깝게 여기는 경향이 심했다.
‘매일 멜도르가 불쌍하다고 걱정을 하셨으니까.’
여기까지 생각하자 새삼 분노가 치밀어 올라 주먹을 꽉 쥐었다.
“베, 벨라디 님?”
내 몸에 힘이 들어가자 마사지를 하던 하녀들이 놀라서 물어 왔다. 난 얼굴에 씌워져 있던 팩을 치우며 상체를 일으켰다.
“오늘은 그만. 뒷정리를 해도 좋아.”
“예, 예!”
하녀 몇이 마사지실을 정리했고, 몇은 내가 실내복으로 갈아입는 걸 도와주었다.
옷을 다 갈아입고 머리를 손보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근처에 있던 하녀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대기하고 있던 하녀가 문을 열었다.
그러자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벨라디 님. 공작님께서 부르십니다.”
아버지의 하인이었다.
“지금? 멜도르는?”
“같이 부르셨습니다.”
“알겠어. 이것만 마무리하고 가지.”
내 말에 머리를 묶고 있던 하녀들이 더 분주히 손을 움직였다. 간단하게 치장을 마친 후, 난 하인을 따라 아버지의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니 이미 멜도르가 도착해 있었다.
“늦었군.”
가운데 소파에 앉아 있던 아버지가 나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오른쪽 소파에 앉아 있던 멜도르는 삐죽 한쪽 입가를 올렸다.
“또 그놈의 치장으로 늦은 거겠죠. 넌 아버지의 부름보다 그까짓 게 더 중요하지?”
저 새끼가…….
난 멜도르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 싶은 것을 참았다. 그리고 아버지께 살짝 고개를 숙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내가 왼쪽 소파에 앉자 아버지가 무겁게 입을 여셨다.
“알다시피 어제로써 공식적인 장례는 모두 마쳤다.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야겠지.”
그 말에 집무실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아버지의 표정은 굳어 있었고, 멜도르 역시 눈에 띄게 우울해했다.
난……. 난 잘 모르겠다.
분명 어제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슬펐는데…….
전생의 기억을 되찾자마자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푸시식 식어 버린 느낌이다.
‘이제 남은 건…….’
그때 아버지의 입이 다시 열렸다.
“벨라디 네 약혼 문제는 더 미뤄 둬야겠다. 집안 분위기가 정리될 때까지 대기하도록.”
“네, 아버지.”
“멜도르 네 검술 수업도 다시 시작하겠다. 힘들겠지만, 조금 더 힘내 다오.”
“……예, 아버지.”
“믿고 있겠다.”
아버지의 말에 멜도르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삭막한 대화가 끝난 후 나와 멜도르는 아버지의 집무실을 나섰다.
복도를 걷는데, 옆에서 걷던 멜도르가 나를 노려봤다.
“넌 좋겠다. 아무런 의무도 없이 놀기만 하고.”
“뭐라고?”
내 말에 멜도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틀린 말 했어? 오늘처럼 마음 편하게 치장만 하다가, 때가 되면 좋은 가문의 공자와 결혼하면 되잖아. 누구는 항상 피나는 훈련과 공부에 허덕이는데 말이야.”
“…….”
“넌 나한테 감사한 줄 알아. 내 희생 덕분에 네가 편하게 사는 거니까.”
난 멜도르가 지껄이는 개소리를 전부 듣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야! 말하는데 어디 가!”
머리가 분노로 들끓었다.
‘진정해. 진정하자.’
지금은 아버지의 집무실과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나는 멜도르의 외침을 무시한 채 그곳을 벗어났다.
그리고 어느 한적한 복도에 다다랐을 때, 참지 않고 벽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쾅!
묵직한 소리와 함께 벽돌 벽이 내 주먹 모양으로 움푹 파였다.
“히익.”
“베, 벨라디 님…….”
이런 내 모습에 뒤따라오던 하녀들이 기겁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저딴 게 뭐가 불쌍하다고.”
죽은 어머니께 이렇게 말하고 싶다.
어머니의 편애가 자식 인성 다 망쳐 놨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