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런 빌어먹을.”
내가 다시 한번 빙의를 자각하자마자 내뱉은 첫마디는 이거였다.
이런 빌어먹을, 개 같은 세상.
“다 망해 버려라, 젠장.”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지만, 막막한 현실까지 가려질 리 만무했다.
난 이를 아득 갈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현재 내 이름은 벨라디 앨턴, 나이는 열여섯.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앨턴 공작가의 첫째 딸로서 정말 충실히 살아왔으며, 돌아가신 어머니의 장례는 어제 막 끝난 참이었다.
‘그런데 내가 소설 속에 빙의됐다는 것이 이제야 기억나다니.’
이게 말이 돼? 평생을 벨라디로서 잘 살아왔는데 갑자기 빙의라니. 이게 말이 되냐고!
한참을 침대에서 괴로워하는데,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벨라디 님. 일어나셨나요? 간단한 아침을 가지고 왔습니다.”
하녀의 공손한 말에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난 어렵사리 말문을 열었다.
“들어와.”
내 허락이 떨어지자 문이 열리며 하녀들이 분주히 준비하는 소리가 들렸다.
난 몸을 일으켜 침대 헤드에 상체를 기댔다. 곧 원목 베드 트레이에 아침 식사가 준비되었다.
“시중은 필요 없으니까 나가 봐.”
“예, 벨라디 님. 필요하시면 불러 주세요.”
하녀들이 나가자 난 시원한 물 한 잔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래, 아무리 어이가 없어도 빈속은 채워야지.’
거친 포크질로 베이컨을 찍은 후, 입 안에 밀어 넣었다. 그러면서 냉수가 담겼던 컵을 눈가에 대었다. 사흘 동안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하며 펑펑 운 덕분에 눈가가 다 불어 터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차가운 것이 닿자 따가운 부기가 좀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아침 다 먹고 찜질 팩을 가져오라고 해야겠어.’
몸이 이곳저곳 쑤시니까 향유 마사지도 준비하라고 해야지.
여기까지 생각하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진짜 어이가 없네.”
자연스럽게 사용인들을 부리려 하다니. 자기 일은 직접 해야 직성이 풀리던 전생의 나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일단 부지런히 아침을 먹으며 상황을 정리해 봤다.
난 오늘 처음으로 빙의를 자각한 것이 아니다.
내가 처음 빙의를 깨달았던 때는 그야말로 까마득한 옛날.
‘지금으로부터 어언 16년 전…….’
내가 태어나고, 사물의 색을 완벽히 구분할 수 있게 된 갓난아기 시절의 일이다.
그때 당시 ‘빙의’를 자각할 수 있었던 건 어머니의 모습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소설 속 묘사와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깨끗한 은발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분이셨으니까.
나와 눈을 마주하며 웃는 그녀를 보자 즉시 느낌이 왔었다.
‘아, 여기 내가 죽기 직전 읽었던 소설 속이구나.’
그걸 깨달은 순간, 아직 아기였던 난 세상이 떠나가라 울고 말았다.
말로만 듣던 빙의와 너무나도 낯선 환경. 이런 것을 감당하기에는 내 신체적인 나이가 매우 어렸던 탓이었다.
갓난아기가 몇 날 며칠을 먹지 못하고 목이 쉬도록 우니,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던 어머니는 내게 ‘정령의 마법’을 걸어 주었다.
소설 속 원작 여주의 어머니이자, 나의 어머니인 앨턴 공작 부인. 그녀가 세기의 마법사였고, 눈의 정령과도 막역한 사이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머니가 펼친 ‘정령의 마법’ 덕분에 난 순식간에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부작용으로 빙의 전 기억을 모조리 잊고 말았지만.’
그렇게 난 평범한 아기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벨라디 앨턴’으로서 지금까지 살아왔는데…….
오늘 새벽 무렵, 잊고 있던 전생의 기억이 내 머릿속을 강타한 것이다.
‘마법을 걸어 주었던 어머니가 죽고 나서야 비로소……!’
뒤늦게 기억을 되찾은 게 큰 문제는 아니었다. 지금은 마냥 어리지도 않았고, 벨라디로 살아왔던 시간이 있으니 환경이 낯설지도 않았으니까.
‘……그래, 큰 문제가 아니었어야 했는데 말이지.’
“하필 또 첫째 딸이야.”
나는 들고 있던 포크를 꽉 움켜쥐었다. 내 손아귀 힘에 못 이겨 철로 만들어진 포크가 꾸깃 구겨졌지만,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신경질적으로 식사를 마친 나는 옆에 있던 종을 흔들었다. 곧 문이 열리며 하녀들이 들어왔다.
나는 자리를 정리해 주는 그녀들을 보며 물었다.
“아버지와 멜도르는?”
“공작님은 집무실에 계시고 소공작님은 아직 주무십니다.”
소공작은 무슨.
난 속으로 콧방귀를 뀌며 입을 열었다.
“알았어, 나가 봐.”
“아침 치장은 어떻게 할까요?”
“지금 안 할 거니까 나가.”
내 기분이 안 좋은 걸 눈치챈 하녀가 공손히 방을 나섰다.
그녀들이 전부 나가고 혼자가 된 난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고급스러운 화장실 내부에 걸린 거울을 보자 깊은 한숨이 나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평범한 빙의는 아니야.”
거울 속에는 계속 봐 왔던 내 외견이 비치고 있었다.
짙은 검은 머리에, 루비같이 붉은 눈. 셀프로 인정할 만큼 잘생기고 고혹적인 외모, 또래보다 훌쩍 큰 키.
무엇보다 가만히 입 다물고 있어도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위압감까지…….
사진으로 봤던 아버지 앨턴 공작의 청소년기와 똑같이 생긴 얼굴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지난 16년 동안, 난 그냥 아버지를 쏙 빼닮은 딸인 줄 알았는데.’
나는 내가 빙의한 이 소설의 내용을 떠올려 봤다.
대충, 어린 여자 주인공이 공작가에 입양되고, 아빠와 오빠들에게 부둥부둥받으며 정령술을 배우는 육아물이었던 것 같은데…….
그리고 내가 소속된 이 ‘앨턴 공작가’는 여자 주인공을 입양한 가문이었지. 여기까지는 별다른 특이사항이 없다.
하지만, 여기서 뭐가 문제냐 하면.
“나 왜 장녀인 거냐고…….”
내가 빙의한 이 포지션.
즉, 앨턴 공작가의 첫째는 원래 무뚝뚝하고 카리스마가 넘치지만, 여주에게는 한없이 다정한 ‘첫째 오빠’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