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멜도르, 넌 우리 앨턴가의 하나뿐인 후계자이며 장남이다. 항상 책임감을 느끼고, 그 위치의 무게를 잊지 말도록.”
“네, 아버지! 명심하겠습니다!”
‘작별 인사 한번 징그럽게도 오래 하네.’
삐딱한 속과는 다르게 나는 입가의 미소를 유지했다.
멜도르에게 각종 격려와 염두의 말을 늘어놓던 아버지는 한참 후에야 내 쪽을 바라봐 주셨다.
“벨라디.”
“예, 아버지.”
아버지는 나를 보고 잠시 말이 없었다. 마치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는 것처럼.
나 역시 아버지의 루비 같은 붉은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하기만 했다.
약간의 침묵이 흐른 후, 그가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
“넌 크게 걱정 안 하겠다.”
멜도르에게 했던 것과 비교되는 매우 간결한 인사였다.
옆에 있던 멜도르가 피식 웃었다. 난 그런 동생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더 진하게 미소 지었다.
“그럼요, 아버지. 이 집의 ‘첫째’로서 아버지가 없는 동안 저택을 잘 관리할게요.”
내 대답에 아버지는 별다른 대꾸 없이 말에 올라탔다.
“출발하겠다.”
“예, 공작님!”
아버지의 말에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거대한 철문을 열었다.
철컹-.
문이 열리자 아버지를 필두로 간단히 짐을 꾸린 기사들이 말을 몰았다.
이른 아침부터 흙먼지가 일어났고, 기사들이 탄 흑마의 거친 갈기가 마구 휘날렸다. 밖으로 달려간 그들은 곧 검은 점이 되어 사라졌다.
‘안녕히 가세요, 아버지. 되도록 오래오래 북부에 머무르셨으면 좋겠네요.’
마음속으로 못다 한 인사를 하는데, 멜도르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첫째는 무슨.”
난 고개를 내려 멜도르를 바라봤다. 이제 12살이 된 귀여운 내 동생은 앨턴가의 핏줄답게 또래보다 키도 크고 덩치도 좋았다.
물론 같은 핏줄인 나 역시 평균 이상으로 키가 컸기에, 아직 멜도르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멜도르는 입을 비죽이며 눈을 흘겼다.
“네가 뭘 관리하겠다는 거야.”
난 그 말에 대꾸하지 않고 멜도르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내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멜도르는 피식피식 나를 비웃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아버지가 없으면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아나 본데. 까불지 말고 얌전히 있어라. 가만히 있으면 절반이라도 갈 텐데 괜히 나서서 사고 치지 말라고.”
멜도르는 그렇게 말하며 저택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나 역시 조용히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러는 동안에도 빈정거림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애초에 네가 할 줄 아는 게 있긴 해? 만날 친구들이랑 놀러 가거나 쇼핑만 하는 주제에.”
내 동생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이렇다.
‘온실 속 화초처럼 너무 귀하게 자라서 버릇이 없는 우리 집 왕자님.’
하지만 오늘로써 그것도 끝이다. 왕자님을 지켜 주던 아버지가 장기간 자리를 비우게 되었으니.
난 멜도르가 떠드는 걸 기꺼이 들어 주며 자연스럽게 놈의 방으로 따라갔다. 마침 뒤에 있던 하녀 한 명이 조용히 다가와 나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북부로 향하는 텔레포트 진이 발동되었다고 합니다.”
텔레포트 진이 발동되었으면 아버지가 수도를 완전히 떠났다는 뜻이다.
“내가 부를 때까지 이 방 근처에 다가오지 마.”
내 말에 하녀는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멜도르의 방을 나섰다. 나는 하녀가 문을 닫자마자 멜도르의 방문을 잠갔다.
철컥.
상황을 인지하지 못한 채 실컷 나불거리던 멜도르가 그제야 날 바라봤다.
“뭐야, 경고는 다 했으니까 이제 나가. 너와 다르게 난 바쁘다고.”
“멜도르.”
난 잠시 멜도르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어머니와 똑같은 푸른색의 눈이 천진한 빛을 띠고 있었다.
“네 말대로 나는 딱히 하는 게 없어서 말이야.”
난 그렇게 말하며 멜도르에게 다가갔다.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멜도르가 주춤거리며 물러나다 뒤에 있던 책상에 부딪혔다.
“이번 기회에 철없는 똥강아지를 제대로 길들여 볼까 해.”
“……너 지금 뭐라고 했냐?”
내 말에 멜도르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일단 누나라는 단어부터 가르쳐야겠지?”
난 손을 뻗어 책상 위에 있는 멜도르의 축음기를 켰다. 곧 녀석이 어머니와 함께 감상하던 교향곡이 흘러나왔다.
난 소리를 최대로 키웠다.
“뭐 하는 거야! 당장 내 방에서 나가!”
뒤늦게 위험을 감지한 멜도르가 내 어깨를 퍽 밀쳤다.
물론, 내가 밀릴 리가 없었다.
“무, 무슨. 꿈적도 안 하잖아……?”
멜도르가 흔들리는 눈으로 자신의 손과 나를 바라봤다. 나 역시 그런 멜도르를 마주 보며 상냥하게 웃어 보였다.
“그래, 내 동생. 네가 지금 기운이 넘쳐서 철없이 까부는 거겠지? 일단 그 기운부터 빼 볼까?”
“으윽! 다가오지 마! 오지 말라고!”
그리고 그날 저녁, 아버지가 없는 앨턴 공작가의 저택.
“으아아아악-! 누, 누나! 누나! 내가 잘못했어! 잘못했다고!”
거친 바이올린 선율로도 다 막지 못한 처절한 비명이 저택 사방에 울려 퍼졌다.